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50장: 야고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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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야고보서 소개

왜 야고보서를 공부하는가?

야고보서는 소년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의 진리를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구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들에게 잘 알려진 서한이다.(야고보서 1:5 참조) 사도 바울과는 달리 야고보는 복음 교리에 관하여 그다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표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본보기와 기독교적인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제공한다. 이 서한은 우리에게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 …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전한다.(야고보서 1:22) 이 서한에 나오는 권고 중 다수는 말에만 머무는 믿음보다 의로운 행동이 훨씬 더 중요함을 강조하는 짧은 설교와도 같다. 야고보는 참된 신앙은 “행함”으로 드러난다고 가르쳤다.(야고보서 2:14~26 참조) 이 서한은 여러분이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야고보서 1:12)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야고보서는 누가 기록했는가?

이 서한에는 이 기록의 저자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명시되어 있다.(야고보서 1:1) 기독교 전언에 따르면, 유다처럼 야고보도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중 한 명이었다. 즉,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부형제였다.(마태복음 13:55; 마가복음 6:3; 갈라디아서 1:19 참조) 마태복음 13장 5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 명단에서 야고보가 맨 처음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이부형제 중 맏이였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의 다른 이부형제들처럼 야고보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였던 것은 아니다.(요한복음 7:3~5 참조)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야고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특별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고린도전서 15:7 참조) 이후에 야고보는 사도가 되었으며, 초기 기독교 저자들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었다.(사도행전 12:17; 21:18; 갈라디아서 1:18~19; 2:9 참조)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평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사도행전 15:13 참조) 야고보가 예수님과 형제 관계라는 점을 볼 때, 교회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컸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라 주님의 이라고 소개하는 겸손함을 보였다.(야고보서 1:1 참조) 야고보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15:13~29 주해를 참조한다.

야고보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

이 서한이 언제 쓰였는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산헤드린의 돌팔매형 선고에 따라 주후 62년에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Josephus, Jewish Antiquities, trans. L. H. Feldman, Loeb Classical Library 456 [1965], 106–9 참조)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야고보가 주후 45년과 6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이 서한을 썼을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신약전서에서 가장 초기의 기록 중 하나일 것이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교회의 제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아마도 그 지역에서 이 서한을 썼을 것이다.

야고보서는 누구를 위해, 왜 기록되었는가?

야고보서는 신약전서에 포함된 일곱 개의 “일반 서신” 중 첫 번째이다. 나머지 서한은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이다. 이 서한들을 일반 서신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그 저자들이 단일 회중이나 지역보다는 폭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썼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이 서한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를 대상으로 썼다.(야고보서 1:1)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야고보서의 독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울은 그 시대의 성도들에게 서한을 썼지만, 그의 교리와 권고가 후기의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면 훨씬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 중 교회에 속한 이들을 대상으로 서한을 썼다. 말하자면, 아직 집합하지 않은 사람들, 아직 복음을 받지 않은 사람들, 아직 그리스도의 무리로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의 말이 절정의 시대에 교회에 가입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작은 성도 무리에게 닿을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은 일이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6–73], 3:243)

야고보서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때때로 야고보서는 구약의 잠언과 유사한 지혜 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다양한 주제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 서한은 몇 개의 설교를 합쳐서 만들어진 것 같다. 서한의 내용은 기독교인다운 생활의 원리에 대한 짧은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설명 중 다수는 믿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일에서 의로운 행위가 하는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마틴 루터 등 일부 사람들은 이 서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메시지는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복음 원리에 따라 생활해야 할 필요성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야고보의 말씀은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구주의 산상수훈과 매우 유사하다.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부형제였기에, 그의 기록에서 구주의 가르침과 유사한 것들을 찾고자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유사한 주제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박해를 견딤(야고보서 1:2~3, 12; 마태복음 5:10~12 참조), “온전”하게, 즉 영적으로 성숙하게 됨(야고보서 1:4; 2:22; 마태복음 5:48 참조), 하나님께 구함(야고보서 1:5; 마태복음 7:7~8 참조), 하나님의 뜻을 행함(야고보서 1:22; 마태복음 7:21~25 참조), 이웃을 사랑함(야고보서 2:8; 마태복음 5:43~44; 7:12 참조), 그 열매로 선과 악을 앎(야고보서 3:11~12; 마태복음 오전 7:16~20 참조),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됨(야고보서 3:18; 마태복음 5:9 참조), 맹세하지 않음(야고보서 5:12; 마태복음 5:34~37 참조).

