종교 교육원
제32장: 사도행전 13~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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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15장

사도행전 13~15장 소개 및 연대

사도행전 13~14장에는 사울의 첫 번째 선교 여행 때 있었던 사건들과 그 당시 전해졌던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 기간에 사울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선교 여행의 결과,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도 교회 지부가 세워지고, 교회는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사도행전 14:27) 바울은 적에게 돌을 맞는 등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선교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사업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교회는 계속된 성장으로 중요한 시점을 맞게 된다. 수많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교회로 들어오면서 성도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는데, 즉, 일부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사도행전 15:1 참조),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이들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님을 가르쳤던 것이다.(사도행전 13:38~39; 15:11 참조) 이에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은 예루살렘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으며(예루살렘 회의로도 불림), 그곳에서 이 문제에 대한 영감 어린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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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장 연대표

사도행전 13~15장 주해

사도행전 13:1~14:26. 사울의 첫 번째 선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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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지중해 동부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4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 제국에서는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 도시의 인구는 100,000명이 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오직 예루살렘만이 중요한 도시였다. 바울은 세 번의 선교 여행을 모두 안디옥에서 시작하였다.

개종한 이후, 기록상 그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이 시작되기까지 10년의 세월 동안 (후에 바울로 알려진) 사울은 다메섹, 아라비아, 다소, 그리고 마지막에는 안디옥에서 복음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13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1절에 언급된 “선지자들”을 포함한 신권 지도자들로부터 부름을 받고 선교 사업을 하러 갔는데, 이것이 사울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이 되었다. 사울과 함께했던 바나바에 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9:26~31; 11:22~30 주해를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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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지중해 북동부

바울이 첫 번째 선교 여행에서 방문한 도시들

첫 번째 선교 여행의 결실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교회 지부가 세워지게 되었다.(사도행전 1:8 참조) 사울과 바나바는 첫 번째 선교 여행 동안 2,25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했고, 전에는 복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교회 회원이 한 명도 없는 곳에 갔을 때는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회당으로 먼저 가서 그들과 같은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유대인의 가르침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사도행전 13:5, 14; 14:1; 사도행전 13:14~41 주해 참조) 복음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침례를 베푼 후, 그들은 자신들이 떠난 후에 교회를 돌볼 현지 지도자들을 부르고 성별했다.(사도행전 14:23 참조) 그들은 교회 본부로 돌아가는 길에 최근에 세워진 지부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첫 번째 선교 여행에 대한 기사에는 사울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새로운 역량을 드러내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사도행전 13:2~3. 지도자들이 부름에 관한 계시를 받다

사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불러 파송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이 중요한 부름을 결정하기 전에 금식을 하며 계시를 받았다. 칠십인 회장단의 로널드 에이 래스번드 장로는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을 도와 전임 선교사의 봉사 지역을 배정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래스번드 장로는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모임을 마치면서 아이어링 장로님은 세상으로 나아가 회복된 복음을 전파하도록 지명된 각 선교사를 구주께서 참으로 사랑하신다는 간증을 나누셨습니다. 주님의 종들이 이 훌륭한 젊은이들과 나이 든 선교사들, 부부 선교사들이 봉사해야 할 곳을 아는 이유는 구주께서 지니신 위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아침에 저는 이 교회에서 부름받는 모든 선교사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그분의 종을 통해 주시는 계시에 따라 부름받아 특정 선교부로 배정되거나 재배정된다는 더 확실한 증거를 얻었습니다.”(“거룩한 선교사 부름”,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53쪽)

사도행전 13:3~4. 그들이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장 3절과 관련하여,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사울과 바나바는 예언에 따라 부름을 받았으며, 안수례로 성임을 받았거나 성별을 받았거나 아니면 두 가지 모두를 받았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120) 신권 지도자들이 안수례로 사람들을 부름에 성별하는 것은 고대 교회와 현대 교회 모두에서 오랫동안 확립되어 온 절차이다.(신명기 34:9; 교리와 성약 36:1~2; 신앙개조 제5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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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에게서 축복을 받는 남성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은 성별받는 것은 고대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성별은 교회에서 정해진 절차이며, 남성과 여성은 교회 조직, 정원회, 보조 조직 직분에서 특별한 책임을 맡도록 ‘성별’됩니다. …

