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39장: 고린도전서 12~14장


39

고린도전서 12~14장

고린도전서 12~14장 소개 및 연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충실한 회원들은 다양한 영적 은사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런 은사를 통해 타인에게 봉사하고 사람들을 교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더 큰 화합을 이룩한다. 바울은 사랑[자애]의 은사를 강조했는데, 그는 이 은사의 특징을 순수하고 이타적인 사랑과 타인의 안녕에 대한 염려로 묘사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사랑을 품고 다른 모든 영적 은사를 발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방언의 은사를 부적절하게 사용할 경우 교회를 덕으로 세우지 못할 것이며, 회원들이 더 나은 영적 은사를 구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2~14장에 나오는 바울의 권고는 고린도의 교회 회원들이 교리적인 의문과 화합의 부족으로 겪는 문제를 이어서 다루고 있다.

이미지
제38과 연대표

고린도전서 12~14장 주해

고린도전서 12:1~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복음으로 개종하기 전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다고 말했다.(고린도전서 12:2) 성도들은 힘도 없고 말도 못하는 우상과 반대되는, 간증의 근원으로서 성신의 강력한 영향력에 의지할 수 있다.(고린도전서 12:3 참조)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나오는 말하다[say]라는 단어를 “알다[know]”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이 부분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가 주이심을 수 없느니라”가 된다.(History of the Church, 4:603)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성신을 통해 간증을 얻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간증은 성신을 통해 개인의 마음과 영혼에 깊은 인상을 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증거 혹은 확신입니다. 성신의 주요한 성역은 진리,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에 관한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

간단히 말해서, 간증, 즉 영에 의해 생겨나고 성신에 의해 확인된 진정한 간증은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정하는 모든 우선순위와 여러분이 선택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줍니다”(“순수한 간증”,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40쪽) 영적 분별력에 대한 통찰을 더 얻으려면, 고린도전서 2:6~16 주해를 참조한다.

고린도전서 12:3~10. 영의 은사가 규정되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이 열거한 은사는 “영적 은사” 또는 “영의 은사”로 언급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그분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부여하시는 특별한 축복이다.”(A New Witness for the Articles of Faith [1985], 270)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후기 성도들이 “방언, 예언, 계시, 시현, 병 고침, 방언의 통역 등의 은사를 믿는다.”라고 말했다.(신앙개조 제7조) 이 외에도 모로나이서 10장교리와 성약 46편 등 경전의 다른 곳에 영적 은사에 대한 이해를 보충해 주는 기록들이 실려 있다. 예를 들어, 교리와 성약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성신을 통하여 영적인 은사를 주신다고 나온다.(교리와 성약 46:8~10, 26 참조)

바울은 제자들이 영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왕국에서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봉사하며,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2:5~7 참조) 바울은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고린도전서 12:4~6), 영적 은사는 신회의 세 구성원 모두가 단결하여 나타내는 일임을 인정했다. 다음 도표에는 특별히 바울이 열거한 영적 은사가 나온다.

영적 은사(고린도전서 12:3~10 참조)

설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3절)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아들이며 부활하셨다”는, 성신을 통해 받는 증거.(고든 비 힝클리, “선 행하기를 두려워 말라”, 성도의 벗, 1983년 7월호, 129쪽)

다양한 직분의 차이(5절)

“교회를 관리 및 통제하는 데 사용되는” 지도력 또는 “관리 능력.”(Bruce R. McConkie, A New Witness for the Articles of Faith, 271, 278) 주님께서 평의회, 정원회, 보조 조직 등을 통해 어떻게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는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능력.

사역의 다양성(6절)

악마에게서 나오는 것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분별하는 능력.

지혜의 말씀(8절)

특히 결정을 내릴 때 논리적인 판단과 더불어 복음 교리 및 원리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야고보서 1:5; 교리와 성약 136:32~33 참조) 바울이 여기서 말씀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지혜의 메시지를 성신의 권능으로 가르치는 능력도 지혜의 은사에 포함됨을 보여 준다.

