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27장: 요한복음 17~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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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19장

요한복음 17~19장 소개 및 연대

요한복음 17~19장에는 속죄를 이루는 사건들에 대한 요한의 기록이 담겨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구주의 기도는 중보 기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기도에서 구주께서는 우리를 위해 중재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께 사도들과, 우리를 포함해서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다. 중보 기도에 이어, 18~19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 재판, 십자가에 못 박히심, 매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고난을 겪으신 목적에 관한 귀중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는 이들이 보호받고, 기뻐하며, 성결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속죄[Atonement](at-one-ment)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 “하나가 되게 하다”, 즉 화해시킨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8~19장에 설명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지도록 하기 위해 고난을 겪으셨다.

여러분은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대해 공부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주해는 요한복음에만 유일하게 나오거나 강조된 내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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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과 연대표

요한복음 17~19장 주해

요한복음 17장. 중보 기도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구주의 기도나 고난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에 관련 내용을 덧붙이고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는 방향으로 기록을 남겼다. 요한복음 17장에만 기록되어 있는 구주의 중보 기도는 속죄의 목적에 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보 기도가]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주님이 그의 제자들의 유익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중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기도를 인용하는 동안 세상의 구주께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사오니] …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요한복음 17:1, 4, 8~9]

주님의 이 기도에서 우리는 그분이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서 중재자요 변호인으로서의 책임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주기도문에서 배우는 교훈”,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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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의 그리스도

겟세마네의 그리스도, 해리 앤더슨

요한복음 17:3.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거듭 가르친다.(예레미야 31:31~34; 호세아 4:6; 앨마서 22:18; 교리와 성약 132:23~24 참조) 이것은 특히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주제로,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지상에 오셨음을 증거한다.(요한복음 1:18; 14:6~11; 16:25; 또한 요한복음 14:7~11; 16:25 참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존재하심을 믿거나 그분에 대해 지식적으로 아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생활함으로써 그분과 친숙한 사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그분을 아는 것 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별개이다. 그분이 인격을 가진 존재이며 그분의 형상에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배울 때, 그분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배울 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모두 특정한 속성과 권능이 있으시다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그분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들이 하시는 같은 일들을 기뻐하고 경험할 때,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그분들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그분이 느끼시는 것을 느끼고, 그분이 지니신 권능을 지니고, 그분이 이해하시는 진리들을 깨달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분과 같이 되며, 그분의 삶과 같은 삶, 즉 영생을 누리게 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1965–73], 1:762)

요한복음 17:4~8. 구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음을 보고하셨다

구주께서는 중보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자신이 지상 사명을 순종적으로 완수했다고 말씀드렸다.(요한복음 17:4~5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었다.(아브라함서 3:24) 그분은 그때 영광과 주권을 누리셨으며, 그런 후 하나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이 지구와 더불어 무수히 많은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주가 되셨다. (모세서 1:31~33) 정해진 시간이 되자 그분은 자신의 구원과 온 인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할 속죄를 이루기 위해 특별히 지정된 이 지상으로 오셨다.

속죄 희생이 이미 이루어진 듯이 말씀하는 이 기도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아들이 맡은 일을 다했음을 증언하고 그 결과로서 자신이 지녔었던 위엄과 영예의 상태가 다시 주어지기를 간구하셨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762)

요한복음 17:9~10.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정결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니파이인들 가운데 계시는 동안 요한복음 17장 9~10절에 기록된 것과 유사한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여, 저들의 신앙으로 인하여 내가 택한 자들을 정결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내가 저들과 또한 저들의 말을 믿을 자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그들도 저들이 내 안에서 정결하게 된 것같이 저들의 말을 믿는 신앙을 통하여 내 안에서 정결하게 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여,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그 신앙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오니, 그들로 내 안에서 정결하게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같이, 내가 그들 안에 있게 하시옵고,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사, 나로 그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시옵소서.”(제3니파이 19:28~29)

요한복음 17:11, 14~16. 구주를 따르는 이들은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한다

구주께서는 중보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제자들이 “세상에” 있되(요한복음 17:11)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요한복음 17:14) 말씀하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이 각각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암시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교회에서 우리는 종종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듣습니다. …

