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4장: 마태복음 8~12장


4

마태복음 8~12장

마태복음 8~12장 소개 및 연대

마태복음 8~12장마태복음 4장 23절에서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 가르치시[고] … 전파하시며 … 모든 병[을] … 고치시니”라고(또한 마태복음 9:35 참조) 소개한 바와 같이, 갈릴리에서 계속된 구주의 성역을 다루고 있다. 마태는 구주께서 가르치고 전파하신 중요한 일부 내용을 5~7장에 실었고, 8~9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기록했다. 이러한 기적들에 관한 기록은 만물에 대한 구주의 권능과 권세를 보여 주고, 또한 독자들이 마태복음 10장, 즉 구주께서 사도들에게 비슷한 기적을 행하며 성역을 베풀 권능을 부여하신 기록을 읽기에 준비되게 해 준다. 구주의 권능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의 짐을 가볍게 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마태복음 11:28~30 참조)

이미지
4과 연대표

마태복음 8~12장 주해

마태복음 8:2~4. 나병

나병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마가복음 1:40~45 주해 및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Bible Dictionary, Leprosy“”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8:5. 가버나움

가버나움은 구주의 “본 동네”(마태복음 9:1)로 불린다. 가버나움은 고대 이집트와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유명한 로마의 도로 Via Maris(비아 마리스, 해안길이라는 뜻임-옮긴이)에 있는, 번영하던 소도시였다. 이곳은 선임 사도인 베드로와 그의 형제이자 십이사도 중 하나인 안드레의 고향이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힘 있는 설교를 전하셨다.(요한복음 6:24~65 참조) 기록된 기적 중에 가장 많은 기적이 가버나움에서 일어났다.

마태복음 8:5~13.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다

백부장의 하인에게 일어난 기적을 더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7:2~10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8:14~17.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구주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기록과 관련하여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께서 특별히 택하신 제자들은 아내와 자녀와 가족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시대를 막론하고 그분께서 특별히 부르시는 종들은 그러해야 한다.”(The Mortal Messiah: From Bethlehem to Calvary, 4 vols. [1979–81], 2:37)

마태복음 8:20; 9:6; 10:23; 11:19; 12:8, 32, 40.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이다

“인자”라는 호칭은 사복음서에서 구주께서 스스로를 칭하실 때 즐겨 사용하신 용어로서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칭하면서 이 호칭을 80회 이상 사용하셨다. 마태복음 12장 8절마가복음 8장 29~31절과 같은 성구는 이것이 메시야를 뜻하는 호칭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께서 왜 이 호칭을 사용하셨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첫째, 다니엘 7장 13절에는 “인자”가 오신다는 예언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예언을 성취할 자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이 호칭을 사용하셨을 수도 있다.(마가복음 14:61~62 비교)

둘째, 모세서 6장 57절7장 35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이 “거룩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 하였을 때, 이는 아버지와 그와의 신성한 관계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경전 안내서, “인자”)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것은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를 유일한 분이며 최고로 승영에 이른 분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과 아들 예수는 영과 육체가 있으며 아버지의 모든 영의 자녀 중 장자이며 육신을 입은 독생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며, 그는 현재나 과거나 ‘거룩한 사람’ 곧 영원하신 아버지인 엘로힘의 아들임을 나타낸다.”(예수 그리스도, 148쪽)

셋째,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특성을 드러내고자 의도하신 한 가지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도 한때는 우리와 같은 분이셨지만 지금은 승영하시어 저 하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 여러분이 오늘 그분을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분이 형상을 가진 인간처럼 보이며 여러분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2007], 40쪽)

마태복음 8:21~22.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9:59~60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8:23~27. 예수께서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다

예수께서 폭풍우 치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기록을 더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4:35~41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8:28~34. 악령 들린 자들을 고치시다

구주께서 악령 들린 자들을 고치신 일에 대해 알아보려면 마가복음 5:1~20 주해를 본다.

