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9장: 마태복음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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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장

마태복음 26장 소개 및 연대

마태복음 26장은 구주께서 자신에게 곧 일어날 일을 예언하신 내용에서부터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속죄와 관련된 사건들의 기록이 시작되는 장이다. 속죄 및 속죄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들에는 다음이 포함되어 있다. (1) 구주의 마지막 만찬. 이 만찬에서 구주께서는 자신의 속죄를 나타내는 의식인 성찬을 제정하셨다. (2)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겪는 고통. 이때 구주께서는 육신과 영혼에 격심한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다. (3) 그분은 배반당하고 체포당하셨으며, 유대 공회에서 재판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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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연대표

마태복음 26장 주해

마태복음 26: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다

유월절 축제 기간이 다가오자, 구주께서는 자신이 배반당하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날이 임박했음을 아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축제 기간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셨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방법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일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대 산헤드린(great Sanhedrin)의 종교적 지도자들과 일반 지도자들을 대표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흠모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는 동안 예수님을 잡는다면 소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염려했다.

마태복음 26:6~13. 베다니에서 구주께 향유가 부어지다

구주께 향유가 부어진 일을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14:3~9 주해요한복음 12:1~8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6:14~16. “은 삼십”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넘기는 대가로 “은 삼십”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마태복음 26:15)[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는 은 삼십을 준 것이 아니라 주기로 약속했다(covenanted)고 나옴—옮긴이] 이 금액은 스가랴의 다음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다.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라] …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스가랴 11:12) 모세 율법에 따르면, 은 삼십 세겔은 죽은 종에 대해 상전에게 변상하는 금액이었다.(출애굽기 21:32 참조) 따라서 구주를 판 값은 예언의 성취 외에도 유다와 제사장들이 그분을 비천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악을 행하도록 미리 운명으로 정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주를 팔기로 한 것은 유다의 선택이었다. 조셉 스미스 역에는 유다가 구주를 팔았던 한 가지 이유가 구주가 가르치신 교리에서 기인했다고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이사도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겼다. 그가 예수님에게서 돌아섰으며, 그분이 하신 말씀 때문에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었다.”(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14:31)

마태복음 26:17~30. 유월절과 성찬(또한 마가복음 14:12~25; 누가복음 22:7~30; 요한복음 13:1~2 참조)

모세 시대에 주님은 유월절을 제정하여,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해 주신 일을 기념하게 하셨다. 그날 주님께서는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셨으나 상징적으로 문설주에 희생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넘어가”셨다.(출애굽기 12:3~14, 26~32 참조)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구주께서는 자신을 기념할 새로운 상징적인 “식사”로서 성찬을 제정하셨다. 유월절의 상징물을 취하는 것이 미래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기시키고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었듯이, 성찬을 취하는 것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성찬을] 안전과 구원과 구속을 기억하게 하는 방편인 유월절로 여기고 있습니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68쪽)

마태복음 26:21~22. “주여 나는 아니지요”

사도들은 구주와 함께 갈릴리와 유대 지역 방방곡곡을 다녔다. 그런 여정 동안 구주와 더불어 지내면서 그들은 그분의 신뢰를 받는 친구들이 되었다. 당연히 그들은 유월절 식사 동안 구주께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하신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각자 돌아가면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 (마태복음 26:21~22)라고 묻기 시작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이 성구들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고 주님과 그분 종들의 권고가 자신에게 해당하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함을 권고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6:21)[개역개정판 한글 성경에 번역된 ‘주여 나는 아니지요’가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는 ‘Lord, is it I(주여 내니이까)’로 나옴–옮긴이]

이 사람들이 사도였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그들은 사도로서의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늘 흥미롭게 여긴 점은 그 자리에서 그들이 팔꿈치로 서로를 슬쩍 찌르면서 ‘내가 장담하건대 그 사람은 바로 유다야. 요즘 들어서 그가 하는 짓이 확실히 [수상했거든.]’ 하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격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기록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마태복음 26:22)

권고를 무시하려는 성향을 다스리고 잠시 적어도 사도와 같은 자세를 취하며 이렇게 자문해 보시겠습니까? ‘나 자신을 개선할 필요가 있는가? 이 권고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행해야 할까?’ 혹 약하거나, 실패하고 있거나 사도들과 제일회장단을 기꺼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주여 그 사람이 저입니까라고 묻지 않으시겠습니까?” (That All May Be Edified [1982], 237)

마태복음 26:23.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

그릇에 손을 넣는 관습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3:26~27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6:26~28. 성찬의 상징물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동안 성찬을 제정하시며 성찬의 상징물이 자신의 몸과 피를 나타낸다고 사도들에게 가르치셨다.(또한 제3니파이 18:1~3, 7, 11 참조)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성찬 상징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상 물보다 앞서서 떼어지고 축복된 빵 조각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찢긴 살과 상한 마음과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육체적 고통을 기억하게 되는데,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뒤 최후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요한복음 19:28; 마태복음 27:46)라고 외치셨습니다.

