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25장: 요한복음 11~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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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3장

요한복음 11~13장 소개 및 연대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가운데 거의 절반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마지막 주에 할애했다. 이 마지막 주가 시작되기 직전에, 구주께서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이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니신 권능과 사랑을 역설하는 사건이었다.(요한복음 11:1~46 참조) 예수께서 나사로를 기적적으로 살리시자, 그분에 대한 살해 음모가 한층 더 극렬해졌다. 예수께서는 한동안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서 머무셨고, 그런 다음에는 베다니로 다시 돌아가셨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진실한 헌신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요한복음 12:1~3 참조), 가룟 유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고자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런 후 구주께서는 자신의 제자인 그들의 삶은 사랑을 특징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요한복음 13:1~17, 34~35 참조) 지상 성역 마지막 주 동안 소요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과 봉사, 사랑에 관한 가르침에 집중하셨다. 그런 속성은 그분의 삶을 규정하며, 또한 시대를 막론하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 역시 그러한 속성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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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과 연대표

요한복음 11~13장 주해

요한복음 11장.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 기적

요한복음 11장에는 구주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요한 기적은 요한복음에 강조된 일곱 가지 기적 중 하나이다. 요한은 이런 기적들과 함께 구주의 가르침을 기록했으며, 기적들은 그런 가르침의 실례로 볼 수 있다. 다음 도표에는 그 일곱 가지 기적과 구주께서 나타내 보이신 물리적 권능 및 영적 권능, 그리고 그 기적들과 관련된 주요 교리와 원리가 실려 있다. 이런 기적 및 관련 가르침은 구주의 신성과 만물의 창조주, 여호와라는 신분 등과 같이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들을 반영한다.

기적

나타내 보인 권능

관련된 가르침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요한복음 2:1~11)

창조하는 권능, 또는 무언가를 다른 상태로 변화시키는 권능

이 “첫 기적”은 구주께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의 우물가 여인에게 주신 가르침의 도입으로 간주할 수 있다.(요한복음 3~4장 참조) 두 사람 모두 영적 상태의 변화를 경험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침(요한복음 4:46~54)

건강을 회복시키는 권능

병에 걸린 고관의 아들을 건강하게 회복시킨 이 “두 번째” 기적은 요한복음 3~4장에 기록된 구주의 가르침에 대한 결론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결과적으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모두 영적으로 치유되었다.

베데스다 못에서 병자를 고침(요한복음 5:1~15)

육체적 및 영적으로 모두 치유할 수 있는 권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에게 부활을 가져다주실 것이며, 그때가 되면 모든 육체적 문제는 치유될 것이다. 또한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최후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요한복음 5:21~29 참조)

오천 명을 먹임(요한복음 6:1~14)

육체적 굶주림을 채워 주고자 창조하는 권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떡 설교에서, 자신은 신성하며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요한복음 6:25~59 참조) 예수께서는 육체적 굶주림을 채워 주셨듯이, 영적 굶주림도 채워 주실 수 있다.

물 위를 걸음(요한복음 6:16~21)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

구주께서는 자연계에 작용하는 온갖 힘을 극복하실 수 있으니, 우리는 그분이 육에 속한 사람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리라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분의 말씀이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그분과 동행할 수 있다.(요한복음 6:60~69 참조)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침(요한복음 9:1~7)

육체적 시력을 다스리는 권능

구주께서는 육체적 시력을 회복시키실 수 있듯이, 자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적 시력을 주실 수 있다.(요한복음 9:8~41 참조)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림(요한복음 11:1~45)

