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40장: 고린도전서 15~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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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6장

고린도전서 15~16장 소개 및 연대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린도전서 15:12 참조)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여러 증인 중 한 사람으로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부 회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온 인류의 부활이 사실임을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가르쳤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이 서한들은 사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쓰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바울이 구주의 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사건들과 부활에 관해 언급한 기록들은(고린도전서 11:23~26; 15:3~8에 나옴) 아마도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신약전서상의 최초의 기사일 것이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를 위해 침례를 행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5:29, 55~57 참조) 바울은 또한 세 가지 영광의 왕국이 있다고 가르치면서, 이를 각각 해와 달과 별들에 비유했다.(고린도전서 15:40~41 참조) 바울은 이 서한을 마무리하면서, 고린도 회원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낼 연보[기부금]를 후하게 모금해 달라고 권유했다.(고린도전서 16:1 참조) 또한 그는 영적으로 비틀거리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믿음에 굳게 서”라고 권고했다.(고린도전서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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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과 연대표

고린도전서 15~16장 주해

고린도전서 15:1~11. “내가 받은 것을 …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 이후, 그리고 사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예수께서 지상 성역 동안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하고 논했다. 이렇게 나눈 이야기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런 이야기들을 다시 들려주는 일이 자주 생기다가 결국은 그것이 기록되고 보존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내가 받은 것을 …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고 썼을 때 그러한 내용을 언급했을 것이며, 이 말에는 자신이 얻은 복음 지식을 전달하고 간직하려는 그의 노력이 엿보인다.(고린도전서 15:3, 11; 또한 사도행전 20:35; 고린도전서 11:23 참조)

바울이 받아서 간략하게 요약하여 전달한 것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매장되셨으며, 그로부터 3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분을 목격했다는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린도전서 15:3~8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이 가르침이 복음의 핵심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인했다. “우리 종교의 기본적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간증, 즉 그분은 돌아가셨고, 매장되셨으며, 삼 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종교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그것에 부속되어 있을 뿐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49쪽)

고린도전서 15:3~4. 예수께서는 “성경대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

바울이 성경의 어느 부분을 염두에 두고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고린도전서 15:3), 다른 곳에서 그는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가르쳤고(갈라디아서 3:13 주해 참조), 이사야 25장 8절호세아 13장 14절에 나오는 구절을 사용하여 부활에 대해 가르친 바가 있다.(고린도전서 15:54~55 참조) 예수께서 “성경대로” 3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다는 바울의 말은 호세아 6장 2절요나 1장 17절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마태복음 12:39~40 참조) 초기 성도들에게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으신 속죄의 사명에 대한 또 다른 예언으로 알려졌다.(마태복음 8:17; 마가복음 15:28; 사도행전 8:27~35; 베드로전서 2:21~25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전서의 예언을 더 보고자 한다면, 경전 안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망에 관한 예언”“그리스도의 예표 또는 상징들”을 참조한다. 신약전서에 인용된 구약전서의 성구들을 보려면,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 나오는 Bible Dictionary[성경 사전]에서 Quotations from the Old Testament in the New Testament를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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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 두루마리

토라 두루마리.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을 예언했다.

고린도전서 15:3~8, 12. 부활에 대한 여러 증인들

고린도전서 15장의 많은 부분은 고린도 사람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라고 말한 것에(고린도전서 15:12) 대해 바울이 전하는 응답이었다.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영의 불멸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육신의 부활은 거부했던 일반적인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바울은 이 거짓 가르침을 논박하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놀라운 숫자의 사람들을 언급했다.(고린도전서 15:5~8 참조; 또한 요한복음 20:29~31 주해에 나오는 도표 참조) 부활하신 구주께서 이부 형제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신 내용은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만 기록되어 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고대 및 현대 목격자의 간증이 지닌 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세상의 회의와 의심에 맞서 우리는 중요한 참고 자료, 의심할 바 없는 근거, 심지어 눈으로 본 목격자의 증언을 구합니다. 성경에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사도행전 7:56]

고린도인들에게 전한 바울의 감동적인 간증을 듣고 누가 설득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 보이셨나니.’ 또 바울이 말하길, ‘맨 나중에 …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3~5, 8]