구주께서 육체적인 고통을 겪으셨기에 그분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니파이후서 2:8) 모든 인류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며, 무덤에서 나와 승리의 부활에 이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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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을 취하는 사모아인 가족

작은 잔의 물 한 잔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영적인 고통과 고뇌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태복음 2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고통 중에서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누가복음 22:44) 되었습니다.

구주의 영적인 고통과, 사랑이 지극하여 값 없이 주신 무죄한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경전에서 지칭하는 아담의 범법인 ‘원죄’(모세서 6:54)의 대가가 치러졌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살았던 인간들과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인류의 죄와 슬픔, 그리고 아픔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으며, 그분이 가르치셨던 복음의 원리와 의식에 순종하여 살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니파이후서 9:21~23 참조)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는 ‘값으로 산 것’(고린도전서 6:20)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값비싸며 자비로운 구매였습니까!

그것이 바로 모든 복음 의식이 여러 가지 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이며, 또한 모두 상징과 비유로 이루어진 이 특별한 의식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쉽고 반복적으로 오게 되는 이유입니다.”(“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67쪽) 성찬에 관한 추가 정보는 고린도전서 11:17~29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6:26~29. 구주의 속죄를 기념하다

조셉 스미스 역에는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성찬식을 계속 행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이들 성구는 또한 성찬식을 행하는 한 가지 목적이 구주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분의 속죄를 기념하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떼어 축복하시고 자기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대속물로 주는 내 몸을 기억하는 것이니라.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그들의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내 이름을 믿는 자를 위하여 흘린 새 언약의 피를 기억하는 것이니라.

또 내가 너희에게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내가 행한 것을 본 대로 지켜 행하고 끝까지 나에 대하여 증거할지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내가 와서 아버지의 왕국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26:22–26; 마태복음 26장 26~29절과 비교)

마태복음 26:28. “이것은 …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구주께서 “이것은 …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마태복음 26:28) 하신 말씀은 구약 시대에 사용되었던 중요한 용어들을 언급한 것이었다. 언약[testament]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성약[covenant]”을 의미할 수 있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성약을 맺으셨을 때, 백성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성약했다. 모세는 여호와께 희생 제물을 드렸으며, 그런 후 그는 희생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는 여호와께서 … 너희와 세우신 [성약의] 피니라.”(출애굽기 24:8; 또한 출애굽기 24:3~8 참조) 마태복음 26장 28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언약을 언급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새 “언약”, 즉 성약이 옛 성약처럼 이제 곧 피로 확인받을 것이며, 모세 시대에 희생 제물의 피가 상징적으로 그 시대의 백성을 덮었듯 그분이 우리를 위해 흘릴 피는 우리의 죄를 덮고 지워 없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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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월터 레인. “이것은 …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8.

선지자 예레미야는 주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옛 성약이 대체될 것임을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잔을 주신 것은 옛 성약이 성취되었다는 것과 이제 새 성약을 세운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마태복음 26:29. 구주께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취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2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왕국에서 그들과 함께 마시기 전까지는 그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찬은 구주의 속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영광 중에 지상으로 돌아오실 때를 내다보고 고대하는 행위이다.(고린도전서 11:26 참조)

후기에 주님께서는 미래에 자신이 지상에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게 될 때에 관하여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상세하게 계시하셨다. 교리와 성약 27편에 기록되어 있듯이, 주님께서는 모로나이, 일라이어스, 침례 요한, 엘리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 베드로, 야고보, 요한, “또한 미가엘 곧 모든 자의 조상 … 아담”(교리와 성약 27:4~14 참조) 등 수많은 고대 선지자들을 포함하여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지상에서 다시 성찬을 취하실 것이라고 밝히셨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는 “내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모든 자”가 포함된다.(교리와 성약 27:14) 이 말은 우리가 맺은 성약에 충실하게 남고 끝까지 견딘다면 미래의 그날 구주와 함께 성찬의 상징물을 취하는 이들 가운데 우리도 함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6: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구주와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마치면서 했던 “찬미”는 아마도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암송했던 시편 113~118편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할렐이라고 불렸다. 시편 113~114편은 전통적으로 유월절 식사를 시작할 때 노래했으며 시편 115~118편은 그 식사를 정식으로 마칠 때 불렀다.