개요

야고보서 1~2장야고보가 독자들에게 안부를 전하며, 서한에 담긴 주요 주제를 소개한다. 여기에는 고난을 견딤, 지혜를 구함, 자신의 신앙과 일치하는 생활을 함 등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또한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야고보는 “정결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죄를 범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야고보서 1:27 참조) 성도들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행위를 통해 신앙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야고보서 3~4장야고보가 함부로 내뱉는 말의 파괴적인 특성을 설명하고, 그것을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의 의로운 열매와 대조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고, 사탄에게 항거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고 경고했다.

야고보서 5장야고보가 지나친 부를 경고했다. 그는 성도들이 교회의 다른 회원들에 대해 지는 책임에 관해 짧게 조언을 하며 서한을 끝맺었다.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끈기 있게 견디며, 맹세를 삼가야 한다. 야고보는 아픈 사람들에게 장로들을 청하여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을 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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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고 있는 조셉 스미스

하나님께 구하라, 존 맥노튼. 조셉은 야고보서 1장 5절을 읽었던 때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경전의 어느 구절도, 이때 이 구절이 내 마음에 임한 것보다 더 힘차게 사람의 마음에 임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그 구절은 마치 큰 힘을 지니고 내 마음의 느낌 속으로 속속들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 나는 거듭거듭 이 구절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조셉 스미스—역사 1:12)

야고보서 소개 및 연대

야고보서는 실제로 복음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강조하며, 날마다 의로운 행동을 통해 신앙을 나타내 보이라고 권고한다. 예를 들어, 그는 억제되지 않은 말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야고보서 1:26; 3:2~10 참조) 또한,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 특히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정결[한] … 경건”[순수한 신앙심]의 정수라고 이야기했다.(야고보서 1:27) 야고보는 “세상과 벗”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가르쳤다.(야고보서 4:4)

야고보서는 소년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에게서 더 큰 지혜를 구하는 데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후기 성도들에게는 중요한 경전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야고보서 1:5; 조셉 스미스—역사 1:11~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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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과 연대표

야고보서 주해

야고보서 1:2~4. 고난 중에 기뻐함

이 서한의 실용적인 성격은 서두의 몇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야고보는 어려움을 통해 신앙의 시련을 겪을 때 인내가 생긴다고 기록했다.(야고보서 1:2~4 참조) 성결함과 영적 발전으로 이어지는 이런 인내는 영생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속성이다.(교리와 성약 54:10; 67:13; 101:4~5 참조) 조셉 스미스 역, 야고보서 1장 2절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문구가 “많은 고난”으로 변경되어 있다.(경전 안내서)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모든 회원들을 축복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야고보서 1:5) 이 단순하고도 영감 어린 구절은 소년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을 향해 하늘의 응답을 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조셉 스미스—역사 1:11~13 참조) 야고보서 1장 5절에서는 하늘이 봉해져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우리를 포함하여 신앙으로 구하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응답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또한 교리와 성약 6:11; 42:6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구절이 후기 성도들에게 띠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어떤 시대, 어떤 선지자가 기록한 그 어떤 문장도 이 하나의 구절만큼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력과 효력을 끼친 적은 없었다. 야고보가 성역 중에 행한 가장 위대한 일은 예수님에 대한 간증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것이 아니라 성신의 인도에 따라 이 말씀을 남긴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몇 마디 말은 현대에 하늘이 열리게 했다.