우리는 이 말을 두 가지 권고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첫째, ‘세상에 살되’, 참여하십시오. 지식을 넓히십시오. 이해심 있게 아량을 베풀며 다양성을 감사하십시오. 봉사와 참여를 통해 사회에 의미 있는 공헌을 하십시오. 둘째, ‘세상에 속하지 말라.’ 그릇된 길을 따르지 말며 옳지 못한 일을 수락하지 마십시오. …

세상이 온통 사악하다 할지라도, 우리 주위에 악이 둘러싸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녀들이 세상에서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 누룩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33) 우리는 이 세상을 개선시켜야 하며 모두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악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구주께서는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5)

교회의 회원들인 우리는 영향을 받기보다는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악의 조류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기보다는 그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문제점을 피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해결하도록 도와야 합니다.”(“텔레비전의 영향력”, 성도의 벗, 1989년 7월호, 98~99쪽)

요한복음 17:11, 20~23.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구주께서는 이 기도를 하시기 훨씬 전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0:30) 이 중보 기도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구주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따르는 이들도 “우리와 같이 …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7:11; 기울임체 추가; 또한 21~23 참조)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요한복음 17:20)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간에 존재하는 하나됨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경험할 수 있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며, 그분들은 우리가 자신들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신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분들은 뚜렷이 구별된 개체이나, 목적과 하시는 일에서 하나가 되십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과 승영을 위한 위대하고 신성한 계획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 사이의 완전한 결합으로 이 세 분이 거룩한 신회의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아버지와 아들과 성신”, 성도의 벗, 1987년 1월호, 67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하나님 아버지 및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과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처럼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권유받았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참으로 영광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

예수님은 그분의 육과 영 모두를 아버지의 뜻에 맡기심으로써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항상[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느니라.]’(요한복음 8:29)

우리가 두 분의 뜻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기 전에는 하나님 및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유순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꺼이 하려 할 경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게 될 때까지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아버지와 구속주로서 존경하고 경배하는 거룩한 분들과 하나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점에 대해 뭐라고 감사의 말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71~73쪽)

요한복음 17:12. “멸망의 자식”

“멸망[perdition]”으로 번역된 그리스어(apōleia)는 잃었거나 파멸된 존재의 상태를 가리킨다. 신약전서의 다른 곳에서는 apōleia가 “멸망[destruction]”(마태복음 7:13; 로마서 9:22), “허비[waste]”(마태복음 26:8; 마가복음 14:4), “멸망[damnation]”(베드로후서 2:3)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용어들은 가룟 유다에게 적절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가룟 유다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던 신성한 계획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기도를 듣고,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보고 그분의 손길을 느꼈던 특별한 증인 중 한 사람이, 고작 은 삼십에 그분을 배반할 수 있었음을 떠올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세계 역사상, 그만한 푼돈으로 그처럼 큰 오명을 산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유다의 운명을 심판할 자격은 없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6:24]”(“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86~87쪽)

조셉 에프 스미스(1838~1918) 회장은 유다가 멸망의 자식인가의 여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교리와 성약 76편 31~37, 43절을 먼저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멸망의 자식이 되려면 어떠한 지식을 얻은 후에 그것을 부인해야만 하는지가 설명되어 있다. “유다가 이 모든 지식을 받았으며, 이 위대한 진리들이 그에게 계시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은사로 성령을 받았으니, 그런 까닭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간주할 만한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생각건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당시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승영이든 정죄에 대해서든 충분한 빛이나 지식, 지혜를 지녔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이 열려 경전 말씀을 이해하고,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권능을 부여받은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권능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아는 지식은 이후 영의 영향력을 받아 알게 된 지식에 비해 어린아이의 수준에 불과했다.”(Gospel Doctrine, 5th ed. [1939], 433)

요한복음 17:17, 19.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거룩하게 [한다](sanctify)”라는 것은 신성하고 정결하게 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거룩한 삶을 사셨으며, 그런 후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어 우리가 그분을 따를 경우 거룩하게, 즉 성결하게 되도록 하셨다. 성결하게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죄에서 자유롭게 되고, 순수하고, 깨끗하며, 거룩하게 되는 과정”이다.(경전 안내서, “성결하게 됨”; scriptures.lds.org)