마태복음 9:1~8.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일종의 마비 때문에 침상에 누워 지내는 사람을 그의 친구 네 사람이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신앙에 감동을 받으셨지만, 그를 즉각적으로 고치시는 대신에 훨씬 더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누가복음 5:20)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말이 신성 모독에 해당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불평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실로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그 사람의 죄를 사하신 것이었다. 여러 경륜의 시대에 주님은 큰 신앙이 죄 사함을 가져올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야고보서 5:15 참조) 용서는 또한 구주에 대한 열렬한 간증을 전함으로써(교리와 성약 62:3; 84:61 참조),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자신을 바치는 것을 통해 올 수 있다.(교리와 성약 31:5; 60:7 참조)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마가복음 2:2~5 주해를 본다.

마태복음 9:9~13. 마태를 부르시다

이미지
마태라 하는 사람을 보시고

마태라 하는 사람을 보시고, 해리 앤더슨

세리(라틴어로는 publicani)라는 단어는 로마 정부를 위해 이스라엘에서 징세를 감독하는 사람들을 일컬으며, 이들 휘하에서 일하며 실제로 세금을 걷는 자들도 그에 포함된다. 세금을 징수하는 자들은 해마다 정부에 정해진 금액을 바쳐야 했으나 주민들에게 얼마를 걷을지 정하는 것은 그들의 재량이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 세리들은 가장 부패하고 유대인의 혐오를 받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세리가 된 유대인들은 종종 파문을 당했다.

주님의 초대 사도 중 하나인 마태(개종하기 전에 레위라고도 알려짐) 역시 세리였다. 마태복음 9장 9절은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강조한다. “나를 따르라”라는 단순한 권유에 응하여 마태는 “세관”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는 많은 동료 세리를 초대하여 잔치를 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들을 죄인들이라고 불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기회로 잡아 교만에 관한 강력한 가르침을 전하셨다.(누가복음 5:27~32 참조) 그곳에 있던 다른 많은 다른 세리들도 예수님을 따랐다.(마가복음 2:15 참조) 신약전서에 언급된 세리 중 많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아마도 그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겸손했을 것이 다.(마태복음 9:9~11; 10:2~3; 21:31~32; 누가복음 7:29; 18:13~14; 19:2, 8)

마태복음 9:14~17. 생베 조각과 새 부대

요한의 제자들이 구주께 와서 왜 그분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을 신랑 친구에 비유하여 대답하셨다. 혼인 잔치는 크게 기뻐하는 시간이며 구주께서 친구들과 함께 계시는 시간과 같다. 당시 금식은 주로 슬픔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따라서 구주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적절하지 않을 일이었다. 곧 그분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며, 그때가 바로 금식을 할 때였다.

이미지
포도주용 가죽 부대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 이스라엘 나사렛에서 찍은 사진

사진 촬영: 제임스 제프리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대”라고 부르신 것은 염소 가죽으로 만든 용기를 뜻한다. 그것은 주로 가죽 부대라고 불렸고,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리나 토기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죽 부대는 늘어나고, 균열이 생기고, 부서지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 새 포도주를 오래된 가죽 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생기는 가스 때문에 팽창하게 되고, 그러면 오래된 가죽 부대는 부풀어서 터져 버릴 수 있었다. 마태복음 9장 16절에 나오는 “생베 조각”은 줄어들지 않은 새 천을 뜻한다. 이 천 조각을 낡은 옷에 대면, 이것이 줄어들 때 상대적으로 튼튼하지 못한 주변의 낡은 천을 잡아당겨 자칫 찢어지게 만들 수 있으므로 생베 조각은 덧대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

생베 조각과 새 부대라는 두 비유 모두 옛것과 새것이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구주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보이신 반응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마태복음 9:14~15 참조), 구주께서는 자신이 주는 복음이 단지 유대교를 고치는 것이 아닌, 그 시대의 많은 종교적 문화적 관습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가르치려 하신 듯하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구주께서는 우리를 단지 더 나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고린도후서 5:17; 또한 갈라디아서 6:15; 모사이야서 27:26 참조) 만들기 위해 오셨다. 조셉 스미스 역에는 이렇게 덧붙여져 있다. “이는 새 것이 올 때에 낡은 것은 버려지게 됨이니라.”(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9:21[경전 안내서])

마태복음 9:18, 23~26. 관리의 딸을 고치시다

관리의 딸을 고치신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 마가복음 5:22~24, 35~42 주해를 본다.

