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1장: 신약전서 소개


1

신약전서 소개

소개 및 연대

신약전서는 27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각 책의 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이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과 속죄,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등장에 대해 가르치고 증거한다. 성경, 즉 구약전서와 신약전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엘 톰 페리 장로는 신약전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삶에서 구주가 가장 중요한 분이 되셔야 하는 것처럼 이 거룩한 책도 경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입니다. 최선을 다해 그 책을 공부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안식일과 성찬”, 리아호나, 2011년 5월호, 6쪽)

이번 장에는 구약전서와 신약전서 사이의 시대를 설명하는 간단한 개관, 특별히 구주의 필멸의 생애 마지막 주간이 강조되어 있는 사복음서 내용에 대한 짧은 요약, 신약전서가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역사, 조셉 스미스 역에 대한 소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와 그 회원들에게 신약전서가 왜 중요한지를 알려 주는 말씀 발췌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미지
제1과 연대표

해설

구약전서와 신약전서 사이의 기간

구약 시대의 끝과 신약 시대의 시작 사이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알면 신약전서에 나오는 인물과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은 바사, 헬레니즘, 하스몬, 로마 시대로 나눌 수 있다.

바사 시대. 주전 539년경,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주전 606년부터 586년 사이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유대 지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에스라 1장; Bible Dictionary, Cyrus,”Persia 참조)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간 유대인들은 아람어도 함께 가져갔다. 신약 시대까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를 구어로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바사 통치자들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였다.(주전 516년경) 바사 시대에 구약전서의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기록되었다. 구약전서 마지막에 나오는 말라기는 주전 430년경에 선지자 말라기가 기록한 경전이다. 말라기 이후로 서기관과 (아론 신권의 대제사장이 이끄는) 성전 제사장, 랍비들이 점차 선지자들을 대신하는 유대인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 유대 지방은 알렉산더(주전 336~323년) 대왕이 정복한 곳 중 하나였다. 그리스 문명의 영향은 유대인들의 땅에도 흘러들어 왔다.(Bible Dictionary, Alexander 참조) 많은 유대인이 유대 땅을 떠나 그리스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대인의 분산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중해권 전역에 유대인 공동체와 회당들이 있었는데, 이는 훗날 주후 1세기에 기독교 전파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Bible Dictionary, Diaspora,” Dispersion 참조) 헬레니즘 시대에 세리와 일당을 받는 품꾼 같은 새로운 직종이 유대인 사회에 스며들었다. 유대인의 통치 공회인 산헤드린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주전 3세기에는 구약전서가 당시 지중해권의 공통어인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칠십인역 성서로 알려진 이 번역본은 신약 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경전이다. 신약전서에서 볼 수 있는 구약전서의 인용문은 대부분 이 칠십인역 성서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유대인 경전의 그리스어 번역본은 이방 세계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귀중한 역할을 한 것으로 훗날 증명되었다. 유대인의 종교가 문명 세계로 전파된 것은 이 번역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Bible Dictionary, Hellenists,”Septuagint 참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주전 323년) 이후, 그의 장군들은 서로 제국을 차지하려고 싸웠다. 셀레우코스 니카토르가 시리아, 소아시아(터키), 그리스 지역을 차지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장악했다. 유대 지방은 이 두 라이벌 왕국의 사이에 있었고,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양쪽의 지배를 번갈아 가며 받았다.

하스몬 시대.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 안티오코스 4세(셀레우코스 니카토르의 후손)는 주전 175년부터 유대 지방을 다스렸다.(Bible Dictionary, Antiochus Epiphanes 참조) 그는 이 지역을 완전히 그리스화하면 왕국의 안정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를 전면 금지시켰고, 안식일 준수나 할례도 금하게 했다. 토라[모세오경]를(Bible Dictionary, Torah 참조) 소지하거나 읽는 자는 사형에 처하게 했다. 예루살렘에서는 돼지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성전 제단을 모독했고, 그 위에 이방 신들을 모시는 제단까지 만들었다. 이 극악무도한 행위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계산된 조치였으나 이 일은 오히려 유대인 사회의 분노를 불러왔다. 이에 대항하여, 주전 167년에 하스몬 가문의 출신인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도하는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마카비 반란으로 불린다.(Bible Dictionary, Maccabees 참조) 주전 165년, 마카비 세력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재헌납했다. 신약전서에 언급된 수전절(봉헌절, 하누카)은 이 기념비적인 사건을 기리는 명절이다.(Bible Dictionary, Feasts 참조) 마카비 지도자들은 무려 440년 만에 유대인의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다. 맛다디아의 아들인 시몬 마카베우스는 대제사장이자 유대 지방의 통치자가 되어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