어떤 이들에게는 성별이 형식적인 행위로 보이겠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성별을 기대하며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들어서 결과적으로 삶이 향상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별[setting apart, 분리시킴]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즉, 죄로부터 분리하고, 육욕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하며, 조잡하고 상스럽고 사악하고 속되거나 저속한 것으로부터 분리하고, 세상으로부터 분리해서 더 높은 차원의 생각과 행동에 이르게 해 줍니다. 이 축복은 부름을 충실하게 수행할 때에만 받을 수 있습니다. …

제 경험에 비춰서 생각해 볼 때,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 그들은 성별을 통해 ‘넓은 마음’을 얻고, 영향력을 확대하며, 지혜를 키우고,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능력을 키웁니다.”(Conference Report, Oct. 1958, 57)

사도행전 13:4~11. 저주하는 신권 권능

바보에서, 로마 총독인 서기오 바울은 복음을 듣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청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려고 하자,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가 그들을 반대했다. 얄궂게도 그의 이름은 바예수(예수의 아들)였으며, 엘루마로도 불렸다.(사도행전 13:6~8 참조) 바울은 엘루마가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려 한다고 말하며, 그를 저주하여 맹인이 되게 했다.(사도행전 13:10~11) 이 일은 주님께서 권세를 받은 종들에게 축복하는 권능과 저주하는 권능을 모두 주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교리와 성약 124:93 참조; 앨마서 30:49~50 비교)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영이 신권 소유자에게 저주하라고 지시하지 않는 한, 누군가를 저주하는 데 신권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저주는 축복과 마찬가지로 신권의 권능과 권세로 행해질 수 있다. … 그러나 지상에 있는 주님의 대리인은 본래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주도록 보내졌으며, 주님께서 계시로 저주를 내려야 한다고 명하실 때 외에는 절대로 저주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Mormon Doctrine, 2nd ed. [1966], 175–76; 또한 마태복음 10:14 주해 참조)

사도행전 13:5, 13. 바울이 마가라 하는 요한과 함께 첫 번째 선교 여행에 나서다

사도행전 13장 5절에 언급된 요한은 다른 곳에서는 마가라 하는 요한 또는 마가로 불린다. 그는 아마도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바나바의 생질이었으며(골로새서 4:10 참조), 사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선교 여행을 시작할 때도 그들과 함께했다. 후에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사울과 바나바는마가라 하는 요한이 버가에서 갑작스럽게 다른 선교사들을 두고 떠나버린 일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었다.(사도행전 15:37~40 참조) 경전에는 마가가 선교 임지를 떠난 이유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후에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로 갔고, 에베소에서는 디모데와 함께했다. 그는 아마 베드로가 “내 아들”이라고 말한 마가였을 것이다.(사도행전 15:37~39; 디모데후서 4:11; 베드로전서 5:13 참조) 따라서, 마가는 초기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

사도행전 13:9. “사울(바울로도 불림)”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 누가는 사울을 히브리어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사울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첫 번째 선교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리고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서 누가는 계속 사울을 “작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이름인 바울로 지칭했다. 이는 바울이 서한에서 자신을 칭했던 이름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13:14~41.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바울의 설교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에서(교회 회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곳인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과 혼동하면 안 됨), 바울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설교를 전했다.(사도행전 13:16, 26; 14:1 참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이방인들을 말하며, 그들은 여러 면에서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했으나 할례 의식을 받고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바울의 많은 이방인 개종자들은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고, 유대 경전(구약전서)을 알고 있었으며,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였다. 할례 의식에 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15:1, 5, 24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3:22~23.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1:1, 17 주해마태복음 1:1~17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3:34.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란(사도행전 13:34) 부활에 관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말한다.(시편 16:10; 89:48~49; 이사야 55:3 참조)

사도행전 13:38~39. 죄 사함과 의롭게 됨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쳤다.(사도행전 13:38)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범법이 크건 작건 간에 해결책은 같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를 믿는 신앙과 그분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한 완전한 회개입니다. …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분을 통해 온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회개에 필요한 모든 단계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오직 그분의 조건에 따라서만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아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행사할 때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니파이후서 9:22~24; 앨마서 11:40 참조] 그것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양심의 평안과 마음의 평화”,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16~17쪽)