육체적 죽음을 다스리는 권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한복음 11:20~32 참조) 구주를 통해 온 인류는 다시 살게 되고 영생을 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11:1~46. 나사로를 살리심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적 중 하나였다. 이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구주께서는 두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셨다. 그중 한 명은 야이로의 딸이었고(누가복음 8:41~42, 49~56 참조), 다른 한 명은 나인 성에 사는 과부의 아들이었다.(누가복음 7:11~17 참조) 그러나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 두 기적과는 달랐으며,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의 친구 나사로’의 경우는 달랐다. … 두 가지 이유가 특별히 두드러진다. (1) 주님의 지상 성역의 절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을 때, 그분은 반박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이 메시야이며, 거룩한 아들이고, 실제로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증거하셨다. (2) 그분은 자신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 중 하나를 영원히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장을 마련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며, 불멸과 영생은 자신을 통해 얻게 되며, 당신의 말을 믿고 순종하는 이들은 결코 영적으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1965–73], 1:531)

요한복음 11:1~16, 21.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었다

나사로가 병이 나자, 그의 누이들인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다.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예루살렘과 매우 가까운 베다니에 살았다. 구주와 제자들은 베다니에서 적어도 40킬로미터 떨어진 베레아에 있었다. 구주의 제자들은 그분이 뜻하시는 바를 곧바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분은 그곳에서 이틀을 머물다가 병든 나사로에게로 가기로 하셨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었다고 말했다.(요한복음 11:4) 몇몇 제자들은 예수께 다시는 유대 지역으로 가지 말도록 권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것을 그들이 두려워하였음이니, 그들이 아직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함이더라.”(Joseph Smith Translation, John 11:16; 또한 요한복음 11:8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요한복음 11장 9~1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답을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곳에서 직면하게 될 죽음의 위협에도 유대 지역으로 가려고 하셨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열한 번째 시간을 살고 있지만,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그 정해진 시간 동안에는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하겠노라. 지금은 내 일을 하도록 주어진 때이니라. 반대가 잦아드는 밤까지 기다릴 수는 없노라.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밤까지 미루는 자는 어둠 속에서 실족하며 자기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라.’”(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531)

우리도 구주의 제자들처럼, 그분이 뜻하시는 바가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이 되리라는 것을 믿으며, 우리 삶에서 주님의 때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가 주님의 때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통찰을 나누었다.

“복음의 첫째 되는 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신뢰, 즉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그분이 행하시는 방법을 신뢰하고, 그분의 시간표를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시간표 대신 우리의 것을 강요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 장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신뢰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복지에 대해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믿을 수 있다면 그분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Even As I Am, 93] …

참으로 우리는 주님의 뜻과 주님의 타이밍을 믿는 완전한 신뢰 없이는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Timing”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Jan. 29, 2002], 2; speeches.byu.edu)

요한복음 11:7~16. 기꺼이 죽으려는 도마

유대 지역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구주께서 그곳으로 다시 가시려 하자,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죽음을 의미할지라도 그분과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요한복음 11:16 참조) 이 반응을 통해 우리는 도마가 원래 의심이나 겁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도마가 구주께 보인 충실함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20:24~29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1:17, 39. 나사로는 나흘 동안 무덤에 있었다

구주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야 그를 살리셨다.(요한복음 11:17, 39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나흘이라는 기간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시체는 제대로 부패되고 있었는데, 죽은 지가 오래되었기에 그 점은 절대적으로 확실했다. … 유대인들에게 나흘이란 말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 나흘째가 되면 영이 시체 근처에서 완전히 떠나 돌아오지 못한다는 믿음이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1965–73], 1:533)

요한복음 11:21~43. 나사로를 살리심—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닌 신성의 표시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94) 회장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였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였기에, 산헤드린에서는 예수님을 반드시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는 ‘많은 표적을 행’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요한복음 11:47 참조) 그러나 애석하게도, 요한은 또한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백성들이]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요한복음 12:37)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예수께서 악한 영을 내쫓을 수 없었다거나, 물 위를 걷거나 병자를 고치거나 기적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거나 폭풍을 잠잠하게 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시지 않았다는 이단적인 생각을 퍼뜨리는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주장이 공상적이거나 각 기적은 자연법칙에 따라 해명된다며 여러분을 설득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의 기적들에 대해 심리학적인 해설을 내놓기까지 합니다. …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예수께서 베푸신 성역 전부는 그분의 신성을 증거하는 표시였습니다. 구주께서는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셨고, 하나님으로서 행하셨고, 하나님이신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은 그분의 신성을 증거합니다.”(“Five Marks of the Divinity of Jesus Christ,” Ensign, Dec. 2001,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실 것을 아셨음에도 이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신 일은, 그분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모든 이를 가엾게 여기신다는 점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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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제임스 티솟