마태복음 9:20~22. 혈루증 앓는 여자를 고치시다

구주께서 혈루증 앓는 여자를 고치신 일에 대해 알아보려면 마가복음 5:25~34 주해를 본다.

마태복음 9:37~38.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구주께서 갈릴리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가르치시자(마태복음 9:35) 무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다. 구주께서는 많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임을 아셨기에 “일꾼이 적[다]”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더 필요했다. 바로 다음 장에 기록된 대로 십이사도들은 부름을 받고, 권세를 받은 후, 세상으로 보내졌다.(마태복음 10:1 참조) 후에 구주께서는 복음을 전하도록 칠십 명을 더 보내셨다.(누가복음 10: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우리 시대의 교회에도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함을 가르쳤다. 그는 교회 회원들이 친구와 이웃에게 복음을 나누는 일에 적극 참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했다.

“수년 전에 충실한 개종자인 조지 맥로플린 형제님은 메인 주 파밍데일에서 회원 20여 명의 조그만 지부를 이끌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유 배달로 생계를 꾸려 가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금식과 진지한 기도를 통해 그는 자신과 지부 회원들이 그 지역에서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에 관해 영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커다란 신앙과 끊임없는 기도와 강력한 모범을 통해 회원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나누어야 하는지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이야기로, 이 경룬의 시대에 펼쳐진 위대한 선교사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일 년 내에, 그 지부에 450명의 개종자 침례가 나왔습니다. 그다음 해에 추가로 200명의 개종자가 생겨났습니다. …

불과 5년이 지난 후에, 메인 오거스타 스테이크가 조직되었습니다. 새로 조직된 그 스테이크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파밍데일 지부의 개종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시에 어떻게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하고 질문해 본다면, 아마도 교회를 강화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같은 절박한 필요성은 오늘날 교회의 모든 단위 조직에서도 그때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회원 선교 사업의 필수적 역할”, 리아호나, 2003년 5월호, 38~39쪽) 또한 누가복음 10:2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10:1~5. “예수께서 권능을 주시”고 보내시다(또한 누가복음 6:12~13; 마가복음 3:13~15 참조)

마태복음 10장에는 십이사도를 부르신 것과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라는 단어는 “보내심을 입은 이”를 뜻한다.(경전 안내서, “사도”) 이 호칭은 또한 “보내심을 입은” 사람이 선포할 메시지와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후기에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온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의 특별한 증인”이(교리와 성약 107:23) 되도록 보내심 받는다고 선언하셨다.

이미지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월터 레인

십이사도 정원회의 엘 톰 페리 장로는 현대의 사도들에게 신약 시대의 사도들과 똑같은 임무가 있음을 설명했다. “오늘날도 사도는 계속해서 ‘보내심을 입은 이’가 됩니다.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행할 때 당면하는 상황은 초기 사도들의 상황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세계 곳곳으로 여행하는 방법도 초기 사도들의 방법과는 매우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구주께서 그분이 직접 부르신 십이사도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라고 가르치실 때 주신 임무와 여전히 똑같습니다.”(“정원회란 무엇입니까?”,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24쪽)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후기의 사도들이 “주님의 신성에 간증을 갖고 있으며, 그분의 실재하심을 증거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사도가 하는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전진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교회에 속해 있거나 속해 있지 않거나,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은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약한 자에게 힘을, 좌절한 자에게 격려를, 친구가 없는 자에게 친구가 되어 주며, 빈곤한 자를 먹여 주며, 병든 자를 축복해 주며, 단순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확실한 지식으로 그들의 친구이며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합니다.”(“그리스도의 특별한 증인들”, 성도의 벗, 1984년 7월호, 77쪽)

마태복음 10:2~4. 십이사도

다음 표는 구주께서 부르신 초대 십이사도에 대한 간략한 개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이사도

이름

다른 이름

고향

기타

시몬

베드로, 게바, 시므온, 안드레의 형제

벳새다(요한복음 1:44 참조) 및 가버나움(마가복음 1:21, 29 참조)

안드레 및 세베대의 가족과 함께 어부였다. 구주의 사망 이후 선임 사도였으며, 멀리 로마까지 가서 선교 사업을 했다. 로마에서 주후 64~68년경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야고보 및 요한과 함께 조셉 스미스에게 멜기세덱 신권을 부여했다.