또한, 그뿐 아니라 계시된 진리를 찾는 모든 구도자는 탐구 과정의 어느 시점에는 조셉 스미스와 똑같은 입장에 서게 된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으로 이끄는 좁고 협착한 길에서 설 자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구하여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246–47)

야고보서 1:5~7. “믿음으로 구하”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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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여인

야고보는 하나님께 응답을 구할 때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또한 니파이전서 15:11; 모로나이서 10:4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는 “믿음으로 구하”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야고보서 1:6)

“믿음으로 구하는 필수 요건에 유의하십시오. 저는 그것이 단순히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행함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간구하고 행하는 두 가지 의무, 의사를 전달하고 행동하는 필수 요건을 말합니다.

… 조셉의 생각과 간구를 인도한 다음 질문에 유의하십시오. …

‘내가 주께 묻기 위해 갔던 목적은 모든 교파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를 알아 어디에 가입해야 할지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조셉 스미스—역사 1:10, 18)

조셉의 질문은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히 ‘어느 교회가 옳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어느 교회에 속할 것인가?’였습니다. 조셉은 믿음으로 구하기 위해 숲으로 갔으며 행동으로 옮길 결심을 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념하고 그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항상 의로운 행동으로 인도합니다. …

…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드린 바에 따라 행함으로써 ‘아멘’이라고 말한 후, 기도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인내합니다.

신앙으로 구하는 것은 정직, 노력, 결심 및 인내가 필요합니다.”(“믿음으로 구하고”,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94~95쪽)

야고보서 1:8. “두 마음을 품[은] … 자”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변덕스럽고, 애매한 입장을 취하며, 충성심이 흔들리는 것을 말한다. 야고보서에서 이 말은 주님에 대한 헌신이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열왕기상 18:21; 마태복음 6:24; 고린도전서 10:21 참조)

야고보서 1:12~16; 4:7.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들의 신앙을 시험하신다고 알려져 있지만(창세기 22:1; 교리와 성약 101:3~5; 아브라함서 3:25 참조), 그렇다고 그분을 유혹의 근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유혹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온다고 가르쳤다. 사탄은 악을 행하도록 우리를 유혹하여 의로움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려고 노력한다. “끌려”와 “미혹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사냥과 낚시를 할 때 사용하는 올가미와 미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야고보서 1:14)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물고기를 속여 낚을 때 가짜 미끼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를 유혹하고, 속이며, 사로잡으려고 노력하는 루시퍼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송어가 굶주렸다는 사실을 아는 낚시꾼처럼 루시퍼도 우리의 ‘굶주림’과 약점을 알고 가짜 미끼로 유혹합니다. 그 미끼를 물면 우리는 평화로이 흐르는 삶에서 무자비한 사탄의 영향력 안으로 낚이게 됩니다.”(“오 악한 자의 저 간교한 계획이여”,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108쪽)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 야고보서 1장 12절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유혹에 저항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야고보서 4:7 참조)

야고보서 1:17. “변함도 없으[신]” 하나님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변함도 없으시”다고 기록했다. 이와 유사하게 모로나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그에게는 변함도 없으시고, 변화하는 흔적도 없으[시다.]”(몰몬서 9:9; 또한 모로나이서 8:18; 교리와 성약 20:12 참조) 하나님의 권능은 변하지 않으며, 자녀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 변하지 않는 속성 덕분에 우리는 그분을 믿을 수 있다.

야고보서 1:19~20.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권고했다.(야고보서 1:19) 성내는 것[wrath]은 복수심에 불타는 격렬한 노여움을 말하며, 바울이 “육체의 일” 중 하나로 묘사한 특성(갈라디아서 5:19~20), 즉 타락된 상태의 육에 속한 사람의 특성 중 하나이다. 성을 내면 주님의 영이 풍성하게 임하지 못하며, 야고보가 가르쳤듯이 하나님의 의로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야고보서 1:20)

야고보서 1:21. “넘치는 악”

야고보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고 가르치면서(야고보서 1:20), “모든 … 넘치는 악을 내버리”라고 권면했다.(야고보서 1:21) 야고보가 사용한 “악”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kakias를 번역한 것이다. 이 그리스어는 일반적으로는 악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타인에 대한 증오나 신랄함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그러므로 “악의”가 아마도 실제 의미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넘치는”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신약전서의 다른 부분에도 많이 나오는 단어이다. 보통으로 이 단어는 “많음”으로 번역되며, 그렇기에 야고보가 실제로 의미한 것은 “많은 악의”였다.