요한복음 17:26.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중보 기도를 마치면서 모든 시대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간구하셨다. 칠십인 회장단에서 봉사하던 존 에이치 그로버그 장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삶에 임하는 축복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행하거나 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행하고, 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고통을 견디고, 두려움을 없애고, 거리낌 없이 용서하고, 논쟁을 피하고, 힘을 새롭게 하며, 자신에게조차도 놀라운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잔인함, 그리고 부당함을 견디어 내셨듯이, 깊은 사랑으로 가득 차 계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을 통해 그분은 다른 방법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장애물을 딛고 일어서셨습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는 장애물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고 자신의 무한한 사랑을 취하여, 우리도 이 세상의 고통과 잔인함, 그리고 부당함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용서하고 축복하라고 권유하십니다.”(“하나님이 지니신 사랑의 힘”,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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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에서 내려다본 예루살렘 전경

상공에서 내려다본 예루살렘 전경, 성전 산 우측으로 그늘진 모습의 키드론 계곡이 보인다

사진 촬영: 리처드 엘 더블유 클리브

요한복음 18:1~6. 예수께서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분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요한은 예수께서 중보 기도를 드리고 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키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었다고 기록했다.(요한복음 18:1)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시대에 키드론 계곡에는 무덤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이 지역을 걸으신 것은 다음 성구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나이다.]”(시편 23:4)

예수께서 그 동산에서 고난을 겪으신 후, 유다는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와서(요한복음 18:3), 동산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냈다. 예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앞으로 나아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이들 앞에서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셨다. 그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하셨다.(요한복음 18:4~8) 이 표현은 그리스어 문구인 egō eimi의 번역으로, 요한복음의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요한복음 8:53~58 주해 참조) 구주께서 그 말씀을 하시자, 그 사람들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요한복음 18:6) “분명히 그들은 예수님에게 위력을 행사하도록 허락되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Bruce R. McConkie,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780) “그리스도의 겉모습에서 풍기는 소박한 위엄과 온화함과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힘은 강한 무기보다 더 위력이 있는 것임이 입증되었다.”(제임스 이 탈매지, 예수 그리스도, 616쪽) 이 자세한 기록은 구주께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을 제압할 능력이 있으셨으나 자발적으로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알려 준다. 다른 성구들에 기록된 유사한 내용을 더 보고자 한다면, 마태복음 26:51~54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8:8~9.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들에게 자신을 데려가고 제자들은 무사히 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요한복음 18:8~9 참조) 그리하여,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될 사도들의 육체적 안전이 그 즉시 확보되었다. 이 작은 일은 그때 일어나고 있던 더 큰 사건을 반영하는데, 즉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대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구주께서는 자신을 바쳐 우리 모두가 영원한 원수인 죄와 사망에서 풀려날 수 있게 하셨다.

요한복음 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언급된 “잔”이 상징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10:38~39 주해마가복음 14:36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8:13. 안나스

예수께서는 체포되신 후, 먼저 안나스에게 끌려가셨고(요한복음 18:13 참조) 그런 후에 가야바에게 보내졌다.(요한복음 18:24 참조) 예수께서 안나스 앞에 서신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주후 15년까지 대제사장이었다. 로마 당국에서 그를 그 직위에서 면직시킨 후에도, 그는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아들 중 다섯 명이 각각 서로 다른 시기에 대제사장 직분을 차지했으며, 그의 사위인 요셉 가야바는 구주께서 체포되던 당시에 그 직분을 맡고 있던 사람이었다. 안나스 가문의 부와 권력 및 탐욕에 대해서는 여러 사료에 기술되어 있다. (구주께서 다락방에서 시작하여 겟세마네, 안나스, 가야바, 빌라도 등 예루살렘의 여러 곳으로 이동하신 경로를 더 잘 알아보려면, 성경 지도 12번,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을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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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의 예루살렘 모형