안드레

베드로의 형제

벳새다(요한복음 1:44 참조) 및 가버나움(마가복음 1:21, 29 참조)

베드로 및 세베대의 가족과 함께 어부였다. 베드로를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개했다. 스키타이(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스 및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X 모양의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이며, 그와 그의 형제 요한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었다.

벳새다로 추정

요한,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어부였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제일회장단의 일원이었다. 주후 44년에 헤롯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참수되었다.(사도행전 12:2 참조) 십이사도 중 첫 번째로 순교했다.

요한

“사랑받던 자”였으며, 그와 그의 형제 야고보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었다.

벳새다로 추정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어부였다. 베드로 및 야고보와 함께 제일회장단의 일원이었다. 소아시아, 특히 에베소의 여러 교회에서 일했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계시록을 썼다. 후에 변화되었다.(교리와 성약 7편 참조)

빌립

벳새다(요한복음 1:44; 12:21 참조)

오래 기다려 온 메시야의 소식을 나다나엘에게 전했다.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히에라폴리스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바돌로매

나다니엘 또는 나다나엘

가나(요한복음 21:2 참조)

아라비아 남부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가죽 벗김 처형 또는 십자가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태

레위, 알패오의 아들

가버나움

세리(마태복음 9:9 참조) 파르티아와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마

디두모

갈릴리로 추정

파르티아(현재의 이란)와 인도에서 선교 사업을 했고 기도하는 중에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야고보

작은 야고보, 작은 아들, 알패오의 아들

갈릴리로 추정

팔레스타인과 애굽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애굽에서 십자가형을 당했거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몬

가나나인, 셀롯(열심당원)

갈릴리로 추정

브리튼 섬과 애굽에서 복음을 가르쳤을 것이다.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유다

야고보의 아들, 다대오, 레베오

갈릴리로 추정

앗시리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룟 유다

가룟

그리욧(유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스스로 목을 맸다.

사도들의 선교 여행과 사망에 대한 추정은 다음을 참조했다. Richard Neitzel Holzapfel, Eric D. Huntsman, and Thomas A. Wayment, Jesus Christ and the World of the New Testament (2006), 303.

마태복음 10:5~6. 이방인에게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집으로 가라

이들 성구에 나타난 구주의 지시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전파하는 것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런 후에 이방인에게 해야 하는 일이었음을 보여 준다.(로마서 1:16; 또한 마태복음 15:24 참조) 부활하신 구주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모든 나라에, 즉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전하라고 명하셨다.(마태복음 28:19~20; 사도행전 1:8; 8:4~25 참조)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긴장 관계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4:20~24 주해를 본다.

마태복음 10:9~10. 전대나 배낭 없이

구주의 시대에 전대에는 돈을 넣어 다녔고, 큰 가방인 배낭에는 음식과 그 밖의 소지품을 넣었다. 구주께서는 사도들에게 음식, 의복, 묵을 곳, 또는 기타 현세적인 문제를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생계를 주님과 다른 사람들의 자비에 의탁해야 했다. 이는 여행자를 대접하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과도 상통한다. 후에, 누가복음 22장 35~36절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라는 이 계명을 철회하셨다. 이는 아마도 사도들이 이제 관습이 다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었기에, 또한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었기에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보인다.(요한복음 15:18~22 참조)

마태복음 10:14.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구주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전해 주었다. “유대인은 격식을 차려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 대해 남기는 증거로, 즉 절교와 앞으로 일어날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지 않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마태복음 10장 14절]에 인용된 바와 같이 사도들에게 주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비난과 증언을 하는 의식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이 마지막 경륜의 시대에 주님은 권세를 부여받은 당신의 종들에게 지시하여 합당한 권세로 진리를 전파할 때 고의로 악의를 갖고 이를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증거를 보이게 하셨다.”(예수 그리스도, 350쪽; 또한 교리와 성약 24:15; 75:18~22; 84:92~96 참조) 그러나 이 의식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므로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지시가 없이는 절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10:16. 뱀 같이 지혜롭고