지식의 말씀(8절)

“지식의 선물. 무작위 지식이나 보편적 지식 또는 추상적 원리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복음 지식,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한 지식.”(Bruce R. McConkie,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370; 또한 교리와 성약 42:61 참조) 바울이 다시금 여기서 말씀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은 성신의 권능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능력도 이 은사에 포함됨을 강조한다.(또한 교리와 성약 25:7; 28:1; 99:1~2 참조)

신앙(9절)

점진적으로 경험하게 되며, 의로운 생활을 통해 증가한다. 모든 사람의 신앙이 똑같은 수준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 은사는 병 고침과 기적의 선행 조건이 된다.(마태복음 17:14~20 참조; 또한 니파이전서 7:12 참조)

병 고침(9절)

신권 의식을 통해 나타난다. 병 고침을 얻기에 충분한 신앙으로 기도하는 것도 영적 은사에 해당한다.(야고보서 5:13~14; 교리와 성약 42:48 참조)

능력 행함[기적을 일으킴](10절)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는 표시. 신성한 권능이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주의 모범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을 도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몰몬서 9:7~11, 18~20 참조)

예언(10절)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요한계시록 19:10) 개인적인 계시는 간증의 근원이다. 사람은 간증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일을 포함하여 그분의 사업을 예언하거나 간증한다. 예언의 은사가 반드시 미래의 특정 사건에 대한 예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모든 회원은 이 은사를 구해야 한다.(민수기 11:29; 고린도전서 14:1, 3, 31, 39 참조) 예언의 은사를 선지자, 선견자, 계시자가 지닌 선지자의 직분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영들을 분별함(10절)

선과 악을 분별하고(모로나이서 7:12~18; 교리와 성약 101:95 참조) 거룩한 영과 거짓 영을 분별함.(교리와 성약 46:23 참조) 분별의 은사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알 수 있다.(히브리서 4:12; 교리와 성약 33:1) 분별의 은사는 “주로 영적 느낌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에서 비롯됩니다. … 숨겨진 악을 간파해 내고, 더욱 중요하게는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선을 발견해 냅니다. 분별력의 가장 뛰어난 유형은 다른 사람에게서 더 나은 본성, 즉 그들에게 내재된 선을 인지하고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Stephen L Richards, Conference Report, Apr. 1950, 162)

방언(10절)

“다른 민족 및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것.”(조셉 스미스, 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382~383쪽; 또한 사도행전 2:4~12; 교리와 성약 90:11 참조)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가장 눈에 띄고 많이 추구하는 영적 은사 중 하나이기에 바울은 이 은사를 오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고린도전서 14:4, 9, 27~28, 40 참조)

방언 통역(10절)

듣는 사람들이 교화되도록 영감 어린 통역이 수반되어야 함.(고린도전서 14:9, 11, 13, 19, 27~28 참조)

고린도전서 12:4. “은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전에는 많은 영적 은사가 구체적으로 열거되어 있다.(고린도전서 12:7~10; 모로나이서 10:8~17; 교리와 성약 46:12~29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영적 은사는 수도 없이 많으며 그 종류도 무한하다. 경전에 나오는 은사들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들에게 끝없이 주시는 신성한 은혜의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A New Witness for the Articles of Faith, 371)

고린도전서 12:7, 11. 영적 은사는 성신의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다

침례와 성신의 은사를 받고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하나 이상의 영적 은사를 받는다.(교리와 성약 46:1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올슨 프랫(1811~1881)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성신은 사람과 함께할 때마다 사람이 성신의 영향력에 순종하는 만큼 그를 깨끗하고 성결하고 정결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부여하기도 한다. 성령으로 나서 충분히 충실한 생활을 계속하는데도 영적인 은사가 부족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Masterful Discourses and Writings ofson Pratt, comp. N. B. Lundwall [1946], 539) 영적인 은사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받게 된다. 또한,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에 따르면, “교회 안에는 모든 영적 은사들이 있[다.]”(“인생의 교훈”,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47쪽)

고린도전서 12:12~30.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바울은 교회의 각 회원이 어떻게 교회 조직 전체에 필요한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인간의 몸을 비유로 들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이 하나의 전체로서 기능하지만 여러 부분, 즉 지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각각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바울은 몸 전체에 단지 눈이나 귀만 있다면 몸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지
자리에 앉아서 노래하는 사람들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하나로 단합해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각 회원은 고유한 직분, 의무, 영적 은사를 받기 때문에, 몸의 각 지체가 중요하듯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회원들이 자신의 은사와 재능으로 책임을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 사항을 보살필 때, 교회 전체가 축복을 받는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교회의 모든 회원이 각자 와드나 지부에서 귀중한 공헌을 할 수 있다며 이렇게 가르쳤다. “제가 맡고 있는 책임의 영역에서처럼 여러분의 영역에서 여러분의 책임도 중요합니다. 이 교회에서는 어떤 부름도 작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의 의무를 완수할 때,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각자의 책임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충실하라. 내가 너를 임명한 그 직분을 수행하라. 약한 자를 도우라. 처진 손을 일으켜 세우며, 연약한 무릎을 강건하게 하라.’(교리와 성약 81:5)”(“이 사업은 주님의 사업입니다”, 성도의 벗, 1995년 7월호, 69~70쪽)