야고보서 1:22~25.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 … 자가 되지 말라”

종종 인용되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 … 자가 되지 말라”라는 성구에서(야고보서 1:22),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복음 진리대로 행하기를 기대하신다.(마태복음 7:21~23; 모사이야서 4:10; 교리와 성약 78:7 참조) 야고보서는 주로 독자들이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며,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지식에 따라 행함으로써 높은 길을 따라야 합니다.”(“속지 마십시오”,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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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쳐 보이는 청녀

야고보서 1:23.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

야고보서 1장 23절에서 “거울”이란 단어는 유리처럼 광을 낸 금속면을 말한다.(고린도전서 13:9~13 주해 참조)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의롭게 행하는 데는 게으른, 즉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을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나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에 비유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다음과 같은 통찰을 더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 즉 개인적으로 주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선행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으려 하는 것은 실제의 구원을 얻지 않고 거울 속으로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흘끗 보는 것과 같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252)

야고보서 1:26. 혀를 재갈 물리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하는 말을 조심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하여 읽어 보려면, 야고보서 3:1~10 주해를 참조한다.

야곱서 1:27. 정결한 경건

야고보는 다른 사람들, 특히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은 “정결[한] … 경건”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가르쳤다.(야고보서 1:27) 고대에 과부와 고아는 가장 불우한 사회 구성원에 속했으며, 권리나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 매우 궁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도록 거듭해서 명하셨다.(출애굽기 22:22; 이사야 1:17; 사도행전 6:1; 교리와 성약 83:6 참조) 칠십인 회장단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얼 시 팅기 장로는 교회 회원들에게 주변에 있는 과부들을 돌보라며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과부라는 말은 경전에서 서른네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구절 중 스물세 구절에서 그 용어는 아버지가 없는 사람 및 과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과부와 아버지가 없는 사람, 다른 말로는 고아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갖고 계셨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께 더욱 온전히 의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

미망인의 가족과 친구 되시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봉사를 알고 계시며 여러분이 얼마나 잘 미망인을 돕느냐로 여러분의 업적을 평가할 것입니다. …

… 저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미망인의 복지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을 압니다. 우리 회원들은 가족, 와드, 이웃에 있는 미망인을 돌보고 도와주어야 합니다.”(“시온의 미망인들”,리아호나, 2000년 7월호, 75~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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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앉은 할머니와 함께하는 젊은 여성

“정결한 경건”을 얻으려면 과부와 노인을 돌보아야 한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 야고보서 1장 27절에는 이 성구의 끝부분이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 있다. “자기를 지켜 세상의 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서 2:1~10. “사람을 차별하여 대[함]”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야고보서 2:1) 개개인을 향해 편견이나 편애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는 조셉 스미스 역, 야고보서 2장 1절이 이렇게 나온다. “나의 형제들아, 너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영광의 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느니라.” 야고보는 그처럼 편견을 갖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특히 부유한 사람들을 두둔해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는 것을 비난했다.(야고보서 2:2~6 참조) 경전의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피부색, 사회적 지위, 성별, 국적(니파이후서 26:33 참조), 교육이나 경제적 지위(제3니파이 6:10~12, 15; 잠언 22:22 참조), 옷차림(야곱서 2:13 참조), 건강, 나이, 종교(앨마서 1:30 참조) 등에 근거한 차별을 금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더욱 닮아 가게 되는 것이다.(사도행전 10:34; 로마서 2:11; 교리와 성약 1:34~35)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상의 거주민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지만 여러 종파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인내심을 기르고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교리상의 차이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악의를 품거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하다는 태도가 생겨나서는 안 됩니다.”(“이 사업은 계속됩니다”,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5쪽)

야고보는 부유하건 가난하건 모든 사람을 자애롭게 대하도록 권고하기 위해,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이를 “최고의 법”이라고 소개했다.(야고보서 2:8) 이 가르침은 예수께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명하신 것과 닮아 있다.(마태복음 22:37, 39) “최고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편애를 삼간다.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들이 받는 하늘의 보상에 관하여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5:7 주해를 참조한다.