사료에 따르면, 안나스와 가야바의 저택은 각각 예루살렘 성에서 위쪽에 있는 부유한 동네에 있었다. 1세기의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이 모형은 지배층이 살았던 위쪽 동네와 서민층이 거주했던 아래쪽 동네 모습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18:14. 가야바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말한 것을(요한복음 18:14) 더 잘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1:49~53 주해를 참조한다. 가야바와 대제사장 직분에 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6:57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8:15~18, 25~27. 시몬 베드로가 구주를 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또한 마태복음 26:69~75 참조)

시몬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했다는 요한의 기록은 그가 직접 목격한 일인 듯하다.(요한복음 18:15 참조) 이 기록은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통찰을 더해 준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기록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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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하는 베드로

부인하는 베드로의 부분 상세 모습, 칼 에이치 블로흐

“저는 … 마음속으로 베드로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우리는 대체로 너무나 그와 흡사합니다. 우리는 충성을 맹세하고 큰 용기를 갖겠다고 결심하고,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의를 행하고 의로운 대업을 위해 일어서며 우리 자신과 남에게 진실하겠다고 다짐하며, 어떤 때는 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압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압력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욕망일 수도 있으며, 그러한 압력은 허망한 야심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의지가 약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져서, 결국 우리는 그 압력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찾아드는 것은 후회이며, 가책과 쓰라린 눈물뿐입니다. …

이제 전 세계의 교회 회원 중에서 행동이나 말로 신앙을 부인한 분들이 계시다면 베드로의 예에서 위로를 얻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한때 예수님과 매일 동행했으나 곤경의 시간에는 주님과, 자신이 간직했던 간증까지 잠시 부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딛고 일어섰으며 마침내 신앙의 위대한 수호자요 강한 옹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사업에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성도의 벗, 1994년 8월호, 4, 7쪽)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에 대해 통찰을 더 얻으려면, 마태복음 26:69~75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8:2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을 재판에 넘기기 위해 그분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위선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방인의 건축물인 관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들이 의례적으로 불결해지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들은 이튿날 있을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원했다.(요한복음 18:28 참조)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기꺼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거짓 고소하고, 그분에게 사형이 선고되도록 애를 썼다.(마태복음 26:61~66 주해마태복음 27:11 주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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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의 예루살렘 모형

1세기의 예루살렘 모습을 보여 주는 이 모형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관정”으로(요한복음 18:28) 추정되는 공관(전경)을 묘사한다. 또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은 또 다른 장소로 추정되는 안토니아 요새도 보인다.(우측 원경)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그분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기는지를 물으며 심문했고, 이에 구주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빌라도의 추가 질문에 구주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라고 대답하셨다.(요한복음 18:36~37) 그분의 말씀은 성역 기간 내내 자신이 메시야임을 공공연하게 선언하시면서도 지상의 왕으로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신 것과 일치한다.(요한복음 6:15 참조)

구주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도 또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7:14; 또한 요한복음 15:19; 17:16 참조) 칠십인 회장단에서 봉사하던 시절에 데니스 비 노인슈안더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 왕국의 회원으로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성스럽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구주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답하셨습니다.(요한복음 18:33, 36) 이 몇 마디 말씀으로 예수님은 그분의 왕국과 이 세상을 독립적인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셨습니다. 구주의 가르침과 교리, 그리고 개인적인 모범은 그분을 진심으로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전념하여 구하는(교리와 성약 4:5; 88:68 참조) 눈과 마음이 요구되는 하나님의 표준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것보다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고 인식하며 경외하는 능력으로 규정됩니다. 정말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 없다면 우리는 오직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것들과 남게 됩니다.”(“거룩한 장소, 성스러운 곳”, 리아호나, 2003년 5월호,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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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미할리 본 문카치