구주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보내실 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고(마태복음 10:16) 말씀하셨다. 현대에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슷한 권고를 주셨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라. 그러나 죄는 범하지 말라.”(교리와 성약 111:11) 두 성구는 구주의 제자들이 지혜, 무죄함, 순수함을 겸비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친다.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주님의 지혜로운 종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로운 이 되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10:14; 마태복음 10:16과 비교)

마태복음 10:34~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또한 누가복음 14:26 참조)

이 성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메시지가 언제나 화평을 가져오는 것은 아님을 선언하셨다. 사실, 삶에서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결심은 가정에 불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84) 회장은 이 경전 구절에 대해 말하며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어려운 선택 중 하나는 하나님과 가족 사이에서 하는 선택일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시험의 하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과 여러분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 특히 가족을 기쁘게 하는 것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니파이의 선한 부친이 한때나마 주님에 대하여 불평했을 때 니파이도 그런 시험을 받았으나 그는 그것을 훌륭하게 처리하였습니다.(니파이전서 16:18~25 참조) 욥은 자신의 아내조차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을 때에도 주님께 충성을 바쳤습니다.(욥기 2:9~10 참조)

경전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애굽기 20:12; 또한 모사이야서 13:20 참조)라고 적혀 있습니다. 때로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를 육신의 아버지 이상으로 공경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큰 계명—주님을 사랑함”, 성도의 벗, 1988년 7월호, 5쪽)

마태복음 10:39.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또한 마태복음 16:25; 마가복음 8:35; 누가복음 9:24; 17:33 참조)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우리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이기심을 극복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뜻한다고 가르쳤다.

“우리 … 각자에게 비이기심은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시각에 올바른 사람이 되어 봉사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거의 매일 다른 사람을 위해 비이기적인 행동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한 행동에는 제한이 없으며, 친절한 말이나 도움의 손길이나 아름다운 미소처럼 단순할 수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9] 인생의 역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일에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는 태도로 접근하는 사람은 돈과 재산과 땅을 얻을 수는 있으나 결국은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다른 사람과 후하게 나누는 사람들이 누리는 성취와 행복을 잃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때 찾아오며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에 집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21~22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우리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속시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쳤다. “우리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단념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자신의 개체성을 상실한다고 오해하여 자신을 영원히 헌납하는 것을 주저합니다.(모사이야서 15:7 참조) 물론 우리가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 시간, 명성, 재산 등 이기적인 것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우리가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은 당연합니다.(누가복음 9:24 참조) 그분은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 낡은 자아를 버리라고 가르치실 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함께 하리로다”,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23쪽)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마가복음 8:34~38 주해마가복음 8:38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은 그를 선지자로서 받아들이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교리와 성약 1:38 참조)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을 선지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준 청녀의 사례를 전했다. 밸라드 장로는 힝클리 회장이 교회의 청소년들에게 외모에 대해 전한 권고를 언급했다. 그 권고 중에는 청녀들에게 귀걸이를 한 쌍만 하라고 권하는 말씀도 있었다.(“청소년들을 위한 선지자의 권고와 기도”, 리아호나, 2001년 4월호, 37쪽) 밸라드 장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선지자의 말씀이 있기 직전에 두 번째 귀를 뚫어 귀걸이를 하였던 열일곱살 된 자매를 알고 있습니다. 그 자매는 노변의 모임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 구멍에 달았던 귀걸이를 빼고는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힝클리 회장님이 우리가 귀걸이를 한 쌍만 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그렇게 해야죠.’

귀걸이 두 쌍을 다는 것이 이 청녀에게 영원한 결과를 갖고 올 수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그 자매의 의지는 영원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 자매가 지금 비교적 단순한 것에서 그분에게 순종한다면, 보다 심각한 상황에서 그분을 따르는 것은 얼마나 더 쉬운 일이 되겠습니까!”(“너희는 저의 말을 받아들이라”, 리아호나, 2001년 7월호, 80~81쪽)

마태복음 11:2~6.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의심했는가?