이와 똑같은 간증이 우리의 경륜의 시대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시드니 리그돈과 함께 전한 간증에서도 담대하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에 대하여 드린 많은 간증 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에 대하여 드리는 간증은 이러하니, 곧 그는 살아 계시다는 것이니라.’ [교리와 성약 76:22]

이것은 확증하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위로하는 진리입니다. 슬픔으로 고개 숙인 사람들을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확신입니다.”(“내 구주 살아 계시다”,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23~24쪽)

고린도전서 15:12~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띠는 중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속죄의 절정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그것은 구주께서 사망과 죄를 극복하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는 고린도 사람들에 응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죄에 대한 용서도, 영생에 대한 희망도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부활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리적으로 자연의 재생을 알고 빈 무덤에 대한 간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무덤이 마지막 목적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교리는 기독교 종교에서 단 하나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교리입니다.”(“부활에 대한 사도의 증거”, 성도의 벗, 1986년 7월호, 16쪽)

바울은 또한 만일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가르쳤다.(고린도전서 15:19) 반면, 십이사도 정원회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의 다음 말씀처럼, 부활의 실재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더 큰 기쁨과 시각과 목적을 얻게 된다.

“우리의 영원한 여정을 다스리는 ‘구속의 계획’에서 (앨마서 12:25) 부활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이해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가르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린도전서 15:13~14) 우리는 또한 사도 베드로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충만하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기록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베드로전서 1:3;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참조)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산 소망’은 죽음이 우리 존재의 끝이 아니라 필멸에서 불멸로 가는 운명적인 변이 과정에서 필요한 한 단계라고 확신합니다. 이 소망은 필멸의 생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변화시킵니다. 부활과 불멸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필멸의 생에 따르는 물리적인 난관을 바라보는 방법, 우리가 이 필멸의 생을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에 영향을 줍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은 우리에게 우리 개개인,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필멸의 생의 난관들, 곧 선천적, 후천적으로 얻게 되는 물리적, 정신적 또는 정서적 결함과 같은 것들을 견뎌 낼 수 있는 힘과 어떤 안목을 우리에게 제공하여 줍니다. 우리는 부활이 있기에 이러한 필멸의 생에 따르는 결함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필멸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부활”, 리아호나, 2000년 7월호, 18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부활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마가복음 16:1~7 주해마태복음 28:6 주해를 참조한다.

고린도전서 15:20, 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시다

모세 율법은 해마다 농작물 수확이 시작될 때 각 농부가 주님이 모든 축복의 근원임을 인정하여 첫 곡식 다발을 그분께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규정한다.(레위기 23:9~14; 신명기 26:1~11 참조) 바울은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출애굽기 23:19) 비유를 사용하여 부활하신 구주께서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5:20, 23; 또한 니파이후서 2:8~9 참조) 농부가 많은 농작물 가운데서 첫 수확물을 제일 먼저 수확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할 모든 존재 가운데 첫 번째가 되셨으며, 따라서 세상의 모든 거주민이 그분과 마찬가지로 죽음에서 부활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는 바울의 영광스러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구주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셨을 때, 그분은 누구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 살았던 모든 의인과 악인을 위해 사망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요한복음 5:28~29 참조]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무덤에서 일어났을 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그 은사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숭고한 행위로 그분은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자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 주셨습니다.”(“일요일은 올 것입니다”, 리아호나, 2006년 11월호, 29쪽)

고린도전서 15:21~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육체적 죽음을 겪는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을 통해 우리는 모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고린도전서 15:22; 요한복음 5:28~29; 니파이후서 9:21~22; 앨마서 11:42~44; 교리와 성약 29:26~27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부활이 지상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축복이라 설명하며 이렇게 가르쳤다. “이미 성취된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누구에게나 부활이 주어져 언제, 어떻게 무덤에 왔는가 하는 것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맑은 밤이면 무한히 오랜 수명을 가진 별들을 보지만, 그것들은 불멸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우리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사랑의 팔에 안겨”, 리아호나,2002년 11월호, 16쪽)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부활의 보편성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낸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이 지상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은 누구나 부활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 공의의 문제입니다. 사망에 대하여는 아담에게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지 않으십니다. 공의는 사망에 대하여 책임이 없는 자에게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같이 말하였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구원의 교리, 브루스 알 맥콩키 편, 제2권, 242~243쪽)