또한 바울은 구주께서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게 하셨으며, 이 의롭게 되는 것은 “모세의 율법으로”는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사도행전 13:39) 의롭게 되는 것은 구주에게서 오는 은사이다. 구주께서는 사람을 완전을 향해 계속 진보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다시 둠으로써 그가 죄가 없고, 공의의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롭다고 선언하신다. 모세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로마서 3:27~31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3:45~46.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안디옥에 있는 많은 유대인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반박하고 비방”하였다.(사도행전 13:45)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 실린 Bible Dictionary[성경 사전]에서는 비방[blasphemy, 신성 모독]이란 “하나님을 경멸하는 말 또는 하나님의 성전, 율법,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과 성스러운 관계를 대신하는 무언가를 멸시하는 말”이라고 정의한다.(Bible Dictionary, Blasphemy)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반대에 응하여,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라고 말했다.(사도행전 13:46) 이 순간은 많은 유대인이 복음과 이방인의 개종에 반대할 때, 교회의 선교 사업에서 어떤 일이 점점 일어나게 될 것인가를 예시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바울은 다른 지역으로 가면서 늘 하던 대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마서 1:16) 복음을 계속 가르쳤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거절하면, 바울은 흔쾌히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많은 사람을 찾았다.

사도행전 13:47~48. “다 믿더라”

바울은 그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셔서 “이방의 빛”이 되게 하셨다고 가르쳤다.(사도행전 13:47; 이사야 42:6)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을 포함하여 구원을 받아들일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전해 주어야 했다. 바울의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배척했다.(사도행전 13:47 참조) 그러나 많은 이방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3:48)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대한 조셉 스미스 역에는 “믿는 자들이 모두 영생에 이르도록 성임되었더라”라고 나온다.

사도행전 13:51.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10:14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4:1~6, 14. 바울과 바나바는 사도였다

이 성구는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이 신약전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부분이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 나오는 Bible Dictionary[성경 사전]에 따르면, “사도는 … 예수께서 선택하고 성임하신 십이사도에게(요한복음 15:16) 당신이 지상에서 성역을 베푸는 동안에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되도록 주신 칭호였다.(누가복음 6:13) 그분은 자신이 승천한 후에 자신을 대표하도록 그들을 보내셨다. … 그 칭호는 또한 최초의 십이사도 중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특별한 증인으로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에게도 사용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반복적으로 말했다.(로마서 1:1; 고린도전서 1:1; 9:1; 갈라디아서 1:1) 그는 그 칭호를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에게도 썼으며(갈라디아서 1:19), 또한 바나바에게도 썼다.(고린도전서 9:5~6; 또한 사도행전 14:14 참조)”(Bible Dictionary, Apostle)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바울은 성임받은 사도였으며, 그가 [십이사도 평의회]에서 다른 형제 중 한 사람을 대신하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Doctrines of Salvation, comp. Bruce R. McConkie, 3 vols. [1954–56], 3:153) 아마 다른 사도 중 한 명이 죽임을 당해서 십이사도 평의회에 공석이 생겼던 것 같다.

사도행전의 주요 주제는 사도행전 14장 1~6절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음 전파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극심한 분열이다.

사도행전 14:8~10. “구원 받을 만한 믿음”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노리는 음모를 알고서, 루스드라와 더베로 떠났다. 루스드라에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한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에게 “구원[치유]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아차린 바울은 그에게 걸으라고 명했고, 그는 실제로 일어나 걸었다.(사도행전 14:8~10 참조) 이 일화는 신권의 축복을 통해 치유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먼저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보여 준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이 병자 축복에 관해 전한 유명한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신앙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픈 사람과 그 가족은 종종 의식을 집행하는 형제들이 갖고 있기를 바라는 병 고침의 은사나 신권 권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복을 받는 당사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 축복을 받는 사람이 의식이 있고 책임을 질 능력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이 지닌 신앙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복음 9:22]라는 말씀은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주님께서 매우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킴볼 회장님이 병자 축복을 강조하심”, 성도의 벗, 1982년 8월호, 41쪽)