제일회장단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도 다음과 같이 유사한 가르침을 주었다. “여러분은 여러분보다 여러분의 부름과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더 능력 있고 더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받은 책임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닿을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들과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어느 누구도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들어올리십시오”,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56쪽)

고린도전서 12:28. 교사의 중요성

바울은 교회 역원을 열거하면서 교사를 사도와 선지자 바로 다음에 언급했다. 이는 교회 안에서 효과적인 교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역설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는 기술을 향상시키라며 이렇게 권고했다.

“이 교회에서 같은 회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안내자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실로 불가능합니다. 바울이 그의 서한에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라고 말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28] …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실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연단에서, 우리의 관리 모임에서 더욱 우수한 교수법을 소생시키고 키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영감으로 가르치는 기술이 교회에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되며, 그렇게 추구해 나가는 전통도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오신 선생”,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25쪽)

고린도전서 12:26.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느니라.]”(고린도전서 12:25~ 26) 감리 감독단의 리차드 시 에즐리 감독은 교회 회원들이 서로 보살필 때 나타나는 화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 각자가 좀 더 동정심 많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련과 경험들을 통해 성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견딜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랑과 보살핌을 주는 그러한 조직에 속해 있어서 즐겁습니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나 슬퍼하는 이와 더불어 슬퍼하는 것,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이를 위로하는 방법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함께 견디는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함께 견딥니다.”(“함께 견딤”, 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11쪽)

고린도전서 12:31. 가장 좋은 은사들을 간절히 구하라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구하라]”라고 권고했다.(고린도전서 12:31) 다음과 같이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가 설명했듯이, 영적 은사를 더 얻기 위한 중요한 첫 단계는 우리에게 어떤 은사가 이미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은사를 구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은사가 주어졌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너희가 교회에 주어지는 그 은사들이 무엇인지 항상 기억하며, 항상 너희 마음에 간직하기를 원하노라.

무릇 모두가 다 모든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많은 은사가 있고 또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으로 한 가지 은사가 주어짐이니라.’(교리와 성약 46:10~11)

이미지
축복을 받는 청녀

축복사의 축복은 우리가 받은 영적 은사를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찾으려면 기도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축복사의 축복문을 통해, 자신이 받은 은사와 구할 경우 받게 될 은사의 약속에 대해 알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각자 자신의 은사를 알아내고 그것을 추구하기를 권고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하늘의 일을 진척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 지상에서 지내는 동안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신, 타고난 은사와 능력을 발전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은사를 통해 지상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교사와 지도자가 될 기회를 받게 될 것입니다.”(“Gifts of the Spirit,”Ensign, Feb. 2002, 16)

고린도전서 12:31; 13:1~13. 사랑

바울은 영적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모든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데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경전에서 우리는 이따금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랑을 지녀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읽게 된다.(디모데전서 1:5; 베드로전서 4:8; 이더서 12:33~34; 모로나이서 7:45~48 참조)

사랑[charity, 자애]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명사 agapē를 번역한 것이며, 이는 단순히 “사랑[love]”을 의미하기도 한다. Agapē는 신약전서의 다른 성구들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간의 깊고 지속적인 사랑,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 우리가 같은 인간에 대해 품어야 하는 사랑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다.(요한복음 13:34~35; 15:10; 17:26; 로마서 8:35, 39 참조)

고린도전서 12:31; 13:1~8. 사랑—“가장 좋은 길”

조셉 비 워스린 장로는 왜 바울이 사랑의 은사를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했으며(고린도전서 12:31), 왜 사랑이 모든 제자의 삶에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주는 바울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직설적입니다. 즉 사랑이 없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방언을 말하고, 예언의 은사가 있고, 모든 비밀을 이해하고, 모든 지식이 있으며, 산을 옮길 만한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2 참조]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입니다.[모로나이서 7:47] 구주께서는 그분을 경멸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할 때조차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치셨습니다. …

1840년, 선지자 조셉은 십이사도들에게 서신을 보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사랑은 신의 중요한 성품 가운데 하나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자기 가족을 축복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전 세계를 생각하며 온 인류를 축복하고 싶어합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426쪽] …

사랑은 제자가 걷는 길의 시작이며, 과정이며, 끝입니다.”(“큰 계명”, 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28쪽) 타인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13:34~35 주해를 참조한다.