마태복음 26:31~35.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구주와 제자들이 다락방을 떠나 감람 산을 향하여 걸어갈 때,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모두 그날 밤 자신을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후 스가랴 13장 7절에 나오는 예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다.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마태복음 26:31) 베드로가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대답은 베드로 자신보다 주님이 그를 더 잘 아신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는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신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날, 밤이 더 깊어진 시각에 구주께서는 체포되셨고, 제자들은 일시적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베드로는 구주를 세 번 부인했다.

목자를 치리라는 예언은 제자들이 앞으로 다가올 구주의 죽음에 준비되도록 도우시고자 구주께서 지상 성역 동안 여러 번 언급하신 말씀 중 하나였다. 그런 예언들의 또 다른 예는 다음 성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태복음 12:38; 16:21; 17:9, 22~23; 20:17~19; 및 21:33~39.

마태복음 26:36. “겟세마네라 하는 곳”

예루살렘 성벽 바로 바깥쪽의 감람 산에, 또는 그 가까이에 있는 겟세마네는 감람나무 동산으로, 구주께서 종종 찾으시던 곳이었다.(누가복음 22:39; 요한복음 18:1~2 참조) 이날 밤, 구주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통을 겪고 무한한 속죄를 행하기 위해 겟세마네로 가셨다. 이 동산의 위치는 예루살렘 성전의 동편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번제를 드렸던 사람들은 “흠 없는 수컷[짐승]”을 골라 동쪽 회막문에서 그것을 제사장에게 건넸다.(레위기 1:3) 신약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문에서 번제물을 제사장에게 건넸다. 이런 행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는 구주의 모습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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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레 형태의 올리브 압착기

이스라엘의 하조르에 있는 지레 형태의 고대 올리브 압착기를 재현한 모습. 바구니에 으깬 올리브를 담아 켜켜이 쌓고 지레에 돌을 매달아 누르면, 바구니마다 기름이 새어 나와 돌로 된 수반으로 흘러 들어온다.

사진 촬영: 제임스 제프리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올리브를 찧고 압착해서 기름과 식료품으로 만들던 곳인 그 동산은 히브리어로 ‘기름을 짜다’라는 의미의 겟세마네로 불렸습니다. 그곳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자기에게 나아오게 하려고 모든 사람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교리와 성약 18:11] 그분은 모든 인류가 지은 죄의 짐을 짊어지셨으며,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를 쏟으셨습니다.[누가복음 22:44; 교리와 성약 19:18 참조]”(“속죄”,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35쪽)

다음 이야기는 압착된 올리브에서 나오는 기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흘리신 피를 생생하게 상징한다고 할 만한 일면을 보여 준다.

“어느 가을 학기에 나는 브리검 영 대학교 예루살렘 센터에서 올리브를 수확하여 기름을 짜는 활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감독했다. 올리브를 얌, 즉 돌 절구에 담고 분쇄하는 돌을 밀어서 돌리자 올리브에서 기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름이 석회암 절구의 가장자리로 흘러나오기 시작할 때, 다시 말해서 해마다 새로 짜는 기름이 나오는 첫 순간에는 기름이 선명한 붉은 색을 띤다.

올리브 압착기 주위에 둘러서서 고대에 기름을 짜는 과정을 재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170명의 학생들에게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기름이 평범한 황금색으로 변해 가는 일 분이라는 시간은 충격적이고 오싹하기까지 했다. 그 현상을 지켜본 학생들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했던 상징에 대한 놀라운 확인 이상의 경험이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진 그 광경은 겟세마네의 실제 모습이었다. … ‘기름을 짜다’, 즉 겟세마네라 불린 이곳에서 구주께서는 온 인류를 위해 무한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행하시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올리브를 압착하는 듯한 고통을 겪으셨다.”(Andrew C. Skinner, Gethsemane [2002], 89–90)

마태복음 26:37, 40~45.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시다

전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듯이, 주님은 사도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마태복음 17:1; 마가복음 5:37 참조) 주님께서 이때 그 세 사람을 뽑아 가신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확실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승천 후에 교회를 감리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겟세마네에서 한 경험은 이후에 속죄에 대한 증인으로서 일하게 될 그들에게 구주의 고통에 대한 귀중한 지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경험을 통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마태복음 26:41) 한다는 것을 배웠다.