야고보서 2:14~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신앙을 사람의 행동, 즉 “행함”과는 별개로 언급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응했다.(야고보서 2:14~26 참조) 아마도 사도 바울이 전한 가르침이 교회 회원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면서 그 내용에 왜곡이 생겼던 것 같다.(사도행전 21:21; 베드로후서 3:15~16 참조) 바울이 강조한 것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오는 것이지 행위, 즉 모세 율법의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로마서 3:27~31 주해갈라디아서 2:15~16 주해 참조)

야고보는 행위라는 단어를 바울과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 그가 말한 행위란 믿음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표현인 의로운 행동을 뜻했다. “행함이 없[어도]” 신앙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야고보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야고보서 2:14) 이 문구에 대해 그리스어 원전에는 믿음이라는 단어 앞에 관사가 포함되어 있다. 즉, 야고보가 의미했던 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와 같은]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는 신앙에 구원할 권능이 없다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행동을 낳지 못하는 수동적인 믿음은 구원을 가져오는 참된 신앙이 아님을 가르쳤던 것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라고 말하면서(야고보서 2:18), 행하지 않고서는 신앙을 나타내 보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참된 신앙이란 의로운 행위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Lectures on Faith[신앙강좌]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신앙은 행동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든 땅에 있든 모든 지적인 존재 안에 있는 권능의 원리이기도 하다.”([1985], 3)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는 이 문장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우리의 영적인 능력과 힘을 증가시키는 의로운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이 행동과 권능의 원리라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따라 도덕적인 선택의지를 행사하고, 구주의 속죄가 지닌 구속하는 권능과 강화하는 권능을 우리 삶에 끌어들이며, 우리 내부에 있는 을 키워서 스스로 선택의지를 행사하는 자가 되도록 영감받습니다.(교리와 성약 58:28 참조)”(“믿음으로 구하고”, 95쪽)

야고보서 2:21~25.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

야고보와 바울 모두 구약의 선지자 아브라함을 신앙과 선행의 중요한 본보기로서 인용했다.(야고보서 2:21~25; 로마서 4장; 갈라디아서 3:6~19 참조)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기꺼이 이행하여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입증했다.(창세기 15:6; 22:1~14; 히브리서 11:17~19 참조)

아브라함처럼, 기생 라합도 행동을 통해 신앙을 나타내 보였다.(히브리서 11:31 참조) 라합은 이스라엘 군대가 여호수아의 지휘에 따라 약속의 땅으로 진군해 왔을 당시, 여리고 성의 주민이었다.(여호수아 2장 참조)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의 병력을 정탐하기 위해 두 사람을 그 성으로 보냈다. 왕이 정탐꾼들을 수색하는 상황에서도, 라합은 그들을 안으로 들였을 뿐만 아니라 숨겨 주기까지 했다. 그런 후, 그녀는 정탐꾼들이 무사히 성을 빠져나가도록 도와주었다. 그런 행위 덕분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여리고 성이 완전히 파멸되었을 때 그 불행을 면하고 여생을 이스라엘에서 살 수 있었다.(여호수아 6:22~25 참조)