고린도전서 13:4~5, 12.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다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3:4)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모욕이나 고난을 참을성 있게 견딘다. 또한 비록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인내하고 친절하게 대한다. 제일회장단의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우리를 화나게 하는 자들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분노와 상처의 모든 근원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의 불완전한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느니라.]’(고린도전서 13:4~5) 그리고 그는 우리가 자신의 결점을 잊어버리고 남의 결점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준엄한 경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하나가 되기 위하여”,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68쪽)

고린도전서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사도 바울처럼, 선지자 몰몬 또한 사랑이 결코 시들지 아니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 은사를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정의했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라.”(모로나이서 7:46~47)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 즉 결코 시들지 아니할 진정한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더 큰 정의는 기독교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대개 실패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공적으로 완전하게 보여 주신 사랑(자애)이다. 참된 사랑은 단 한 차례만 알려졌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순수하게 보여 주신 무한하고, 궁극적이며, 속죄하는 사랑이다. 즉, 우리에 대해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은 언제까지나 시들지 아니[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랑, 즉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희망을 잃고 모든 사람은 가장 비참한 상태에 이를 것이다. 참으로 마지막 날에 그분의 사랑에 따르는 축복, 곧 속죄, 부활, 영생, 영원한 약속을 지닌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

인생에는 두려움과 실패가 있다.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우리를 좌절시키고, 경제나 사업, 또는 정부가 우리를 낙담하게 만든다. 하지만 현세나 영원 속에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다.”(Christ and the New Covenant [1997], 336–37; 또한 로마서 8:35~39 참조)

이미지
그리스도와 맹인

맹인을 고치심, 해리 앤더슨. 참된 사랑(자애)은 우리를 향한 구주의 무한한 사랑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3:8~13. 다른 은사 및 미덕과 비교되는 사랑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한다는(고린도전서 13:8) 바울의 말은 사랑은 결코 끝이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은 바울이 끝이 있음을 지적한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와 같은 놀라운 은사와 대조를 이룬다.(고린도전서 13:8~10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의 은사가 그치게 되겠는가? 성도들이 예언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 또는 지식의 은사를 더는 누리지 못하게 될 날이 오겠는가? 완전한 날이 이르면 이 은사들이 더 큰 무언가에 삼키운 바 되고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대답은 ‘그렇다’이다. 성도들이 모든 방언을 알게 되면, 어느 누구도 미지의 방언으로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처럼 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미래를 예언할 필요성이나 기회가 없을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380)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사랑이 모든 미덕 중 “제일”로(고린도전서 13:13) 묘사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랑은 모든 거룩한 미덕을 내포하고 있으며, 구원의 계획의 처음과 마지막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다른 미덕이 실족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거룩한 성품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제일 좋은 길”, 성도의 벗, 1992년 7월호, 61쪽)

고린도전서 13:9~13.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이미지
켈트족의 거울

로마 켈트족의 거울. 고대에는 광이 나는 금속 거울이 사용되었다.

바울은 현세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우리가 영원한 세상에서 누리게 될 완전한 지식에 비해 불완전하다고 말했다.(고린도전서 13:12; 니파이후서 9:13~14 참조) 그는 현재의 불완전한 지식을 금속 거울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에 비유했다. 그런 후 그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지식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분명하게 보는 것에 비유했다.(고린도전서 13:12)

고린도전서 13:13. 신앙, 소망, 그리고 사랑

바울은 신앙, 소망, 사랑을 “항상 있을” 세 가지 원리로 언급했다. 이는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한다.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이 세 가지 원리 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삶의 건물을 지을 때 가장 기초에 두어야 할 세 가지 거룩한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 참조) 이것들은 다리가 세 개인 걸상에서처럼 우리를 튼튼히 받쳐 주는 지주가 됩니다. 이 세 가지의 원리 각각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것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역할도 합니다. 이 원리들을 따로따로 떼어놓게 되면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맙니다. 소망은 신앙이 커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은 소망을 낳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상실하기 시작하면 믿음도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믿음과 소망의 원리가 함께 뭉치게 되면 모든 것 가운데 제일인 사랑이 수반되게 됩니다. 몰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라, 영원히 견딤이요.’ (모로나이서 7:47) 믿음과 소망을 완전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원리가 함께 작용할 때, 우리는 이 원리들을 통하여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된, 시련을 비롯한 삶의 가장 험난한 문제들을 풀어 나갈 폭넓고 영원한 안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키워 주며 우리가 자기 자신과 현재 직면한 문제를 크게 염려하지 않게 해 줍니다. 소망을 통해 힘을 얻게 되면 우리는 매일매일 순종하고 그리스도인다운 봉사를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타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소망의 기쁨을 성취함”, 성도의 벗, 1993년 1월호, 33쪽)