보편적인 부활에 관해 더 알고자 한다면, 마태복음 27:52~53 주해를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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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반 그림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초기의 기독교 침례반 그림으로, 주후 240년 무렵 시리아의 두라에우로포스에 있던, 교회 모임이 열리는 개인 집에 세워졌던 것이다. 침례반 위로는 목자가 양 한마리를 어깨에 메고 목초지에 있는 양 떼에게로 가는 그림이 있었다. 침례반 아래에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작은 그림이 있었다. 이 그림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침례가 의미하는 바를 시사해 준다. 그들에게 침례는 선한 목자가 사람을 구조하여 교회라는 우리로 데려다주는 것을 상징했다. 이 그림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에 따른 결과를 극복하신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상기시킨다.(고린도전서 15:21~22, 45~49; 로마서 5:12~21 참조)

고린도전서 15:23. 부활에는 순서가 있다

바울은 부활이 확립된 질서 또는 순서를 따른다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5:23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부활이 일어나는 순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부활의 순서는 복음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결정된다. 가장 의로운 사람이 먼저 부활했으며, 가장 악한 사람들이 제일 마지막에 부활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로 부활하셨으며, 멸망의 자식들이 마지막에 부활할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39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로 부활하셨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직후에, 무덤에서 살아난 의로운 성도들도 있었다.(마태복음 27:52~53 참조) 부활은 재림 때에 계속 일어나서 다른 의로운 성도들이 살아나게 되는데, 그들은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고린도전서 15:23) 후일의 계시를 통해, 우리는 이 사람들이 해의 왕국을 상속받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교리와 성약 76:50~70; 88:97~98 참조) 그 후에는 달의 영광을 받을 사람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교리와 성약 76:71~79; 교리와 성약 88:99 참조) 그다음으로는 복천년이 끝날 때, 별의 왕국을 상속받을 이들이 부활한다.(교리와 성약 76:81~86; 88:100~101 참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전히 더러운” 자들이 살아남으로써 부활은 마무리될 것이다. 이들은 어떠한 영광의 등급도 받지 못하며 “자신이 받을 수 있었을 것을 누리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자신의 장소로 다시 돌아가 자신이 받기 원하는 것을 누리게” 될 “멸망의 자식들”이다.(교리와 성약 76:31~39, 43~44; 88:28~32, 35, 101~2)

고린도전서 15:29. 죽은 자를 위한 침례

구주께서 영의 세계를 방문하여 낙원과 영옥 사이의 심연에 다리를 놓기 전에는 죽은 자를 위한 침례가 집행되지 않았다. 대리 침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에야 비로소 행해졌다.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침례가 유일하게 언급되어 있는 성구는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이지만, 고대의 다른 성경 본문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죽은 자를 위한 침례를 시행했음을 입증한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은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를 위한 침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느냐.’ (고린도전서 15:29)

이것은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여러분은 죽은 자들을 위해 대리 침례를 행합니까? 역사는 이 의식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바울이 던진 질문을 보면 고린도에 있었던 교회의 지부에서 이 대리 의식을 행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좋은 질문을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러한 의식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9, 13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을 얻는 데 침례가 필수적인 것임을 가르치셨다.(요한복음 3:5 참조) 바울 역시 침례를 받았으며, 그는 이 중요한 의식을 통해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로마서 6:4; 또한 사도행전 9:18 참조)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자녀 중 수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지 못하거나 이 필수적인 침례 의식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바울이 죽은 자를 위한 침례를 언급했다는 것은 초기 교회 회원들이 죽은 자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음을 시사한다.(또한 요한복음 5:25, 28; 베드로전서 3:18~19; 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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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침례반

유타 오커마운틴 성전의 침례반

죽은 자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지식과 대리 침례 의식이 우리 시대에 회복되었다.(교리와 성약 124:29~33; 128:12~18, 22 참조)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사업의 중대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침례는 완전한 구원에 필수적이므로 영원한 견지에서 볼 때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이미 죽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이러한 기회를 받아야 합니다. …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심으로써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셨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선지자 엘리야의 오심에 관해 말하면서 이 개념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주님이] 와서 저주로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 4:6] 이 일은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사업을 통하여 대부분 성취됩니다.”(“거듭남”, 리아호나, 2001년 7월호, 70~71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는 죽은 자를 위한 침례에 관하여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유하고 약속했다.