요한복음 11:21~27, 32.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

마르다는 자신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부활 때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안다고 간증했다. 이 간증에는 구주에 대한 그녀의 지식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 11:27) 마리아 또한 다음과 같은 말로 주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한복음 11:32) 이 두 자매는 구주를 믿는 큰 신앙이 있었다. 마르다가 지닌 신앙에 대해 더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10:40~42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구주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요한복음 11:25) 확인시켜 주신 말씀은 마르다의 신앙을 강화해 주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이 말씀을 사용하여, 부활에 대한 간증을 통해 오는 위안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죽음은 종종 침입자처럼 옵니다. 인생의 향연이 한창 벌어지는 중에 나타나 그 빛과 즐거움을 순식간에 꺼 버립니다. 죽음은 그 무거운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덮어 버림으로써 때때로 우리를 당혹하고 의아하게 만듭니다. 극심한 고통이나 질병에 시달릴 때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이 자비의 천사처럼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죽음을 행복의 적으로 여깁니다.

언제나 사망의 어둠은 계시된 진리의 빛으로 몰아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

무덤 저편의 삶에 대한 이 확신, 참으로 거룩한 주님의 확증은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확신을 주실 때 약속하셨던 평안을 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지금이 바로 그때라”, 리아호나, 2002년 1월호,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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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나는 부활이요, 리즈 레먼 스윈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요한복음 11:33~4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의로운 간구를 들으신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런 친교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구주께서 느끼신 감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요한복음 11:35 참조) 우리 시대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는 사랑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그리하여 너는 죽는 자들을 잃음을 슬퍼할지니.”(교리와 성약 42:45) 나사로를 죽음에서 기적적으로 살리신 일을 통해, 우리는 힘들고 슬플 때 우리가 드리는 간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1:49~53. 가야바의 “예언”

나사로를 살리는 큰 기적을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 소식은 바리새인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에 그들은 공회를 열어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행사하는 권력과 영향력이 위협받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의로운 지도력을 행사하기보다는 사제술을 사용했다. 이로써 그들은 수세기 전에 야곱이 말한 예언을 성취했다. “사제술과 죄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은 그[예수 그리스도]를 대하여 자기들의 목을 뻣뻣하게 하리니, 이러므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리라.”(니파이후서 10:5; 또한 니파이후서 26:29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이 공회에서 대제사장 직분에 있는 불의한 지도자 가야바를 통해 당신 아들의 구속 사명을 선언하셨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야바는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는 일을 피하고자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의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대제사장의 추론은 온갖 철학과 믿음이 공존하는 유대인 국가가 소란스러운 상황들로 인하여 로마 당국으로부터 더 많은 제재를 받기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 나으니라’라는 것이었다.(니파이전서 4:13)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야바가 당신 아들의 신성을 확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들만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셨던, 거의 변함 없었던 관행에서 벗어나, 가야바에게 예언의 영을 보내시어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인도하셨다. ‘너희가 이 사람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는 무한하고 영원한 속죄를 하려고, 세상의 죄를 위해 제물로 바쳐지려고 왔느니라. 그는 우리와 우리 국가의 모든 백성을 위해, 우리와 우리 국가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온 인류를 위해 죽을 것이니라.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의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그는 모든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순종하는 이들을 하나의 우리 안으로 모을 것이니라. 구원은 그에 의해, 그 안에서, 그로 인해, 그를 통해서 오기 때문이니라.’”(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535) 가야바에 관한 내용을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6:57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1:53~57. 예수께서 에브라임으로 떠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신 후, 바리새인들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에브라임이라는 동네로 가셔서 그곳에서 마지막 유월절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러는 사이, 예수님을 처형하려는 음모는 점점 더 심화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을 아는 사람은 당국에 신고하여 체포할 수 있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요한복음 12:1~8. 마리아가 구속주께 경의를 표했다(또한 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 14: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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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발에 기름을 붓는 마리아