고린도전서 14:1~6.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는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경전의 여러 곳에는 남성과 여성을 포함하여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모든 사람이 이 은사를 받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민수기 11:24~29; 니파이전서 10:17~19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영적 은사인 예언의 은사와 선지자 직분 간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명사인 예언선지자, 그리고 파생된 여러 품사, 이를테면 형용사인 선지자의와 동사인 예언하다 등은 몇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오늘날 선지자라는 단어를 들을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특정 선지자를 떠올립니다. 이런 단어는 선지자의 직분을 지니고 선지자, 선견자, 계시자로 지지받은 특정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회장만이 행사하는 신권 직분과 권능은 고유합니다. …

하지만 영적 은사인 예언의 은사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듯이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입니다. (요한계시록 19:10)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 성구를 근거로 ‘예수님에 대한 간증을 지닌 다른 모든 사람’은 선지자라고 가르쳤습니다.[History of the Church, 3:28]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3) 따라서 영적 은사에 관한 언급에서 통용되는 의미로 볼 때,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고하는 사람입니다. 경전에 나오는 의미로 볼 때, 예언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를 예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 우리 시대에 조셉 필딩 스미스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회원은 자신만의 인도를 받기 위해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한다. 바로 이 영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분의 목적을 알게 된다.’ (Church History and Modern Revelation, 3 vols., Salt Lake City, Deseret Book Co., 1953, 1:201.)

예언의 영적 은사를 지닌 여느 선지자와 선지자의 직분을 지닌 특정 선지자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Spiritual Gifts,”Ensign, Sept. 1986, 71)

고린도전서 14:2~22. 방언의 은사

오순절 날에 사도들과 그 외 사람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했다.(사도행전 2:4~8) 이날 방언의 은사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나타나, 그들은 자신들은 알지 못하나 청중이 아는 여러 언어로 복음을 가르쳤다.(사도행전 2:5~11 주해 참조) 다른 경우에 이 방언의 은사는 영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자신도, 듣는 사람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이야기함으로써 나타나기도 한다.(Bruce R. McConkie,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383 참조) 이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방언의 은사는 개인이 지닌 영성의 증거로 여겨졌기에, 고린도 교회의 일부 회원들은 이를 몹시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 오해를 바로잡으며, 그러한 방언의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지니신 권능을 증거해 주지만, 성도들을 가르치거나 교화하지는 못한다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4:19, 22, 26 참조)

이미지
자매 선교사들

일본에서 봉사하는 자매 선교사들.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방언의 은사는 선교사들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초창기에 일부 사람들은 거짓 영에 영향을 받아 예배 시간에 이상한 행동들을 했다. 그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방언를 말하고자 시도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이 신성한 권능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동안 일부 회원들은 속임수에 넘어가 이것을 성신의 현시라고 믿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런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영감 어린 가르침을 받았다.(교리와 성약 50편; 52편 참조)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방언의 은사의 목적과 사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주의를 주었다.

“이 경륜의 시대에 선지자들은 교회를 인도하기 위한 계시는 방언의 은사를 통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루시퍼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그릇되게 복제하여 교회 회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 매우 쉽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는 그것이 여러 영의 은사 가운데 하나라며 우리를 속일 능력이 있습니다. 그가 가장 많이 속이는 한 가지가 바로 방언의 은사입니다. 조셉 스미스와 브리검 영(1801~1877)은 방언의 은사를 고려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위안을 얻기 위해 방언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제가 한 가지 규칙을 정하겠습니다. 방언의 은사로 무엇인가를 가르칠 때, 그것이 교리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384쪽)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또한 통역 없이 방언의 은사로 말하지 마십시오. 악마도 방언을 말할 수 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384쪽)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 부여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교회 회원들에게 주신 모든 은사와 재능은 교회를 다스리는 목적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권의 통제와 인도에 따라 있는 것이며, 신권으로 판단을 받는다.’(Discourses of Brigham Young, comp. John A. Widtsoe [1941], 343)