마태복음 26:37~39.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고통

마태의 기록은 겟세마네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을 알려 주지만, 이 외의 경전 기록과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의 의미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베냐민 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고통, 주림, 갈증과 피로”와 “그의 백성의 사악함과 가증함으로 인한 … 고뇌”를(모사이야서 3:7) 겪으셨다고 가르쳤다. 앨마는 예수님이 “육체를 따라, 그의 심정을 자비로 충만하게 하사, 육체를 따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 어떻게 도울지 아시고자”(앨마서 7:11~12 참조) 자기 백성의 온갖 고통과 고난과 시험, 질병, 약함을 경험하셨다고 기록했다. 앨마는 또한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따라 고난을 받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지심으로, 그의 구원의 능력을 좇아 그들의 범법을 지워버리려 하심이니[라.]”(앨마서7:13)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구주께서 속죄를 행하시면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셨다고 말했다.

“첫째, 어마어마한 책임감입니다. 주님은 속죄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버지의 자녀들 중 누구도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잘 아셨습니다.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 면전에 거할 수 없기에, 율법을 어긴 사람에게 회개할 방도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국 아버지 면전에 머물지 못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영의 자녀들은 모두가 사탄에게 영원토록 압제와 학대를 받을 상황이었습니다.

둘째, 정신과 마음이 모두 지극히 순수하신 주님께서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의 결과, 심지어 가장 사악하고 비열한 죄의 결과까지도 몸소 느끼셔야 했습니다.

셋째, 사탄의 무리들이 주님을 육체적, 정서적으로 극한까지 몰아가며 사악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분은 견뎌 내셔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가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이유들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그 힘을 모두 소진하여 도움이 가장 절실한 그 순간에 오로지 혼자의 힘과 능력으로 그 어마어마한 책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에!”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7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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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는 그리스도

내 아버지여, 사이먼 듀이

칠십인 회장단의 태드 알 콜리스터 장로는 온 인류가 사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겟세마네와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몇 가지 일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무자비하고 광포한 사탄의 세력이 전후좌우에서 구주를 공격했음이 틀림없다. … 구주께서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사탄으로부터 모든 포로가 풀려날 때까지 나아가 담대히 싸우셨다. 그것은 무한한 결과가 따르는 구조의 사명이었다. 구주의 모든 육체적 힘과 모든 미덕, 축적된 모든 영적 힘까지도 그 싸움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모든 능력을 혹사하고, 모든 힘을 발휘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모든 것을 다 사용한 후에야 사탄의 세력은 자신의 주둔지를 버리고 참패를 맛보며 퇴각했을 것이다. … 위대한 구조자께서 우리를 현세와 영원토록 구원하신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무시무시한 전투였던가! 그 고통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 얼마나 위대한 사랑이었던가! 그 얼마나 큰 희생이었던가!” (The Infinite Atonement [2000], 130–31)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고통을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도록 LDS.org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성경 비디오에 나오는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겪으신 구주”(8:31)를 본다. 이 비디오는 마태복음 26장 36~57절을 다룬다.

마태복음 26:39.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구주께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마태복음 26:39) 하신 것은 그분이 하늘 아버지께 복종하셨다는 점을 나타낸다. 구주께서 속죄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도록 그분을 떠받치고 힘을 돋우어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분명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다. 이 질문에 대해 경전과 선지자의 가르침에서 몇 가지 답을 얻을 수 있다.

구주의 동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한 완전무결한 사랑과 그분을 향한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요한복음 8:29; 17:1~26 참조) 그분은 자신이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었”다고(교리와 성약 34:3; 또한 니파이전서 19:9 참조) 밝히셨다. 그분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히브리서 12:2) 로렌조 스노우(1814~1901) 회장은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신 속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과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신앙을 발휘해야 했다.”라고 가르쳤다.(The Teachings of Lorenzo Snow, comp. Clyde J. Williams [1984], 98)

구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것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우리를 북돋우는 모범이 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간구하려면 커다란 신앙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믿고 견디는 신앙은 위대한 힘을 가져옵니다. 충분한 신앙이 있으면 시련과 환난의 원인이 되는 상황을 다르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상황을 바꾸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 상황을 참고 견디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생활하는 가운데 상황이 바뀌게 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매번 기도를 끝낼 때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42)라는 원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신앙에는 그분에 대한 신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성도의 벗, 1998 7월호, 77쪽)