그리스도의 발에 기름을 붓는 마리아, 로버트 티 배렛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시기 전날 저녁에 베다니에서 저녁 식사를 하셨으며,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도 그곳에 있었다. 이때 마리아가 했던 행동은 구주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나타내 보인 것이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늘의 주님께서는 가장 큰 시련을 겪어야 하는 시간이 임박한 이때에 이곳 친구들의 집에 앉으셨으며, 그 곁에는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분이 곧 배반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낱 필멸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 한 사람이 영원하신 구주를 위해 어떤 사랑, 헌신, 숭배, 예배의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윗이 말한 일 이상을 할 수 있겠는가? 다윗은 선한 목자가 친히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부여하고 축복을 베푸실 때 하실 일에 대해 ‘주께서 …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라고 말했다. (시편 23:5)”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700)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300데나리온은 일 년치 평균 임금에 상당하는 금액이었음)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음으로써 그분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곧 자신의 영혼을 루시퍼에게 팔게 될 가룟 유다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도둑질을 숨기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이렇게 답하셨다. “그녀를 가만히 두어라. 그녀가 이때를 위해 이 향유를 간직해 왔으니, 나를 매장하는 표시로써 나에게 부으려고 했던 것이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John 12:7) 영적인 것에 민감한 마리아는 이때를 위해 준비해 왔었다.

요한복음 12:12~19. 승리의 입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일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1:1~11 주해, 마태복음 21:8 주해, 마태복음 21:9~11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2:20~26.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인 “헬라인 몇” 명이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빌립에게 다가와서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간청했다.(요한복음 12:21) 그 간청을 들으신 구주께서는 겟세마네와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겪을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셨기에, 그들에게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많은 열매를” 맺도록 죽어야만 하는 “한 알의 밀[씨앗]”이셨다.(요한복음 12:24) 그분을 섬기고 따름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릴”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생을 받을 것이다.(요한복음 12:25~26 참조) 구주께서 “누구든지” 자신을 따르면 복음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요한복음 12:26) 구원의 메시지가 결국에는 지상의 모든 나라로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의 전조가 되었다.(마태복음 28:19; 사도행전 1:8; 10:9~43 참조)

요한복음 12:25.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는(요한복음 12:25) 구주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14:26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2:27~34.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속죄를 앞두고 하신 이 말씀이 어떻게 구주의 순종심을 반영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리스도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짐이 내려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그분이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오랫동안 간직해 왔고, 지적으로 분명히 이해하셨던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일이 본 궤도에 오르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다음, 그분은 영적인 독백이든, 아니면 그 주위의 사람들을 가르치려 함이든 이렇게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한복음 12:27)” (“기꺼이 순종함”, 성도의 벗, 1985년 7월호, 78~79쪽)

요한복음 12:35~36, 46.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빛의 [자녀]”가 된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자, 구주께서는 다시금 자신을 “빛”이라고 선언하고 사람들에게 “빛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당신을 믿으라고 권면하셨다.(요한복음 12:35~36, 46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그 선언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누리는, 그분의 빛이 지닌, 보호하는 특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는 빛과 어둠의 세력 간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복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멸망당할 운명에 처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요한복음 12:46]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주님은 우리의 빛이며, 문자 그대로, 우리의 구원입니다.[시편 27:1] 제3니파이에서 어린이들을 둘러싸던 거룩한 불처럼[제3니파이 17:24 참조], 여러분이 합당하게 생활할 때 그분의 빛은 여러분과 대적의 암흑 사이에 보호벽을 형성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빛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 빛을 필요로 합니다.”(“어둠에서 나와 그의 놀라운 빛으로”,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78쪽)