방언의 은사는 선교사들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합니다.”(“Gifts of the Spirit,” Ensign, Feb. 2002, 14–15)

이미지
숫양의 뿔 나팔

숫양의 뿔 나팔.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처럼 크고 또렷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나팔을 사용하여 전쟁이나 중요한 종교 행사에 참여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바울은 이 비유를 사용하여, 고린도 성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무익하며 교회에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고린도전서 14:8~9 참조)

고린도전서 14:3~26.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고 말했다.(고린도전서 14:26)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영적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덕을 세우다[edify, 교화시키다]라는 단어의 형태를 반복해서 사용했다.(3~5, 12, 17, 26절 참조) 덕을 세움[Edifying]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oikodomēn을 번역한 것이며, 이는 글자 그대로 집을 짓는 과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교회 회원들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했다.(oikodomē; 고린도전서 3:9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거나 강화하기 위해서이다.(또한 교리와 성약 46:11~12 참조)

고린도전서 14:34~35. 여성들은 교회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34~35절에서 준 권고는 그런 권고를 하게 된 실제의 질문이나 상황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의도를 알기가 어렵다. 이 서한에서 바울이 앞서 가르친 것에 의거해 볼 때, 그는 분명히 여성이 교회 모임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고린도전서 11:5 참조) 바울은 또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모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고린도전서 14:28, 30 참조)

아마도 이 성구는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 나오는 조셉 스미스 역, 고린도전서 14:34~35절을 통해서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34절과 35절 모두 말하다는 단어가 다스리다[rule]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있다. 이 단어의 변경으로 짐작건대, 일부 고린도 여성들이 예배 모임에서 질서를 따르지 않았거나 신권 지도자들의 위치를 차지하려 했기에, 바울은 그런 상황을 바로잡고자 했을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 여성들은 가르치고, 간증하고, 권고하고, 봉사하도록 요청받지만, 신권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권세를 찬탈해서는 안 된다.(교리와 성약 25:5~7; History of the Church, 4:579 참조) 이는 감리하도록 부름받지 않은 교회의 모든 남성 회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교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하는 역할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제가 2013년 4월 연차 대회에서 말씀드린 것을 반복하겠습니다.

‘신권이 부여되는 이 위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서 남성은 신권을 베풀 고유한 책임이 있지만, 남성이 곧 신권 그 자체는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각자 하는 역할은 동등한 가치를 지닙니다. 여성이 남성 없이 임신할 수 없듯이 남성도 여성 없이는 영원한 가족을 이루기 위한 신권 권능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습니다. … 영원한 관점에서 출산 능력과 신권 권능은 모두 남편과 아내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나의 일이요, 나의 영광이니라”, 리아호나, 2013년 5월호, 19쪽)

왜 남성은 신권 직분에 성임되고 여성은 그렇지 않습니까?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은 ‘교회의 남성들이 신권을 갖도록 제정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며, 또한 여성들에게 ‘이 위대하고 훌륭한 조직, 곧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를 완전케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라고 가르쳤습니다.(“교회의 여성들”,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70쪽) 결국,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왜 그와 같이 조직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 고인이 된 저의 친구이자 사도인 닐 에이 맥스웰 장로님이 떠오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미 아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분을 신뢰하도록 가르쳐 준다.’(Deposition of a Disciple [Salt Lake City: Deseret Book, 1976], 56)

지난 4월 연차 대회에서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내가 믿나이다”, 리아호나, 2013년 5월호, 94쪽)

형제 자매 여러분, 다른 많은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결국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임을 믿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목적과 지혜에 따라 이 교회를 조직하셨음을 믿습니까? 그분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를 훨씬 능가함을 믿습니까? 우리는 그분께서 당신의 아들과 딸, 즉 모든 자녀에게 가장 위대한 축복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를 조직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 여성들은 봉사를 통해 교회의 관리와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상호부조회, 청녀, 초등회에서 지도자로 봉사합니다. 그들은 교사, 전임 선교사, 성전 의식 봉사자로 봉사하며, 그리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전해지는 조직인 가정에서 봉사합니다.”(“Let Us Think Straight” [Brigham Young University campus education week devotional, Aug. 20, 2013], 4–5; speeches.by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