“조상에 대해 연구하고 찾아서 [여러분의] 돌아가신 친족들을 위해 주님의 집에서 대리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교리와 성약 124:28~36 참조) 또한, 가족 역사를 조사하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이 권고에 신앙으로 응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조상에게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은 약속이 여러분의 마음에 뿌리내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혈통을 선언하는 축복사의 축복을 통해 여러분은 그 조상들에게 연결되고, 그 혈통은 여러분에게 더 큰 의미를 띠게 될 것입니다. 선조를 더 사랑하고 더 깊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구주에 대한 간증과 개종이 더욱 깊어지고 확고해질 것입니다. 또한 대적이 미치는 강한 영향력으로부터 보호받게 될 것임을 약속합니다. 이 성스러운 사업에 참여하고 이 사업을 사랑한다면 청소년 시기뿐 아니라 평생토록 보호될 것입니다.”(“자녀들의 마음은 돌이[켜질 것입니다]”, 리아호나, 2011년 11월호, 26~27쪽)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은 친족의 이름을 조사한 뒤, 그들을 위한 성전 사업을 행하는 데서 오는 축복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업을 하는 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우리의 조상들을 찾기 위해 가족 역사 탐구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산 자에게 주어진 것과 똑같은 기회를 그들에게도 주기 위해 성전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 회원들이 성전을 방문하는 데 거리상의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 역사 탐구를 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 성전 의식 사업이 이루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어떤 회원들은 성전 사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들 자신의 가족 계보에 대한 가족 역사 탐구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성스러운 의식을 받지만, 후기 선지자들의 성스러운 권고와는 달리 그들 자신의 돌아가신 친족을 찾지 않음으로써 축복을 잃고 있습니다. …

저는 가족 역사를 탐구한 다음, 자신이 이름을 찾은 사람들을 위해 성전 의식을 받는 사람들은 양쪽의 축복을 모두 받는 기쁨이 더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을 배웠습니다.”(“성전 참여를 권고 받는 사람들”, 성도의 벗, 1995년 5월호, 5~6쪽; 또한 리차드 지 스코트, “죽은 자를 구속하는 기쁨”, 리아호나, 2012년 11월호,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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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묘지의 석관

이스라엘 베스쉐아림에서 나온 이와 같은 석관은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이다.

사진 촬영: 리처드 엘 더블유 클리브

고린도전서 15:35~38, 44. 부활체에 관한 질문과 답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사람들은 가족의 기일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자주 죽은 친족의 무덤을 방문했다. 그처럼 인간의 필멸성을 자주 상기하였기에, 고린도 성도들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부활체는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느꼈을 것이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라는 질문에 응하여 (고린도전서 15:35), 바울은 부활체가 영광과 질적인 면에서 필멸의 육신과 다름을 가르쳤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알맹이”를 심으면 종국에는 완전한 식물, 즉 “형체”를 거둔다는 점을 언급했다.(고린도전서 15:37~38) 그 심은 씨앗은 필멸의 육신을 상징하며, 그것이 죽어 묻히면 영화로운 불멸체로 부활하는 것이다. 구주께서는 이와 유사한 비유를 요한복음 12장 23~24절에서 가르치셨다. 바울은 이런 차이를 다른 식으로 강조하기 위해, 죽어서 묻히는 “육의 몸”과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영의 몸”을 언급했다.(고린도전서 15:42~44 참조)

부활에 대해 경전에 나오는 가장 명확한 정의를 보려면, 앨마서 11장 43~44절앨마서 40장 23절을 참조한다.

고린도전서 15:39~44. 부활체가 지니는 영광의 여러 등급

부활체의 특징에 관해 바울은 인간의 육체와 여러 종의 짐승의 육체 간에 차이가 있듯이, “해의 영광”의 육체와 “달의 영광”의 육체 간에도 차이가 있음을 언급했다. 그는 또한 해와 달과 별들이 영광 면에서 다르듯이, 하늘의 육체와 지상의 육체도 영광과 광채 면에서 다르다고 설명했다.

1832년 2월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시드니 리그돈은 한 시현을 받았다. 이 시현에서 그들은 해의 영광을 받은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이 세 가지 영광의 등급을 각각 받은 사람들을 보았다.