요한복음 12:37~41. 이사야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을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한 예언을 성취했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사야는 유대인들이 눈이 멀고 마음이 굳어서(이사야 6:10 참조) 메시야를 멸시하고 거부할 것이라고 예언했다.(이사야 53:1~3 참조) 요한은 또한 이사야가 시현으로 구주의 영광을 보았다고 확인해 주었다.(요한복음 12:41; 이사야 6:1~5; 니파이후서 11:2~3 참조)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에 대한 이사야의 시현과 예언을 관련지음으로써, 자신의 복음서가 다루는 한 가지 중요한 주제, 즉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구약 시대의 여호와이며, 만군의 주이시라는 사실을 뒷받침했다.(요한복음 8:58 참조)

요한복음 12:42~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유대인들의 최고위 관리 중 일부는 구주를 믿었으나 자신들의 믿음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요한복음 12:43) 이 관리들에 대한 요한의 설명은 구약전서에 나오는 다음 경고를 상기시켜 준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언 29:25)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영생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것(“하나님의 영광”)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생각하는 것(“사람의 영광”)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면 위험하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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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사람의 영광을 사랑했던 바리새인들, 폴 만

“우리는 생활하는 중에 선택을 할 때마다, 우리의 결정이 영생을 얻는 목표에 미치게 될 궁극적인 영향을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

우리는 두려움, 즉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인기를 얻지 못하는 데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여론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동기가 영향을 받는다면 어리석고 불합리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의로운 선택을 함”, 성도의 벗, 1989년 1월호, 10, 12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는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는” 원리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다.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의 인생 행로를 결정하는 일에서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분을 굳건히 믿으며 힘써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Fear Not, I Am with Thee,” BYU–Hawaii commencement address, Dec. 15, 2012; byuh.edu)

요한복음 12:47~50.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심판받을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마지막 날에 그분의 백성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구주께서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라고 선언하셨을 때(요한복음 12:48), 그분은 자신의 말을 여호와의 말씀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이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밝히신 것이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자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하도록 명하신 것만을 말한다고 증언하시며(요한복음 12:49~50 참조),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실하게 밝히셨다.(요한복음 1:1)

요한복음 13:1~17. 구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요한복음에 마지막 만찬과 관련된 사건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식사가 끝날 즈음에 구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과 제자들에게 주신 설교에 집중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구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제자들에 대한 “무한한 헌신”을 보이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후의 만찬]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조용히 일어나 … 마치 노예나 하인처럼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사도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3:3~17 참조) 이제 막 세워진 이 왕국에 속한, 이 빙 둘러앉은 소수의 믿음 있는 자들이 곧 혹심한 시련을 겪을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한 번 더 제자들에게 봉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자신의 커 가는 고통을 제쳐 두셨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발을 씻어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없이 겸손하게 계속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깨끗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그들을 지지하는 종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그곳에 있어 모든 기이한 일을 지켜본 요한이 기록한 바와 같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

전에도 그래 왔듯이 그 사랑은 어두운 밤과 고난 속에서도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의 힘이 되실 것이며 자신의 영혼의 어떤 고통도 제자들을 떠받치는 역할에 방해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성도의 벗, 1990년 1월호, 31쪽)