예수께서 갈릴리 지경에서 성역을 행하시는 동안, 헤롯의 명으로 수감된 침례 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들이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그들을 보내어 예수께 알아보게 했다. 이 사건이 요한의 확신이 부족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기회를 빌어 요한이 이룬 훌륭한 업적을 증거하시며 그가 흔들림 없고 진실하다고 강조하셨다.”(Bible Dictionary, “John the Baptist”)

로버트 제이 매튜스는 더 나아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께 하라고 했던 질문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교화하기 위해서였다.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며,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 관해서는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며, 눈으로 직접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성신에게서 오는 증거를 얻었다. … 가장 만족할 만한 답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그분이 누구신지 질문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그동안 간증해 왔던 진리를 제자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A Burning Light: The Life and Ministry of John the Baptist [1972], 92)

마태복음 11:11. “극히 작은 자”

“극히 작은 자”에 관하여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7:28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11:13~14. 침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의 위대함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침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길을 예비할 사람으로 예임되었으며, 이 사명은 조셉 스미스 역에서 분명히 밝히듯 구약전서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침노하는 자들이 힘을 갖지 못하는 때가 오리니,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하기를 그것이 요한까지라고 하였느니라.

그러하도다, 예언을 한 많은 이들이 이 시대를 예언하였도다.

그리고 너희가 받을진대, 참으로 그는 엘리야니, 와서 모든 것을 준비할 바로 그이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11:13–15)

다음 경전 구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길을 예비할 사람으로 예임된 침례 요한의 사명이 묘사되어 있다. 이사야 40:3; 말라기 3:1; 누가복음 1:76~77; 니파이전서 10:7~10; 교리와 성약 84:27~28.

마태복음 11:16~19. 장터의 아이들

마태복음 11장 16~19절에서 구주께서는 자신과 침례 요한을 거절한 사람들의 변덕과 불신을 설명하셨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성구들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설명했다. “너희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치졸하고, 성마르며, 불성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내가 어떤 예를 들어야 하겠느냐? 너희는 마치 놀이를 하는 변덕스러운 아이들 같으니라. 너희가 혼인 잔치 놀이를 하면 친구들이 춤 추기를 거부하고, 장례 행렬 놀이로 바꾸면 친구들이 슬피 울기를 거부하는도다. 이와 같이 너희는 종교에 대해 놀이를 할 뿐이라.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아이들처럼 너희는 요한을 거절하는 이유가 나실인의 엄격함 때문이고, 나를 거절하는 이유는 내가 다정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기 때문이도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263)

마태복음 11:28~30. “내게로 오라”

구주께서는 인생에서 얼마나 힘든 시련을 겪고 있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내게로 오라”라는 구주의 반복된 권유를 따르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면, … 신앙의 ‘분자’만을 갖고 오로지 믿는 간단한 이 방법은, 예전부터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첫걸음, 즉 구주의 영원한 복음의 첫째 되는 원리였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입니다.

둘째, 문제의 일부일지라도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고쳐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마도 회개는 기독교인의 어휘 가운데 가장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단어일 것입니다. … 우리는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 후 바꿀 수 없는 것은 너그럽게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불완전하더라도 구주의 속죄에 거침없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그분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그분의 존재를 받들기 위해 노력하며, 이는 그분의 이름을 받듦으로써 시작합니다. 그 이름은 복음의 구원 의식에서 성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어집니다. 이러한 것들은 침례로 시작되고, 성전 성약과 더불어 성찬을 취하는 것 등 부가적인 축복들과 징표로서 우리 생활 전반의 다른 많은 의식들과 함께 끝을 맺습니다. …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따르면, 그리스도께 이르는 빛나는 많은 길들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이러한 길에는 기도와 금식과 주님의 목적에 대한 명상, 경전을 상고하는 것,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 ‘약한 자를 [돕고], 처진 손을 일으켜 세우며, 연약한 무릎을 강건하게 하[는 것]’[교리와 성약 81:5] 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으뜸되는 것은 ‘언제까지나 시들지’ 않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모로나이 7:45]는 은사인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께로 인도되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아무리 약할지라도 그분에게 손을 내밀 때마다 그분께서는 간절하게 우리의 손을 붙드시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고쳐야 하는 부서진 것들”,리아호나, 2006년 5월호, 69~70쪽)

마태복음 11:28~30. “나의 멍에를 메고”