사도행전 14:11~18. 신으로 불린 바울과 바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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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제우스상

이 고대 그리스의 신인 제우스상은(제우스는 그리스의 최고 신이며 로마의 신인 주피터에 해당하는 신임) 1680년 서머나에서 발견되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남자를 낫게 했을 때, 우상을 믿고 숭배하던 그 지역의 주민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겼다. 그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숭배하고자 했는데, 이는 아마도 바나바가 바울보다 연상이고 신장도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들은 바울을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로 숭배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였기 때문이었다.(사도행전 14:12)

사도행전 14:19~22. 주님의 종들에 대한 박해

안디옥과 루가오니아에서 온 몇몇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극렬하게 반대했고, 급기야는 루스드라까지 쫓아가서 바울을 돌로 치라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바울은 그 시련에서 살아남았다. 그런 시련을 겪었음에도 바울은 꺾이지 않고 계속 수고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주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박해로부터 항상 보호하지는 않으시는 한 가지 이유는, 시련을 통해 정련되고 강화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서의 어려움에는 목적과 뜻이 있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생애를 통해 그는 질병, 사고, 궁핍, 오해, 거짓 고소 및 심한 박해 등과 같은 그를 낙담케 하는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그러한 장애물로부터 그분의 선지자를 보호하고, 무한한 자원을 제공해 주며, 그를 모함하는 자들의 입을 막지 않으셨습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각자 좀 더 구주처럼 되기 위해 어떤 경험들을 겪어야 합니다. 필멸이라는 학교에서 종종 고통과 시련이 교사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는 교훈은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련하고 축복하며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신앙은 시련을 통해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줌”, 리아호나, 2003년 5월호, 17쪽)

사도행전 14:21~22.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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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를 나누는 사람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돌아갔을 때, 늘 하던 방식대로 자신들이 교회 지부를 세웠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였다.(사도행전 14:22) 이 문맥에서 “권하다”라는 말은 “강화하다”라는 의미이다. 현대에,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우리 개개인에게도 교회의 신회원들을 강화해야 할 유사한 책임이 있다고 가르쳤다. “개종자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실질적으로 잘 도와서 자신의 길을 찾게 해 주어야 합니다. 개종자 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곧 친구와 책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모로나이서 6:4) 가지고 양육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기회입니다. …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업입니다. 가정 복음 교사와 가정 방문 교사를 위한 사업입니다. 감독단과 신권 정원회, 상호부조회와 청남 청녀, 심지어는 초등회를 위한 사업입니다.”(“개종자와 청남”, 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47~48쪽)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은 교회 지부가 세워져 있는 여러 도시에서 교회를 이끌도록 충실한 남성들에게 부름을 주고 성별하였으며, “주께 그들을 위탁하”였다.(사도행전 14:23 참조) 후에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현지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라고 권했다.(데살로니가전서 5:12~13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 또한 우리가 현지 교회의 지도자들을 지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주님은 교회의 초기 회원들에게 그분의 종의 음성이 주님의 음성이요, 그분의 종들의 손이 주님의 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교리와 성약 1:38; 36:2 참조) 저는 그 원리가 진실됨을 간증드립니다. 이러한 원리로 교회의 회원들은 지도자에게 충성하고 그들의 지시를 따름에 충실해야 한다는 엄숙한 의무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확언합니다.”(“감독님, 도와주세요!”, 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88쪽)