요한복음 18:37. “내가 …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칠십인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때에 알렉산더 비 모리슨 장로는 구주께서 빌라도에게 하신 “내가 …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라는(요한복음 18:37)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필멸의 존재로 계셨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그분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시요, 무수한 세계의 창조주며 입법자요 심판자이신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셔서 구유에서 나셨습니까? 왜 지상 생활의 대부분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채로 살고, 유대의 먼지 나는 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까? 왜 그분은 종국에는 가장 가까운 제자 중 한 명에게서 배신당하고, 골고다의 어둠침침한 언덕에 달린 두 행악자 사이에서 죽으셨습니까? …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 없고 완전하신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한 속전으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애송하는 찬송가의 가사에는 ‘갈보리에서 예수 돌아가시어 만민 구속하셨으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Tis Sweet to Sing the Matchless Love,’ Hymns, no. 176) 바로 이것이 ‘인간을 위해 고통받고 피 흘리며 돌아가시기 위해’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최고의 이유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사람들을 그에게로 인도할 수 있도록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으로서(베드로전서 1:19)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제3니파이 27:14 참조)”(“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리아호나, 2000년 1월호, 29~30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구주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세상에 오셨듯이 우리도 필멸의 삶을 사는 데에는 목적이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속죄의 무거운 짐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8:37)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또한 이생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들을 거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경험들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경험을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이 목적을 추구할 때, 궁극적으로 이생을 사는 큰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효험을 미치사”, 성도의 벗, 1998년 1월호, 22쪽)

요한복음 19:4~16.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으나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

처음에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소송 사건에 관여하라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요한복음 18:29~31 참조) 그 후에도 예수님을 계속 풀어 주려 했다.(요한복음 18:38~40; 19:4~6, 12~15 참조) 빌라도는 11년의 임기 동안 유대 지역을 다스리면서 유대인 주민들과 관련해 골치 아픈 일들을 더러 겪었는데, 유대인 주민들과 몇 차례 격렬한 충돌을 한 적도 있었고, 로마 황제로부터 직무상의 징계를 받은 적도 한 차례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결국 군중의 요청에 굴복하고 만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빌라도는 폭동 가능성을 잠재우고(마태복음 27:24 참조) 정치적으로 불성실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을 피하고자(요한복음 19:12 참조),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의하고 말았다.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 좀 더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27:11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9:11.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빌라도든 그 누구든 구주의 생명을 취할 권한은 없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 두려워진 빌라도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요한복음 19:10)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의 정적인 위엄은 우리가 다만 상상해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요한복음 19:11)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빌라도가 그렇게 행할 권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받아들일 뜻이 있으셨기 때문에 행해진 것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느니라.]’(요한복음 10:17~18)”(“속죄, 선택의지 및 책임”, 성도의 벗, 1988년 7월호, 76쪽)

요한복음 19:14~18.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간증이 담겨 있다.(요한복음 1:29) 이제 구주의 삶이 마감되는 시점에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준비일의 제육시에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끌려가셨다고 기록했다.(요한복음 19:14~18 참조) 이에 관해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빌라도는 유월절 번제물로 근처에서 양들이 준비되고 있는 같은 시각에 하나님의 어린 양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내렸습니다.”(“이 성지에서”, 성도의 벗, 1991년 2월호, 18쪽) 유월절 어린 양이 제물로 바쳐지는 바로 그 시각에, “하나님의 어린 양”은 온 인류를 위한 궁극적인 제물이 되려고 십자가에 달리는 여정을 시작하셨다.

요한복음 19:19~24. 십자가에서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붙인 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요한복음 19:19 참조) “빌라도는 마치 여기에 모든 국가와 민족을 위한 메시지가 있음을 상징하기라도 하듯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및 라틴어로 우리 주님의 거룩한 아들에 대해 문자로 간증을 한 것이었다. 대제사장들의 수정 요청을 완강하게 거부한 그 간증은 참되며 영원히 지속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817)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요한복음 19:20) 많은 사람들이 그 패를 보았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에서 집행한 형벌이었으며, 또한 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로마제국 시대의 저자 마르쿠스 쿠인틸리아누스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십자가형을 집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죄인을 십자가형에 처할 때마다 가장 붐비는 길거리를 선택한다. 그런 장소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이 무서운 장면으로 마음이 움찔하게 된다. 왜냐하면 형벌은 범죄에 대한 응징 차원보다 본을 보이는 효과를 노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The Anchor Bible Dictionary[1992], “Crucifixion”)