과거에 쓰이던 나무 멍에는 보통 그것을 메는 동물의 목에 맞도록 목수가 세심하게 다듬어서 만들었다. 그 용도가 동물 한 마리를 다른 한 마리와 연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멍에는 우리와 구주를 묶어 주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끌” 수 있도록 해 주는 성약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고대의 성서 시대에 멍에는 밭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도구였습니다. 이 멍에를 두 마리의 소에 함께 메어 주면 한 마리가 할 때 드는 힘이 두 마리에게 똑같이 배분되기 때문에 쟁기나 짐마차를 끄는 힘을 그만큼 줄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에 겹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짐이라도 두 사람이 함께 멍에를 메면 둘 다 똑같이 쉽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왜 삶의 짐을 혼자 짊어지려 하며 쉽사리 걸려 넘어질 세상적인 도움만으로 그 짐을 옮기려 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이 세상에서 거칠고 딱딱한 땅을 파내는 것과 같은 힘든 일과를 견뎌 낼 수 있게 돕고 짐을 나누어 가지며 힘을 공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이며, 한 하나님과 나란히 서게 됨으로써 받게 되는 권능과 평화입니다.

삶의 짐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해도 분명 모든 사람이 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개인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각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십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고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말미암는 세상의 죄 때문에 슬픔을 당하는 수도 있으나, 이유야 어떻든 삶의 역경을 모두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짐을 지고 멍에를 메어야 한다면, 내 것을 지고 메지 않겠느냐? 내가 약속하나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마태복음 11:28~30 참조)” (“내게로 오라”, 성도의 벗, 1991년 1월호, 20쪽)

이미지
멍에

구주께서는 자신의 멍에를 메는 이들에게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마태복음 11:29) 약속하셨다. 약속된 이 “쉼”은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이며(모사이야서 24:15 참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얻는 것이 될 수 있다.(교리와 성약 84:24; 히브리서 4:1~11 참조)

마태복음 12:1~13.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또한 마가복음 2:27~3:5; 누가복음 6:9 참조)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옳은” 일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2:23~3:7 주해, 마가복음 2:27~28 주해, 마가복음 3:4~6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12:22~30, 33. “나무[를] … 좋다 하든지 나무[를] …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악령의 힘을 빌어서 악령 들린 자를 고치시는 선행을 했다고 비난하며 당치도 않는 주장을 했다.(마태복음 12:22~24 참조) 구주께서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라고(마태복음 7:18)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라고(마태복음 12:33)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선행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그분을 악하다 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중립적인 입장도 취할 수 없었다.(마태복음 12:30 참조) 바리새인들은 구주의 간증과 선행에 직면하여 그분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따를 것인지 여부를 선택해야 했다.

기독교 작가인 시 에스 루이스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양단 간에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예수 그리스도]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미치광이, 또는 그보다 더 나쁜 무엇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어리석은 자로 치부하여 입을 다물게 하고 그분에게 침을 뱉으며 악마라 하여 죽이거나, 아니면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을 주님이시요 하나님이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한 인간으로서 위대한 교사라고 하며 선심을 쓰는 체하는 허튼 수작은 집어치웁시다. 그분은 그럴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으셨습니다.”(Mere Christianity [1952], 41)

바리새인들이 사용한 바알세불이란 단어는(마태복음 12:24 참조) 문자 그대로 “파리들의 제왕”을 뜻한다. 이는 악마들의 대장인 고대 페니키아의 신을 뜻한다. 경전에서 바알세불은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마태복음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마태복음 12장 30절에서 파생되는 진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상 복음에 관한 한 중립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태복음 12:30) …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왕국을 지지하고 수호하고 돕지 않는다면, 주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맥콩키 장로는 나아가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문제에서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가 어떻게 하기 원하실까를, 또 그분이 지상에서 지명받은 그분 왕국의 역원들을 통하여 어떤 권고를 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참된 후기 성도라면 그 누구도 주님께서 그분의 지상 왕국의 일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주신 계시에 반대 입장을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대상은 계속 전진합니다”, 성도의 벗, 1985년 1월호, 88쪽)

이미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바리새인들은 일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과 가르침에 반대했다.