“이들은 해의 영광의 몸을 가진 자들이요, 그들의 영광은 해의 영광과 같으니, 참으로 만유 가운데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이라. …

그리고 또, 우리는 달의 영광의 세계를 보았나니, 보라, 또 바라보라, 이들은 달의 영광에 속한 자들이라. 그 영광은 아버지의 충만하심을 받은 장자의 교회의 영광과는 다르니, 이는 마치 달의 영광이 … 해와 다르듯 다르더라. …

그리고 또, 우리는 별의 영광을 보았나니, 그 영광은 별들의 영광이 궁창에 있는 달의 영광과 다르듯 그 영광이 더 작은 것이니라.”(교리와 성약 76:50, 70~71, 81)

이 시현을 받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고린도전서 15장 40절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라는 영감을 받았다. “또한 해의 몸과 달의 몸과 별의 몸이 있느니라. 그러나 해의 영광이 따로 있고 달의 영광이 따로 있고 별의 영광이 따로 있느니라.”(조셉 스미스 역, 고린도전서 15:40[경전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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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달, 별들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은 부활체들 간에는 영광 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부활하면 여러 종류의 몸이 있게 됩니다. 부활한 몸은 전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받게 되는 몸은 내세에서 그가 받게 될 위치에 따라 결정됩니다. 해의 영광에 속한 몸, 달의 영광에 속한 몸, 별의 영광에 속한 몸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몸들은 현재 인간의 몸이 …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승영과 영원한 증식의 모든 권능을 지닌 해의 영광에 속한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몸은 … 구주가 그러듯이 태양처럼 빛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12~18 참조] 달의 왕국에 들어갈 자들은 달의 영광에 속한 몸을 갖게 되어 해같이 빛나지는 않지만 별의 영광을 받는 자들의 몸보다는 더 빛날 것입니다.”(구원의 교리, 제2권, 253~254쪽)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부활 때에 해의 영광을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한 더 많은 가르침을 보려면, 다음 성구들을 참조한다. 교리와 성약 76:50~70, 92~96; 88:22, 28~29.

고린도전서 15:42~44, 46, 50. “영의 몸”

바울은 죽어서 묻히는 “육의 몸”을, 부활 때 다시 살아나는 “영의 몸”과 대조했다.(고린도전서 15:44) 그는 “육의” 몸, 즉 필멸의 육신을 설명하기 위해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이란 말을 사용했고 “영의” 몸, 곧 부활체를 설명하기 위해 썩지 아니할 것, 영광, 강한 것이란 말을 사용했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은 바울이 “영의 몸”이라고 언급한 것은(고린도전서 15:44) 영이 아니라 부활체를 말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명확히 설명했다.

“죽을 때 영과 육이 분리됩니다. 부활로 영과 육이 다시 결합될 것이며, 육체는 살과 뼈로 되어 있지만 피 대신에 영으로 소생된 몸인 영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 후에 영으로 소생된 우리 육신은 불멸이 되어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바,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으며,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육의 몸은 살과 피이지만, 피 대신에 영으로 소생되면 그것은 왕국에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갈 것입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9, 137–38)

부활체에 관한 바울의 설명을 더 보려면, 빌립보서 3장 20~21절을 참조한다.

고린도전서 15:45, 49~53.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첫 사람”인 아담은(고린도전서 15:45; 교리와 성약 84:16) 육체를 첫 번째로 받았다. “마지막 아담” 또는 “둘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고린도전서 15:45, 47) 첫 번째로 부활함으로써 영화롭게 된 몸을 받으셨다.(요한복음 5:21; 교리와 성약 88:17 참조) 아담의 행위(타락)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속죄와 부활)는 둘 다 우리의 구원에 꼭 필요했다.(로마서 5:12~21 주해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아담과 이브 및 그들의 후손을 구속하기 위해 무한한 속죄가 요구되었습니다. 이 속죄는 우리의 육체가 부활하여 더는 질병이나 노쇠 또는 죽음을 겪지 않는, 피가 없는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51~53; 제3니파이 28:8 참조]”(“변화 속의 불변”, 성도의 벗, 1994년 1월호, 34쪽)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나오는 “혈과 육”은 노화되고 썩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육신을 말한다. 필멸의 육신은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다. 부활 때에 받는 불멸의 육신과 뼈는 영화롭게 될 것이며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3:54~57.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죽음과 죄를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사망의 쏘는 것이 사라지게 된다고 가르쳤다.(고린도전서 15:54~57 참조)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 우리는 회개하여 죄에 따른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있다. 제일회장단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언젠가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맞아 이 필멸의 세상을 건너 다음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생을 뒤돌아보며 더 잘할 수는 없었는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는지, 또는 시간을 더 현명하게 사용할 수는 없었는지 생각할 것입니다. …