구주의 옷은 군인들이 나누어 가졌다.(요한복음 19:23~24 참조) 유대인 남성들은 주로 다섯 가지 품목의 옷, 즉 머리 장식, 신발, 속옷, 겉옷, 허리띠를 착용했다. 로마제국의 관습에 따라 이런 옷은 십자가형을 집행한 군인들의 소유물이 되었다. 예수님의 경우, 그분의 속옷을 제외한 나머지 옷은 모두 십자가 앞에서 네 명의 군인들이 나눠 가졌다. 하지만 그분의 속옷은 솔기가 없이 통으로 짠 것이어서 찢어 나누기에는 너무 값진 것이었으므로, 군인들은 그 옷을 갖게 될 사람을 정하고자 제비를 뽑았다. 이 사건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는 예언을 성취하였다.(시편 22:18)

요한복음 19:25~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어머니에게 하신 감동적인 말씀이 나온다.(요한복음 19:25~27 참조) 구주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요한이 마리아를 돌보게 하셨다. 전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인 엘레인 엘 잭 자매는 구주와 그분의 어머니 간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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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부분 상세 모습

“요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가] … 섰는지라’(요한복음 19:25) 그들은 평생 그래 왔듯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요셉과 마리아가 이 가장 뛰어난 아이를 키웠던 때를 생각해 봅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얼르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엄마 여기 있단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가장 극적인 순간에도 어머니인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의 고통을 위로해 줄 수 없었지만, 아들의 곁에는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위엄 있는 말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런 다음 그 제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 19:26~27]”(“상호부조회: 길르앗의 유향”,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93쪽)

요한복음 19:28~29. “내가 목마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영적 갈증을 영원히 해소해 줄 “생수”를 제공한다고 몇 차례 가르치셨으며, 요한은 그런 내용을 기록했다.(요한복음 4:10~14; 7:37~39) 하지만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목이 마르다고 말씀하셨는데, 신 포도주만이 제공됨으로써 고대의 예언이 성취되었다.(요한복음 19:28~29; 시편 69:2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이 성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친 것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났을 때라고 증언하고 있으며, 사도 요한은 이 사건에서 예언의 성취를 목격했다.”(예수 그리스도, 661쪽)

요한복음 19:30.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는 구주의 확고한 결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에 비춰 보면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두 가지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 이전부터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구주께서는 그분의 아버지의 사업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이곳에서 행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던 그 사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의아해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요한복음 19:30]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복음 23:46] 우리는 그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신에 대한 간증을 얻음”,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31쪽)

헤일즈 장로는 또한 구주의 모범이 어떻게 끝까지 견디는 방법을 보여 주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견디어 내고, 인류를 위해 성취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을 택하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라는 짧은 말씀과 함께 그의 영을 아버지에게 맡겼습니다. 끝까지 견디신 후에 그분은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몰몬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본을 따르며 끝까지 견디지 아니할진대 구원받을 수 없도다.’(니파이후서 31:16)”(“침례 성약: 왕국 안에 있으며 왕국에 속해 있음”,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6쪽)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이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한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며 이르시되, 아버지여 이제 끝났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졌나이다 하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27:54)

요한복음 19:26~30.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또한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누가복음 23:34, 43, 46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은 여러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 도표는 그 각각의 말씀과 그 말씀이 나오는 성구의 위치, 그 말씀들에 대한 주해의 위치를 안내한다.

참조 성구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2~43

요한복음 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 19:25~27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요한복음 19:28.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29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누가복음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요한복음 19:31~37. 메시야에 대한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다

마태와 마가가 구주의 죽음이 특정 예언들을 성취했음을 지적한 반면(마태복음 27:35; 마가복음 15:28 참조),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언급하지 않은 두 가지 세부 내용을 기록했다.

첫째, 예수님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 군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희생자들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 다리뼈를 부러뜨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지만, 예수님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 그들은 유월절의 상징 중 중요한 부분을 성취했다. 구약의 여호와께서는 구주를 상징하는 유월절 양의 뼈를 하나도 꺾어서는 안 된다고 명하신 바가 있었다.(출애굽기 12:46; 민수기 9:12 참조) 이는 또한 시편 34편 20절에 나오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는 창으로 찔러졌다. 이 일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스가랴 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