야고보서 3:1~10. “혀는 곧 불이요”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불친절한 말, 부적절한 언어, 또는 냉정함을 잃을 때 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파멸을 경고했다. 그는 신중한 언어 사용의 중요성을 독자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입과 혀를 말의 재갈, 배의 키, 불, 독 등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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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은 입에 물린 작은 재갈로 제어한다. 야고보는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말을 조심하라고 권고했다.(야고보서 3:2~3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야고보서 3장 2~10절을 인용하고 나서, 거칠거나 상처를 주는 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혀는 한결같이 사악하다거나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이 ‘치명적인 독[으로] 가득’하다는 의미는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하는 말의 일부가 파괴적이며, 심지어 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후기 성도에게 이것은 냉혹한 비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지한 간증을 나누고 열의에 찬 기도를 드리며 시온의 찬송가를 부르는 음성은 또한 질책하고 비판하고 곤란에 빠뜨리고 품위를 손상하며 고통을 주고, 또 그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영을 파괴하는 음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남편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성스러운 선물, 즉 사랑과 행복한 동반자 관계를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 주는, 여러분의 아내이자 하나님의 딸인 여러분 자녀들의 어머니가 여러분에게 맡겨졌습니다. 여러분이 구애할 때 했던 친절한 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손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 놓고 주었던 축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 그런 후 차갑고, 신랄하고, 굴레를 벗어난 말들을 했던 다른 순간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를 물리적으로 때리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남편도 경솔하거나 불친절한 말의 잔혹함으로 아내의 뼈 대신 그녀의 마음을 확실하게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

아내 여러분, 여러분의 입속에서 굴레를 벗어난 혀와 여러분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좋거나 나쁜 힘에 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 그 다정한 음성이 한순간에 너무도 날카롭고, 통렬하고, 매서우며, 거칠어질 수 있습니까? 여성의 말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비수보다도 더욱 날카로울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할 때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장벽을 쌓아 상대방을 그 너머로 밀어내 버릴 수도 있습니다.”(“천사의 방언”,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16~17쪽) 말을 제어해야 하는 필요성에 관하여 더 읽어 보고 싶다면, 다음 성구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12:34~37; 앨마서 12:14; 교리와 성약 42:27.

야고보서 3:9~13.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는 자신의 입으로 축복과 저주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라고 훈계했다.(야고보서 3:10)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낸다.(야고보서 3:11~13 참조) 청소년의 힘을 위하여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가 파괴적인 언어 사용을 지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침을 주었다.

“여러분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딸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깨끗하고 지적인 언어는 총명하고 건전한 정신을 증거합니다. …

언제나 경건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십시오. 그분들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죄입니다. …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상스럽고 천박한 언어 또는 몸짓을 삼가고,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농담하거나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일은 주님과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

자주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입에 담거나 조롱, 험담, 분노를 담은 말을 하는 등 표준에 어울리지 않는 언어 습관이 있더라도 여러분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도움을 구하십시오. 가족과 친구에게 훌륭한 언어를 사용하려는 여러분의 소망을 지지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청소년의 힘을 위하여[소책자, 2011], 20~21쪽)

야고보서 4:1~3.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야고보는 마음의 의도가 단지 그릇된 욕망을 채우려는 데 있다면 그 기도는 부적절하다고 가르쳤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잘못” 구하지 않도록 성신의 인도를 구해야만 한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나님께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 또한 장차 있을 상태로서 보신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기도할 때 그런 귀중한 관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성신의 속삭임에 의지해야만 한다. 그런 지식에 접근하고 나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로 있어야 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영의 속삭임을 받으면 ‘잘못’ 구하지 않을 것이다.”(“What Should We Pray For?” Prayer [2005], 23) 또한 교리와 성약 46편 30절을 참조한다.

야고보서 4:11~12. “서로 비방하지 말라”

야고보서 4장 11절에 나와 있듯이, 다른 사람에 대해 악한 말을 하거나 비방하는 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행위이다.(레위기 19:18; 또한 마태복음 25:40; 모사이야서 27:4 참조) 칠십인 정원회 일원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크리 엘 코포더 장로는 타인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하는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가정에서 참으로 안전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찾기가 얼마나 쉬운지 아십니까? 타인에게는 비난을 퍼부을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는 핑곗거리를 찾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나에게 자비를,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심판을’이라는 태도에 너무 많이 젖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과 명성을 다루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거룩한 것을 다루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돈이나 물건을 훔친다고 생각하면 무서워서 몸을 움츠리지만 남의 훌륭한 이름이나 명성을 훔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절정의 시대에 주님의 종이었던 야고보는 이 영원한 진리를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야고보서 4:11~12)”(“우리 가정에서 여러분의 이름은 안전합니다”,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97쪽)