요한복음 13:4~12. 발 씻김은 하나의 복음 의식이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제자들의 발 씻김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통찰을 더한다. “이제 이는 유대인의 율법 아래 그들의 관습이니 그런즉 예수께서 율법을 이루시려고 이를 행하셨더라.”(조셉 스미스 역, 요한복음 13:10[경전 안내서])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구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모세 율법을 성취하고 하나의 복음 의식을 행하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발 씻김은 하나의 복음 의식으로, 성스럽고 신성한 의식이며, 성전 내 성소의 내밀한 곳에서 성도들이 행하던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세상에 드러나는 방식으로나 세상 사람들을 위해 행해지지 않는다. 예수님 시대, 즉 그분의 경륜의 시대에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다락방에서 이 의식을 제정하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의식을 행하시며 두 가지 일을 하신 것이다. 1. 모세에게 주어졌던 고대의 율법을 성취하셨다. 2. 그분의 참된 제자들 가운데 합당한 집행자가 앞으로 수행해 나가야 할 한 거룩한 의식을 제정하셨다.

만유의 회복의 일부로서 때가 찬 경륜의 시대에 발 씻김의 의식은 회복되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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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사도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델 파슨

1832년 12월 27일,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계시를 받았다. “너희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하도다, 너희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내 앞에서 너희 손과 너희 발을 깨끗이 하여 내가 너희를 깨끗하게 할 수 있게 하[라.]”(교리와 성약 88:74) 그 계시에서 주님은 선지자 조셉에게 선지자 학교를 조직하라고 명하시며, 그 학교에 참석하는 이들은 “발 씻김의 의식으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교리와 성약 88:139) 맥콩키 장로는 더 나아가 이렇게 설명했다.

“[선지자 학교]의 경우에 [발 씻김] 의식은 교회의 회장이 집행해야 한다. 이 계시에 따라 선지자 조셉은 1833년 1월 23일에 선지자 학교에 참석하는 이들의 발을 씻겨 주었다.[History of the Church, 1:323 참조] …

1836년 3월 29일과 30일에 [새로 헌납된 커틀랜드 성전에서] 제일회장단, 십이사도 평의회, 감독단, 여러 정원회 회장들을 포함하는 지도자들이 발 씻김 의식에 참여했다.[History of the Church, 2:430–31 참조] …

발 씻김과 관련된 지식은 이 시대에 단계적으로 계시되어, 이제 이 의식이 주님의 집에서 행하도록 계시된 의식들에 속하게 되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709–10)

요한복음 13:6~10. 베드로가 구주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는 것에 반대하다 찬성하다

신약 시대에 사람들은 발가락 부분이 트인 샌들을 신었고, 대개 짐승들의 오물이 쌓여 있는 흙길을 걸었으며, 목욕물을 접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발은 몹시 더러웠고, 남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처음에 구주께서 자신의 발을 씻어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반대한 것은, 이런 환대를 하는 관습이 보통 가장 신분이 낮은 종이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참고하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구주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는 것이 자신과의 친교에서 극히 중요한 일임을 설명하시자, 베드로는 더 완전하게 씻겨 주실 것을 요청했다. 이에 구주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셨다. 베드로의 요청은 자신이 주님에 대해 품었던 존경심과 더불어 그분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진실한 소망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13:13~15.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분의 모범을 따르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1873~1970) 회장은 구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식에서 위대한 봉사의 모범을 발견했다. 그는 교회 회장으로 지지받은 1951년 4월 연차 대회에서 교회 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구주께서는 사도들을 두고 막 떠나려는 시점에서 위대한 봉사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친히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요한복음 13:3~17 참조] …

그리스도를 따르는 위대한 종들에게 보여 주신 이 일은 얼마나 훌륭한 봉사의 모범이 됩니까! 너희 중에 큰 자는 작은 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회원들에게 더 훌륭하게 봉사하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발전시키는 데 우리의 삶을 바쳐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51, 158–59)

요한복음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구주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봉사의 모범을 보이신 후, 그들의 행복은 타인을 위한 봉사에 달려 있다고 가르치셨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그 진리를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면 우리 자신보다 타인에게 중점을 두고 행복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험 없이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봉사는 의무와도 같으며, 그 의무를 이행할 때 진정한 기쁨이 옵니다.”(“Guideposts for Life’s Journey”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Nov. 13, 2007], 4; speeches.byu.edu)