마태복음 12:31~32, 43~45. “성령을 모독하는 것”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때로 “성신을 부인하는 것” 또는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어 쓰이기도 한다. 다른 성구들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수 있다.(히브리서 6:4~6; 교리와 성약 29:43~45; 76:30~37; 88:32 참조)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 모독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것인가? 바로 성신을 받고, 하늘이 자신에게 열리게 하고, 하나님을 알고 난 다음,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신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이제 더는 회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해를 보고도 해가 빛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며, 하늘이 그에게 열렸는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해야 하며, 구원의 계획이 참됨을 눈으로 보고도 그것을 부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적이 된다.”(History of the Church, 6:314)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은 이 죄를 범하는 자가 소수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신을 거스르는 죄는 엄청난 지식을 요하기 때문에 평범한 교회 회원들이 그러한 죄를 범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용서가 낳는 기적[1969], 123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교회 회원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전했다. “충분히 알고 난 이후에도 지옥의 길을 따르기로 한 소수 외에, 완전한 용서의 약속에서 제외될 습관, 중독, 반항, 범법이나 범죄는 없습니다.”(“용서의 밝은 아침”,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19쪽)

조셉 스미스 역에 따르면, 마태복음 12장 43~45절에 나온 구주의 말씀은 성신을 모독한 죄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이 이 죄를 범하면, 성신이 그 사람에게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에 서기관 중 몇 사람이 와서 말하되 선생님이여 기록되었으되 모든 죄가 용서받을 것이라 하였으나 당신은 누구든지 성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하시나이다. 그리고 그들이 물어 가로되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더라. 그런데 사람이 성신을 거슬러 말하니 더러운 귀신이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는 선한 영이 그를 홀로 두고 떠났기 때문이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12:37–38)

마태복음 12:39~40. 표적을 구함

바리새인들이 구주께 표적을 요구하자 그분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라고(마태복음 12:39) 대답하셨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구주께서 하신 이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표적을 구하는 자는 음란한 사람이다. 이 원리는 하늘의 기둥처럼 영원하고 변치 않으며 굳건하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을 볼 때 여러분은 그 사람이 음란한 사람이라 확신할 수 있다.”(History of the Church, 3:385) 또 다른 상황에서 조셉 스미스는 표적을 구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신앙은 표적을 봄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384쪽)

마태복음 12:41~42.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

고대 앗수르는 니느웨가 그 수도였는데 전쟁 포로들을 잔인하게 다룬 것으로 악명 높았다. 포로들은 종종 고문을 당하고, 참수되었으며, 가족들 앞에서 사지가 절단되고,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불에 서서히 구워지거나 앗수르로 강제 이주되거나 공개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니느웨의 주민들은 이스라엘 후손이 아니었음에도 회개하라는 요나의 외침에 응했다.(요나 3:1~9 참조) 이와 비슷하게, 남방 여왕(시바의 여왕) 또한 이스라엘인이 아니었으나 이스라엘 왕인 솔로몬을 크게 존경하였다.(열왕기상 10:1~13 참조)

구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을 꾸짖으시며 니느웨 사람들과 시바 여왕을 언급하셨다. 그분은 “요나보다 더 큰 이”였으며(마태복음 12:41) “솔로몬보다 더 큰 이”셨다.(마태복음 12:42) 그러나 이스라엘인으로서 마땅히 이를 더 잘 알았어야 할 유대인 지도자들은 부끄럽게도 모든 자보다 가장 큰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지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비슷한 꾸짖음에 대해서는 다음 성구들을 참조한다. 마태복음 8:10; 11:20~24; 누가복음 4:25~27)

마태복음 12:48~50.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그분의 영원한 가족이다

이 성구에서, 구주께서는 자신의 가족이 오는 것을 보시고는 이를 기회로 삼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당신의 영원한 가족에 속한다는 가르침을 전하셨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구주께서 하신 그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축복은 모든 사람에게 돈이나 값이 없이,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육신의 자녀로 태어날 수는 없으나, 모든 사람은 의로움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될 수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충만한 영광과 권능을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으로 상속할 수 있다.”(Mortal Messiah, 2:227)

이 경륜의 시대에 구주께서는 다시 한 번 이 원리를 가르치셨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영접하는 모든 자, 그들에게는 곧 내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리라.”(교리와 성약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