마태복음 26:47~50. 구주를 배반하다

신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서로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하는 관습이 있었다.(로마서 16:16; 고린도전서 16:20; 데살로니가전서 5:26 참조) 특히 제자가 위대한 스승에게 그러한 인사를 하는 것은 존경을 나타내는 의미였다. 그 인사는 형제애와 우정을 전달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유다에게 하신 다음 말씀은 반어법으로 하신 것이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마태복음 26:50)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누가복음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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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파는 유다

입맞춤으로 예수를 파는 유다, 제임스 티솟

마태복음 26:51~54. 구주께서 천군을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구주께서 자신이 기도하여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마태복음 26:53)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하신 말씀은 그분이 기꺼이 체포되어 학대를 받겠다고 하신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글자 그대로 “열두 군단”은 36,000명과 72,000명 사이의 천사였을 것이다. 구주께서 바로 며칠 전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은 그분이 말 한 마디로도 멸망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마태복음 21:19~20 참조) 그분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있었으나 이 상황에서 그 힘을 사용하지는 않으셨다. 몰몬경의 선지자 야곱은 백성에게 주님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가 너희를 꿰뚫을 수 있으시며, 그 눈으로 한 번 쳐다보심으로써 너희를 티끌에 쳐버리실 수 있으심[이라.]” (야곱서 2:15)

후에 칠십인이 된 제럴드 엔 런드는 구주께서 학대를 받으셨을 때 자신을 지킬 힘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으신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자신의 권능, 빛, 영광으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분, 자신의 말로 태양계, 은하, 별들도 생겨나게 하는 분이 악인들 앞에 서서 아무런 가치나 쓸모도 없는 존재로 판단받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자신을 재판하려고 잡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구주께서 하실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분이 자신을 낮추시는 모습과 관련하여 새롭고도 색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다. 유다가 병사와 대제사장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에 와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았을 때, 그분은 한 마디 말로 예루살렘 성 전체를 초토화하실 수도 있었다. 대제사장의 종이 앞으로 나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렸을 때, 예수님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그 사람을 원래의 원소로 되돌리실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앞으로 나와 얼굴에 침을 뱉었을 때, 예수님은 눈을 깜빡거리는 것만으로도 태양계 전체를 소멸시킬 수 있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그곳에 서서 인내하고, 감내하며, 자신을 낮추셨다.”(“Knowest Thou the Condescension of God?” in Bruce A. Van Orden and Brent L. Top, eds., Doctrines of the Book of Mormon: The 1991 Sperry Symposium [1992], 86)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버렸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반응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6:57. 가야바는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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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계단

가야바의 관정이라 전해지는 곳으로 이어지는 계단

사진 촬영: 제임스 제프리

가야바는 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대제사장[high priest]이었으며, 주후 7년부터 14년까지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사위였다. 가야바는 사두개인에 속했다. 신약 시대에 대제사장이라는 직책은 합법적인 신권 직분이라기보다는 부정한 정치적 관직이었다. 가야바는 신약 시대의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도 더 오랜 기간 그 직분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그가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로마 정부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음을 나타낸다.

대제사장으로서 가야바가 맡은 책임에는 성전의 헌금함을 관리하고 성전 의식을 감독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으로 상당한 돈을 벌어들였다. 성전에서 이런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구주께서 성전 뜰을 깨끗이 하셨을 때 그분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자신의 부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마태복음 21:12~15 참조) 구주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일이 있고 난 후, 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여야 할 필요성을 피력했다. 아마도 그는 주도적으로 그 일을 모의했을 것이다.(요한복음 11:49~53 참조) 대제사장으로서 가야바는 산헤드린을 관장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한 그날 밤 그분을 심문한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26:59. “예수를 죽이려고”

마태복음 26장 59절에 언급된 공회는 예루살렘의 대 산헤드린으로, 레위인, 대제사장들[chief priests],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 외 정치 단체에 속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71명으로 구성된 의결 기관이다. 그곳의 의장은 대제사장[high priest]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가야바가 그 직위에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의 최고 사법 재판소이자 예루살렘의 최고 입법 의회였다. 이곳의 주된 기능은 유대인의 율법을 해석하고 유대인의 생활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이 공회에 속한 대제사장들과 그 밖의 구성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았는데,]” 이는 그들이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음과, 그분을 소송할 논거가 빈약하고, 그들의 행동은 계획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한다.(또한 Bible Dictionary, “Sanhedrin” 참조)