요한복음 13:18~30. 가룟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다

유다가 구주를 배반한 것은 시편 41편 9절을 정확하게 성취한 일이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한때 주님 및 성도들과 친교를 맺었던 이들도 진리의 적이 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다는 꾸짖음을 받은 후에 사탄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바로 주님을 그분 원수들의 손에 넘겼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복음에 순종하면 좀 더 뛰어난 예지를 받게 되지만, 죄를 지을 경우 배도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정죄받게 되며 결국은 불에 타게 됩니다. 그들 안에 있던 빛이 일단 그들을 떠나면, 이전에 빛이 났던 만큼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힘을 진리에 대항하는 데 사용한다면, 유다처럼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자들까지도 멸망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320~321쪽; 또한 앨마서 24:30 참조)

요한복음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신약 시대에 공식적인 식사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식탁 둘레에 놓인 높이가 낮은, 긴 의자에 왼쪽 팔로 비스듬히 기대어 머리는 식탁 쪽으로 향하고 발끝은 식탁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여 앉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까닭에 주인의 오른쪽에 앉은 손님은 주인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이런 상황이 사도 요한이 앉은 자리에서 연출된 듯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즉 예수님 쪽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누가복음 16:22 비교) 이 위치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식사를 하면서 아무에게도 안 들리게 구주와 사적인 대화를 했을 것이며, 유다의 배반에 관한 대화도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요한복음 13:23~28 참조)

요한복음 13:26~27. 한 “조각”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13장 26절에 묘사된 “조각”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그릇에 담긴 고기와 국물을 떠 담는 데 사용하는 작은 빵 조각이었다. 주인이 한 조각을 적셔서 만찬 손님에게 주는 것은 친절과 존경의 행위였기 때문에, 구주께서는 그 행위를 함으로써 유다에게 우애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에게 배반 계획을 단념하도록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 것일 수도 있다. 구주께서는 한 조각을 유다에게 주셨고, 그런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요한복음 13:27) 주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3:27) 이는 유다가 어떤 일을 행하기로 결심했는지, 그리고 그가 내린 최종 결정에 따라 행동할 시간이 왔음을 그분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13:34~35.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특징은 사랑이다

구주께서는 유다를 떠나게 하신 후, 요한복음 13장 31절~16장 33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나머지 사도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는 장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가르침 중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었다.(요한복음 13:34~35 참조) 이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에도 나온다. 그러나 구약전서에서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반면, 여기에서 구주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교회 회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으로 가장 정확하게 규정하는 특성은 무엇입니까?”

워스린 장로는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특징인 사랑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나누었다.

“사랑은 제자가 걷는 길의 시작이며, 과정이며, 끝입니다. 그것은 위로하고, 권고하고, 치료하고, 격려하는 일입니다. 음침한 골짜기와 죽음의 휘장 속에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결국 사랑은 우리를 영생의 영광과 장엄함으로 인도합니다. …

형제 자매 여러분, 좀 더 화합하고, 좀 더 영성을 키우며,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여러분의 성스러운 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핵심적인 목적입니다. 자애, 즉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성취하는 그 밖의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애가 있으면, 그 밖의 모든 것들은 활기차게 되고 생기 있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도록 영감을 주고 가르칠 때, 순종은 봉사와 자기 희생의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안에서 밖으로 표출됩니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라는 새 계명을 주셨을 때, 이생에서의 행복과 다음 생에서의 영광에 대한 원대한 열쇠를 주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다른 모든 계명들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의 목표입니다.”(“큰 계명”, 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28~30쪽)

요한복음 13:38. 베드로가 부인하리라는 예언

베드로의 부인에 관하여 좀 더 알아보고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22:32 주해요한복음 18:15~18, 25~27 주해를 참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