야고보서 4:17.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는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라는 가르침을 받고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라고 기록했다.(야고보서 4:17 참조) 이런 죄는 “태만죄”로 불리기도 한다.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원하면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용서하되 한 번이 아니라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새로운 복음의 정수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보다 하라는 것을 좀 더 강조했습니다. …

저는 우리의 가장 큰 죄 중의 하나가 태만죄라고 느낍니다. … 우리는 사려 깊고 관심을 보이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게을리한 것에 대해 몹시 죄의식을 느낍니다.”(“율법의 더 중한 바: 심판과 자비와 신앙”, 성도의 벗, 1998년 1월호,53, 59쪽)

야고보서 5:1~6. 부유한 자에 대한 경고

선지자들은 부에 따르는 자만심과 죄악을 거듭해서 경고했다.(예레미야 9:23; 아모스 2:6~7; 4:1; 마태복음 13:22; 디모데전서 6:7~10; 니파이후서 9:30; 교리와 성약 56:16 참조) 야고보는 특히 다음 세 가지 부분을 염려했다. (1) 부를 축적함.(야고보서 5:2~3 참조), 물질적 부를 너무 많이 쌓아서 사용하지도 못하고 썩어 가는 상황을 의미한다. (2) 고용인들에게 급료를 주지 않음.(4절 참조) (3) 사치스럽고 방종한 방식으로 생활함.(5절 참조) “살륙의 날”은(5절) 다가오는 심판의 날을 의미할 것이다. 소를 도살하기 전에 살찌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악인은 자신에 대한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욕망을 살찌운다.

4절에서, 야고보는 자신의 고용주에게서 사취당한 자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다고 기록했다.

야고보서 5:7~8. 이른 비와 늦은 비

고대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파종기에는 씨앗이 발아해 자라도록 “이른” 비가 내리기를, 수확기에는 곡식이 여물도록 “늦은 비”가 내리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야고보는 이 비유를 통해, 참을성 있게 논밭을 가꾸고 비를 기다리고 마침내 있을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들처럼 의인들도 결국에는 구원이 올 것을 알고서 끈기 있게 복음을 전파하고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통찰을 더했다.

“주님의 재림은 농부가 농작물을 심고 추수하는 것과 같다. 그분이 처음으로 오실 때 씨앗이 뿌려지며, 이른 비가 내려 싹이 트고 뿌리가 내린다. 그런 다음, 수확물을 여물게 하는 늦은 빗속에서 계속되는 성도들의 수많은 인내와 오랜 기다림이 있은 후, 그분은 다시 오셔서 포도원의 열매를 따고 신앙을 지킨 이들과 함께 천 년간 지상을 통치하신다.

… 이른 비는 씨를 뿌리는 시기에 내렸으며, 늦은 비는 추수할 농작물이 익게 하려고 내렸다. 따라서, 주님이 절정의 시대에 지상의 인간들에게 성역을 베푸셨을 때 하늘에서는 의로움의 비를 내렸다. 또한, 재림에 수반하여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볼]’ 때(시편 85:11), 계시와 소생과 회복의 큰 날이 있을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270–71)

야고보서 5:10~11. 선지자들은 고난을 견디는 법에 대해 본보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를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은 끈기 있는 인내심을 보여야 하는데, 야고보는 그 본보기로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언급했다. 우리 시대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고난의 시기에 인내한 사람의 전형으로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지목했다.