마태복음 26:61~66. 신성 모독죄

신성 모독은 하나님을 욕하거나 경멸하거나 조롱하거나 저주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중 어느 것도 하지 않으셨으나 가야바는 구주께서 자신이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신성 모독으로 여겼다.(마태복음 26:63~64 참조) 그러나 신성한 권능과 권세에 대한 구주의 주장은 그것이 진실이 아닐 경우에만 신성 모독이 되었을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은 가야바는 자신의 옷을 찢고 구주께서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모세 율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죄였기 때문이었다.(레위기 24:11~16 참조) 가야바와 공회의 회원들은 구주께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신성 모독은 유대인의 문제이지 로마 당국의 관심사는 아니었기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호송하면서 죄목을 선동죄로 바꾸었다. 선동죄에 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마가복음 15:1~2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6:64. “이후에 인자[를] … 너희가 보리라”

“인자”를(마태복음 26:64) 보는 것에 관한 구주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14:53~65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6:66~68. 유대인 공회에서 학대받는 구주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육체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심문을 받기 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미 여러 시간 동안 고통을 겪으셨다. 그분은 키드론 계곡을 왔다갔다 하셨다. 그분은 또한 출혈에 따른 증상에 시달리고, 약해진 몸으로 밤 공기를 맞아 오한을 느끼고 계셨을 것이다. 또한 여러 시간 동안 잠도 주무시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약해진 상태에서 그분은 자신을 고소한 자들에게 학대를 당하셨다. 니파이는 구주께서 “사람의 자녀들을 향한 그의 사랑의 친절과 그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니파이전서 19:9) 자신에게 퍼붓는 학대와 모욕을 기꺼이 감내하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그분을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마태복음 26:67 참조) 그들은 그분의 눈을 가리고 그분을 조롱했다.(마가복음 14:65; 누가복음 22:63~64 참조) 후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심이라.]”(베드로전서 2:21, 23)

칠십인의 브루스 디 포터 장로는 속죄를 이루기 위해서는 죄 없는 구주께서 유대인과 로마 지도자들로부터 학대를 받으셔야만 했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 재판을 받는 동안 당하신 잔학 행위와 모욕은 그리스도를 실족시키려는 루시퍼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나타낸다. 단 한 번의 실수, 다시 말해 한 마디라도 화를 내거나 한 번이라도 분노가 폭발하거나, 심지어 한 순간이라도 자기 연민이나 교만에 빠진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거짓 고소, 불경스러운 감정의 폭발, 가시관, 뼛조각이 박힌 채찍으로 가하는 채찍질, 왕복 입히기, 군병들의 침 뱉음, 조롱, 구타 등 온갖 모욕이 구주께 퍼부어졌다. 이 모든 비참한 장면은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거두신 승리를 수포로 돌릴 방법을 찾고자 한 루시퍼가 도모한 것이었다.”(The King of Kings [2000], 106–7)

마태복음 26:69~75.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다(또한 마가복음 14:66~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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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하는 베드로

부인하는 베드로, 칼 에이치 블로흐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은 베드로가 구주를 세 번이나 부인한 것에 대해 생각할 때, 그가 구주를 극심하게 사랑했으며 구주께서도 그를 신뢰하셨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권했다.

“그 끔찍한 밤에 베드로가 정신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인 것인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 준 담대함, 용기, 큰 헌신과 구주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선의로 해석하고 적어도 구주께서 하셨듯이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구주께서는 온전히 그렇게 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즉시 그를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직분으로 올려 주시고 왕국의 열쇠를 모두 부여해 주셨습니다.

… 그는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 소리를 듣고서 자신이 주님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셨던 십자가형까지도 모두 성취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단지 개인적인 회개만을 위해 눈물을 흘렸을까요, 아니면 그와 더불어 주님의 운명을 깨닫고서 큰 상실감으로 슬픔의 눈물을 흘린 것일까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믿음이 있는 자들의 선두에 섬으로써 제일 먼저 무덤에 온 사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몇 주 후에 그는 성도들을 모아 조밀하고, 강하며, 통일된 공동체로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그는 감옥에서 고생하고, 두들겨 맞고, 학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밀 까부르듯’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2:31 참조)” (Peter, My Brother, Brigham Young University Speeches of the Year [July 13, 1971], 5)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요한복음 18:15~18, 25~27 주해를 참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