사도행전 14:24~28.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치다

바울과 바나바는 첫 번째 선교 여행을 계속하면서, 현대의 터키와 키프로스 지역에 있는 몇몇 도시를 더 방문하였다. 그들은 이 여행을 마치면서, 2년여 전에 선교 사업을 시작했던 곳인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사도행전 15:1~5.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유대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안디옥에 있는 다른 회원들을 방문했다. 유대에서 온 이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들”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로 개종한 이방인이 반드시 유대교로 개종하여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주님께서 아브라함 및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성약을 맺으실 때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시며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하신 것을(창세기 17:10~14 참조, 기울임체 추가) 자신들이 옹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긴 것 같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가 성약 그 자체가 아니라 성약의 표징에 불과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왜 할례가 아니라 신앙, 회개, 침례, 성신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새 성약을 맺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사도행전 2:37~38 참조)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바울 및 바나바의 가르침과 상충했으며, 그 결과 바울과 바나바 및 교회의 다른 회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에게 이 문제의 해결책을 구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15:1, 5, 24.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사이에 할례 의식을 제정하시어 여호와와 맺는 성약의 표징으로 삼으셨다. 표징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와 의롭게 생활하며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성스럽고 영원한 축복을 상기하였다.(아브라함서 2:8~11; 창세기 17장 참조) 모세 율법에서는 태어난 지 8일 된 모든 남자아이에게 할례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레위기 12:3 참조), 이는 “어린아이들이 여덟 살이 되기까지는 [주님]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 하는 줄을 너로 영원히 알게 하려” 함이었다.(조셉 스미스 역, 창세기 17:11[경전 안내서]) 신약 시대에는 흔히 유대인을 할례자로, 이방인을 무할례자로 칭하기도 했다.(사도행전 10:45; 로마서 3:30; 갈라디아서 2:7~9; 에베소서 2:11 참조)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새 성약에서는 할례의 표징이 침례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몰몬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몰몬에게 주신 계시에서 “할례의 법이 나로 말미암아 폐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셨다.(모로나이서 8:8) 할례에 관한 논쟁은 교리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오는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사도행전 15:6. 평의회가 하나님의 계시를 구한다

할례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고자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의논하러 모[였다.]”(사도행전 15:6) 이 모임은 대개 예루살렘 회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사도행전 15장 7~29절에는 이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토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교회 지도자들은 함께 협의하고 주님의 영을 구함으로써 논쟁을 해결하고 성신으로부터 확증을 받을 수 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평의회의 영원한 역할에 대해,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함께 협의함으로써 어떻게 교회를 축복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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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드 평의회

와드 평의회

“하나님은 전세에서 천국 회의를 소집하여 우리의 영원한 복지를 위한 그분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발표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로 구성된 평의회부터 시작하여 스테이크와 와드, 정원회, 보조 조직, 가족 평의회에 이르는 모든 단계의 평의회로 조직됩니다.

스티븐 엘 리차즈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체제의 진수는 평의회를 통한 운영입니다. …

여러분이 규정된 방식 대로 평의회에서 논의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시리라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확실히 말씀드립니다.’(Conference Report, Oct. 1953, p. 86). …

우리는 단합하여 노력함으로써 영적인 상승 작용 효과(협력함으로써 능력이 상승되는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바, 이는 협력하여 노력한 결과로 효율이나 성과가 증대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개인이 각각 이룩한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큽니다.”(“협의의 힘”, 성도의 벗, 1994년 1월호, 76~77쪽)

사도행전 15:6~31. 예루살렘 회의에서 제기된 문제들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두 가지 주요 문제가 제기되었다. 첫째,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받는 것이 요구되었는가? 둘째, 만약 그렇다면, 이방인 개종자들은 모세 율법에 대해 어떤 의무를 지는가?

할례 문제는 회의 초반에 선임 사도인 베드로가 “일어나” 자신이 이전에 받은 계시, 즉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계시를 말했을 때 분명히 해결되었다.(사도행전 10:9~16; 11:18 참조) 그는 또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어떻게 성신을 받았는지를 들려주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심]”을 증명하였다.(사도행전 15:7~9) 베드로는 할례가 구원의 필수 요건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었다.(사도행전 15:10~11 참조) 베드로가 말을 마친 후 이어진 침묵은 참석한 사람들이 베드로가 받은 계시의 인도하는 권세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사도행전 15: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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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베드로, 메릴리 캠벨

두 번째 쟁점으로, 야고보가 이방인 개종자들이 모세 율법에서 요구하는 다른 사항들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연설했다.(사도행전 15:13~21 참조) 야고보는 먼저 경전을 인용하여 베드로의 말을 지지하면서,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으리라는 아모스 9장 11~12절에 나오는 예언을 언급하였다. 이 성구로 바리새인이었던 평의회 구성원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베드로를 지지하고 이방인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였다.