이미지
바위 사원

현대 예루살렘의 바위 사원

사진 촬영: 티모시 엘 태거트

로마 시대. 시간이 흐르면서 하스몬 왕가의 지도부는 부패한 정치 조직으로 타락했다. 주전 63년, 하스몬 가문의 두 형제가 권력 다툼을 하고 있던 때에 로마의 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침공했다.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경전 안내서, “로마 제국” 참조) 예수 그리스도 탄생 당시, 로마 당국에서 임명한 유대 지방의 통치자는 헤롯 대왕(주전 37~4년)이었다. 메시야의 탄생 소식에 위협을 느낀 그는 베들레헴에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마태복음 2:1~18 참조) 강력하고 무자비한 지도자로 백성에게 인기가 없었던 헤롯은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켜 민심을 얻으려 했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은 헤롯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기간에도 이어졌다.(Bible Dictionary, Herod,”Temple of Herod 참조) 주후 4년에 헤롯이 죽자 그의 영토를 세 아들이 나누어 차지했다. 그들은 그리스어로 “분할된 한 지역의 영주”를 뜻하는 분봉왕이 되어 통치했으나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정식 왕은 아니었다. 그중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기간 중 가장 자주 언급된 헤롯이 바로 그이다.

헤롯 대왕의 아들 중 한 명이 파직된 후, 주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지도자들은 유대 지방의 통치자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praefectus[도지사]로 불리다가 글라우디오(주후 41~54년) 황제 때부터는 procurator[지방 행정 장관]으로 불리게 된다.(사도행전 11:28 참조)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어 주후 36년까지 통치했다.

신약 시대 내내 아론 또는 레위 신권의 공식 수장인 대제사장 직분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부패한 사람들이었다. 하스몬 시대 동안 이 직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4세의 통치 기간에 대제사장 직분은 가장 큰 금액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팔렸고, 헤롯 대왕은 그 직분을 부차적 역할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로마인 총독들이 부임하면서 대제사장에게 더 큰 권력을 부여했다. 그들은 친로마 귀족 세력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인이실 때,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 그는 안나스의 사위였다.(요한복음 18:24 참조) 안나스는 주후 6~15년에, 가야바는 주후 18~36년에 대제사장이었다. 안나스는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며, 그의 여러 아들이 대제사장 자리에 올랐다.

로마 시대는 일반적으로 주후 324년에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은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는 수많은 유대인의 강한 열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세기에 걸쳐 정복과 굴욕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오직 메시야만이 자신들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적 존엄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바람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신약전서의 배경

다음 용어의 기본 뜻을 이해하면, 신약전서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메시야. 아람어 및 히브리어 단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들은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과 성별을 받았음을 뜻했다. 결국 메시야라는 단어는 다윗의 혈통으로 언젠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올 이스라엘의 특정한 왕을 뜻하는 말이었다. 메시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크리스토스이며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파생되었다. 신약 시대에 사람들은 장차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갈릴리. 갈릴리 바다의 북쪽과 서쪽에 접해 있는 예루살렘 북쪽 지역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지상 성역 대부분을 가버나움, 가나, 벳새다, 나인 등과 같은 갈릴리 지방의 여러 고을에서 지내며 가르침을 전하셨다.

유대. 사해 서쪽 지역이며,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다. 이 지역은 갈릴리와는 달리 처음에는 구주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유대인 지도자, 즉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그러했다.

사마리아. 요단 강 서쪽 지방으로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주전 8세기경 앗수르인들에게 멸망당한 후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이 지역에 정착했다. 사마리아인이 그들의 후손이다.(열왕기하 17:24~41 참조)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감은 바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 지방과 갈릴리 지방을 왕래하는 유대인은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요단 강 부근으로 길을 돌아서 갔다.

바리새인. 독실한 유대인 무리로 그들의 이름은 분리주의자를 나타낸다. 그들은 특히 이방인의 불순한 것들을 엄격히 피했다. 바리새인은 모세 율법과 유대인의 관례를 엄격히 준수하기를 추구했다. 그들은 구전된 전통의 권위를 경전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들었다.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주동 세력이었다.