“우리 경륜의 시대의 선지자였던 조셉 스미스도 하나님 아버지의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복을 성취하기 위하여 온갖 반대와 고난을 견디어 냈습니다. 조셉은 분노한 폭도들에게 시달리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는 궁핍과 굴욕적인 비난과 불친절한 행동을 참을성 있게 견뎌 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주에서 저 주로 강제로 쫓겨 다녔습니다. 그는 적들에 의해 몸에 타르가 칠해지고 깃털이 달린 채 끌려다녔습니다. 그는 적들의 거짓 고소로 투옥되었습니다. …

조셉은 자기가 이 대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아마 현세의 시련이 없어져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지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슨 목적으로 자신이 이 땅에 왔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 했습니다.”(“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75쪽)

야고보서 5:13~16. 병자 축복

야고보서 5장 13~16절은 아픈 사람이 치유될 수 있도록 기름 부음을 하는 관행이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권세를 지닌 주님의 종들을 통해 행해졌음을 입증한다.(또한 마가복음 6:13 참조)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현대에 병자에게 기름 부음을 하는 것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가 멜기세덱 신권 권세로 기름 부음을 받으면, 그 기름 부음은 동일한 권세로 인봉됩니다. 무언가를 인봉한다는 것은 확인한다는 의미이며, 의도한 목적에 대해 구속력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장로들이 아픈 사람에게 기름을 붓고 기름 부음을 인봉할 때, 그들은 주님께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축복을 부어 주실 수 있도록 하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브리검 영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을 때면 하나님의 병 고치는 권능과 영향력이 저를 통해 아픈 사람에게 전달되어서 병이 나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우리가 준비되어 있고 주님 앞에 거룩한 그릇이 된다면, 전능자의 권능이 집행자의 육신을 통해 아픈 사람의 몸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으며, 결국 아픈 사람은 온전하게 됩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브리검 영(1997), 252쪽]. …

신앙은 하늘 권능으로 치유하는 데에서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몰몬경은 ‘사람의 자녀들 가운데 신앙이 없을진대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으심이라.’라고까지 가르칩니다.(이더서 12:12)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님이 병자 축복에 관해 하신 유명한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신앙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픈 사람과 그 가족은 종종 의식을 집행하는 형제들이 갖고 있기를 바라는 병 고침의 은사나 신권 권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복을 받는 당사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 축복을 받는 사람이 의식이 있고 책임을 질 능력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이 지닌 신앙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마태복음 9:22]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주님께서 너무나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President Kimball Speaks Out on Administration to the Sick,’ Tambuli, Aug. 1982, 36~37; New Era, Oct. 1981, 47]. …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의 신권 권능을 행사할 때, 신앙에 찬 기도를 듣고 응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신앙과 신권의 병 고치는 권능이 신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병 고침”,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48~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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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받는 아픈 소녀

야고보는 또한 병자의 치유를 죄의 용서와 연관지었다.(야고보서 5:15 참조) 이는 치유를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겸손과 신앙이 용서를 받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는 원리에 의거했을 것이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과 헌신, 의로움, 개인적 합당성을 지닌 사람은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으며, 인생 행로에 대해 의로움을 인정받는 영의 승인을 얻을 수 있고, 또한 죄 사함을 받는다. 이는 그 사람이 영과 함께하게 되는 것으로 증명되는데, 만일 합당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을 동반할 수 없다.”(Mormon Doctrine, 2nd ed. [1966], 297–98)

야고보서 5:20.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

야고보서에는 이런 성구가 나온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야고보서 5:20) 야고보는 죄인이 개심하고 구원 의식을 받을 때 그 사람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덮어지며, 즉 가려지거나 용서받으며, 그 사람은 영적 사망을 면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후기의 계시에서는 개종하도록 도와주는 사람 또한 죄 사함을 받는다는 통찰을 더한다.(교리와 성약 62:3 참조)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은 다음 진리를 확언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오고, 꿋꿋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간증을 전하면 우리의 죄가 더욱 쉽게 사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모두 우리의 죄를 사함받기 위한 도움을 찾고 있습니다. (교리와 성약 84:61 참조) 선교사 성구 중 가장 훌륭한 성구의 하나인 교리와 성약 4편에서 주님은 우리가 ‘온 마음과 능력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선교 사업에 정진할 때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절)”(“저마다 책임이 있느니라”, 성도의 벗, 1977년 11월호, 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