그런 다음, 야고보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모세 율법에서 요구하는 몇 가지 사항을 준수하도록 지시할 것을 제안하였다.(사도행전 15:20 참조) 야고보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우상에게 바쳐져 불결해진 고기를 의미함)과 음행을 삼가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권했다. 요약하면, 개종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 만연한 성적인 죄와 우상 숭배에 휩쓸리지 않아야 했다. 모세 율법에서는 피를 마시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레위기 3:17; 17:10~14; 19:26 참조), 야고보는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삼가도록 권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또한 그들 가운데서 선교 사업이 방해를 받지 않게 하려 했을 것이다. 야고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었다고 설명했다.(사도행전 15:21) 다시 말해서, 지중해 전역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 개종자들은 유대인들이 감정이 상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사도행전 15:7~30. 예루살렘에서 열린 평의회

다음 표는 효과적으로 협의하는 것에 관하여 예루살렘 회의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원리를 보여 준다.

사도행전 15장

효과적인 평의회에서 사용된 원리들

7절

평의회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견해를 밝혔다. (“많은 변론이 있[었다.]”)

7~11절

감리 역원이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이전에 받은 계시를 언급했다. (선임 사도인 베드로가 평의회를 감리했으며, 자신이 이전에 받은 계시를 언급하면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전했다.)

12절

평의회 구성원들이 경험을 나누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다. (바나바와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기적을 증거하면서, 베드로가 받은 계시를 지지하였다.)

13~21절

평의회 구성원들이 자기 의견을 표현했다. (야보고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베드로의 권고에 지지를 표명하였고, 관련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22, 28절

평의회는 단합된 결정을 내렸으며, 성신이 그 결정을 확인하여 주었다. (“성령과 우리는 … [평의회의 결정이] 옳은 줄을 알았[다.]”)

22~30절

관련된 사람들에게 결정을 통고하였다. (안디옥, 수리아,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결정 사항을 전달했다.)

사도행전 15:13~29. 야고보

야고보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부형제였다. 당시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부의 지도자였다. 예루살렘은 중요한 장소였기에, 교회에서 야고보의 위치는 높이 평가되었다. 바울은 그를 사도로 칭했다.(갈라디아서 1:19 참조) 그는 사도행전 12장 17절, 21장 18절,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언급된 야고보와 동일 인물이다. 그는 야고보서의 저자일 것이다.

사도행전 15:22~28. 성신이 지도자들을 인도하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단합된 결정에 이르기 위해, 예루살렘 평의회 구성원들은 성신의 인도를 구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예루살렘] 회의의 진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적절한 해결책을 도출하고 나서, 즉 베드로가 발표한 원리에 입각하여 야고보가 설명한 것을 채택하고 나서, [평의회]는 주님께 자신들이 내린 결론이 참되며 주님의 생각과 일치하는지를 여쭈었다. 영의 권능으로 온 그 답은 그들이 내린 결론의 진실성을 증명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144–45)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성신이 했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어쩌면 더 많은 사람이 베드로의 말에 힘을 보탠 후, 야고보는 교회에 서한을 보내 그 결정을 시행하도록 권했고, 평의회는 ‘만장일치’로 단합했습니다.(사도행전 15:25; 또한 12~23절 참조) 사도들은 자신들의 결정을 발표하는 서한에서 ‘성령과 우리는 … [그것이] 옳은 줄 알았[다]”라고 했습니다.(사도행전 15:28) 다시 말해, 이 결정은 성령을 통해 거룩한 계시로 온 것입니다.