내일 하게 될 심각한 후회 중 상당수는 오늘 구주를 따를 때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간증입니다. 죄를 지었거나 실수를 했거나, 과거에 내린 어떤 결정 때문에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귀중한 은사가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회개할 수는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우리가 흘리는 후회의 눈물을 씻어 주실 수 있으며[요한계시록 7:17 참조] 죄의 짐을 내려놓도록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11:28~30 참조] 그분의 속죄는 우리가 과거를 뒤로하고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과[시편 24:4] 더 잘하겠다는 결의, 특히 더 나아지겠다는 다짐으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이생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지상에서 보내는 나날은 빠르게 사라지며, 때때로 죽음은 무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계속해서 살 것이며 언젠가 우리의 부활한 육신과 결합하여 불멸의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 모두는 다시, 그리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임을 엄숙히 간증합니다. 우리의 구주요 구속주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언젠가 우리는 ‘사망의 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삼키운 바 되었[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기뻐할 것입니다.[모사이야서 16:8; 또한 고린도전서 15:54 참조]”(“후회와 결심에 관하여”, 리아호나, 2012년 11월호,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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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앞의 가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을 위해 사망의 쏘는 것을 없애 주실 수 있으며, 그 점을 러셀 엠 넬슨 장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죽음이 올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충실한 자녀들을 위해 준비하신 해의 왕국의 영광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한편 … 뒤에 남아 슬퍼하는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쏘는 것이 온전한 희망의 밝은 빛을 품고, 하나님과 만인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그들에게 봉사하겠다는 깊은 소망을 지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함으로 나아갈 때 누그러집니다.[니파이후서 31:20 참조] 그러한 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면전으로 가서 영원한 동반자와 가족들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할 자격을 얻도록 해 줄 것입니다.”(“지금이 바로 준비할 시간입니다”, 리아호나, 2005년 5월호, 18쪽)

상실의 때에 평안을 찾는 법에 관하여 더 깊이 배우고자 한다면, 마태복음 28:8 주해를 참조한다.

고린도전서 16:1~3.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위한 현세적 도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일요일마다 모임을 할 때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로 보낼 연보[기부금]를 모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린도전서 16:1~3; 또한 사도행전 20:7 참조) 로마서 15장 25~28절을 보면, 고린도에 속해 있는 지역인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로부터 영적 힘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기쁘게 기부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기부를 요청함으로써,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 성도들을 돕고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도록 독려했다. 이는 바울이 교회의 유대인 회원들과 이방인 회원들 사이에 화합이 이루어지도록 계속해서 노력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이다.

고린도전서 16:21~24. 바울의 끝맺음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마무리하면서 관례적인 끝인사를 했는데, 이 부분은 서기 대신에 바울이 직접 썼다.(고린도전서 16:21 참조; 또한 골로새서 4:18; 데살로니가후서 3:17; 빌레몬서 1:19 참조) 여기에서 바울의 끝인사는 이례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관례적인 축복과 끝인사를 하기 전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표명했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16:22 참조) 아마도 바울의 경고와 저주는 교회에서 문제와 분열을 일으키는 고린도 성도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고린도전서 1:11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Anathema Maran-atha]”(고린도전서 16:22)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Anathema저주받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따라서 파문당한 사람의 경우처럼 하나님이나 그분의 권세로 추방된 사람 또는 사물은 저주를 받은[anathema] 것이다. (로마서 9:3) ‘나의 교회에서 끊어버림을 당한 자들에게 화 있도다. 이는 그러한 자들은 세상에 졌음이니라.’ (교리와 성약 50:8)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린도전서 16:22)라는 말은 아마도 ‘…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저주를 받게 하소서’를 의미할 것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를 의미하는 아람어 Maranatha는 초기 성도들이 약속된 재림을 서로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표어나 인사말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Mormon Doctrine,

2nd ed. [1966], 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