오늘날 회복된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도 그와 같은 방식을 따릅니다. 교회 회장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기초하여 교리를 발표하거나 해석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교리와 성약 138편 참조) 교리적 해석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로 구성된 합동 평의회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예를 들어, 공식 선언—2 참조) 평의회는 종종 표준 경전,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 과거 관행을 살펴보는 일 등을 숙의 사항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 교회와 마찬가지로 평의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평의회 구성원 간의 단순한 합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평의회는 이성과 신앙을 모두 동원하여 주님의 생각과 뜻을 파악하는 과정입니다.”(“그리스도의 교리”, 리아호나, 2012년 5월호, 88쪽)

교회 지도자들 간에 서로 다른 의견과 “많은 변론”이 있었으나(사도행전 15:7), 그들은 결국 성신의 속삭임에 응하여 단합을 이루어냈다.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교회 평의회에서 단합을 이루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다. “세상의 몇몇 의회에는 ‘충실한 반대자’라고 불리는 그룹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그런 원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이같은 엄숙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하나가 되라. 만일 너희가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너희는 나의 것이 아니니라.’(교리와 성약 38: 27) 주님은 감리 정원회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의 지지로 내려져야 하나니, 곧 각 정원회의 모든 회원이 그 결정에 동의해야만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교리와 성약 107:27) 이것은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진 감리 역원의 지시하에 평의회에서 솔직하고 공개적인 토론 뒤에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그 결정은 지지받습니다. 우리의 하나됨은 의로운 원리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하나님의 영의 영향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성약을 지키고 신권을 존중함”, 성도의 벗, 1994년 1월호, 37~38쪽)

사도행전 15:23~28. 예루살렘 회의에서 내린 결정

교회 지도자들이 만장일치로, 이방인들이 침례에 앞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해결책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많은 회원은 쉽게 그 결정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로버트 제이 매튜는 이렇게 가르쳤다. “예루살렘 평의회의 조치는 매우 중요한 정책 결정을 수반했다. … 베드로가 고넬료와 관련하여 했던 경험은 오해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지도자들은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이해했으나, 교회의 많은 회원들은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리, 전통, 문화 및 정서의 문제였다. 지도자들이 십 년 전에 그 문제를 교리적으로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가 문화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일부 유대인 기독교도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더군다나, 평의회가 열린 지 적어도 십 년이 흘렀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여전히 모세 율법을 따르고 있었다. (사도행전 21:17~25)

예루살렘 평의회의 결정은 최종적인 결정이 아니었고, 모세 율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을 필요 없다고 선언하였지만, 교회의 유대인 회원들이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Unto All Nations,” Studies in Scripture, Volume Six: Acts to Revelation, ed. Robert L. Millet [1987], 39)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고 수년이 지났는데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반대되는 가르침과 태도에 맞서 싸워야 했다.(로마서 2~4장; 고린도전서 7:19; 갈라디아서 5:6; 6:15; 골로새서 2:11; 3:11; 경전 안내서, “할례” 참조)

사도행전 15:30~40. 바울과 바나바의 불화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가서 예루살렘 평의회에서 내린 결정을 알리도록 선택되었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인 유다와 실라를 데리고 갔는데, “선지자”인 그들은 안디옥에서 설교하고 교회 회원들을 강화하는 일을 도왔다.(사도행전 15:32) 얼마 후에, 바울은 바나바에게 첫 번째 선교 여행 중에 복음을 전파했던 도시들을 다시 찾아가 개종자들을 방문하고 “형제들이 어떠한가” 보자고 제안했다.(사도행전 15:36) 그러나 바나바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제안하자,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마가라 하는 요한은 바나바의 사촌(또는 생질)으로, 첫 번째 선교 여행 때 바울 및 바나바와 동반했으나 일찌감치 그들을 떠나버린 일이 있었다.(사도행전 13:13 참조) 마가라 하는 요한이 왜 떠났는지, 또는 그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분명히 바울은 그에 관해 여전히 우려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섰고, 바울은 새로운 선교 동반자로 실라를 선택했으며,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선택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골로새서 4장 10절에서 입증하듯이, 바울과 마가라 하는 요한은 나중에 화해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으며(사도행전 15:39 참조), 바울과 실라는 본토에 있는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사도행전 15:40. 실라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실라는 바울의 몇몇 서한에서 “실루아노”로 언급된 사람이었을 것이다.(고린도후서 1:19; 데살로니가전서 1:1; 데살로니가후서 1:1 참조) 실라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유명했으며, 바울은 두 번째 선교 여행의 동반자로 그를 택하였다. 실라는 서기로서 베드로전서를 썼던 것이 분명하다.(베드로전서 5: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