사두개인. 하스몬 시대에 명성을 얻은 귀족 가문, 대제사장 가문 출신의 최상위 계층이다. 그 수가 비교적 적었음에도 이들은 상당한 권력이 있었고,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신 것에 반발했다. 그들은 그 일로 자신들의 권위가 모욕당했다고 여겼다. 이들은 성문화된 모세 율법에 명시되지 않은 전통과 믿음은 거부했는데,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 및 다른 많은 유대인들과 달랐다. 특히 그들은 천사, 불멸, 심판, 부활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다. 그들이 구주에 대해 품은 적대감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산헤드린. 그리스어인 이 용어는 “공회”를 뜻한다. 유대인이 생활했던 여러 지역에 다수의 산헤드린이 있었다. 그러나 이 용어(또는 영어의 “council”)가 신약전서에서 다른 설명 없이 나올 때는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대 산헤드린[Great Sanhedrin]을 뜻하는 것이다. 이 유대인 공회는 유대 국가의 내부 사안을 관장했다. 산헤드린은 70명의 회원과 의장인 대제사장[high priest] 한 명으로 구성된다. 이 공회의 회원은 대제사장들[chief priests],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장로들과 같은 유대인 사회의 최상위 계층에서 배출되었다. 정치 권력은 로마 당국이 계속 쥐고 있었지만, 산헤드린이 유대인들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유대 지방의 종교적 율법에 대한 관할권도 그들이 행사하도록 허용되었다.

서기관. 기록 보관과 경전의 필사를 생업으로 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은 점점 늘어나는 회당들에 경전을 공급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회당. 회당은 유대인 회중이, 또는 일반 유대인들이 안식일, 축일, 또는 기타 성스러운 날에 모여서 기도와 예배를 드리던 건물을 지칭한다. 회당 설립은 바벨론 유수 기간 및 신구약 시대 사이의 기간에 주님의 성전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주님을 예배할 방법을 찾던 시절에 활발히 이루어졌다. 신약 시대의 몇몇 회당의 유적지가 발견된 바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여러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했다.

경전.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경전은 때로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율법서”라고도 알려진 토라는 모세오경(구약전서의 첫 다섯 책)으로 구성된다. 예언서는 선지자들에 관하여, 또 선지자들이 작성한 책들의 모음을 지칭한다. 예언서에는 여호수아에서 열왕기하에 이르는 역사서들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열두 명의 “소선지자”(호세아에서 말라기)가 남긴 책들이 포함된다. 성문서에는 시가(시편, 잠언, 욥기), “두루마리 5권”(아가, 룻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에스더)과 다니엘서, 그리고 역사서인 역대상과 역대하가 포함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과 속죄에 대한 간증으로 쓰인 복음서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신약전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신약전서에는 … 고대의 약속들이 성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약속된 메시야의 탄생과 성역, 속죄 희생이 언급되어 있고, 구주의 영원한 복음에 대한 구원의 교리가 설명되어 있다. 또한 절정의 시기에 복음의 대업이 성장하고 팽창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와 더불어 한때 성도들에게 전해졌던 신앙을 그들이 버리는 대배도가 예언되어 있으며, 마지막 날에 있을 영광스러운 복음의 회복이 약속되어 있다. 그리고 인자의 재림 때, 또한 그 전후에 있을 사건들이 생생하고 극적으로 예언되어 있기도 하다. 신약전서의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A New Witness for the Articles of Faith [1985], 392)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간략하게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 그분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간증으로서 기록되었다.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하루하루 있었던 일들을 밝히기보다는 구주의 필멸의 생애와 성역의 맥락에서 그분의 속죄에 대한 사명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식적인 성역은 약 3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복음서에서 구주의 생애에 있었던 특정한 날을 다룬 경우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요한은 복음서 저자들이 내용을 신중하게 선별해서 기록으로 남겼다고 말했다.(요한복음 21:25 참조)

당신 자녀들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으로 하는 만큼, 마태와 마가, 누가, 요한이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부활 등 속죄의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감받은 복음서 저자들은 신중한 서술을 통해 이 성스러운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필멸의 성역에서 어떻게 중심이 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요한이 기록한 그대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1)

사복음서 저자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 개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다른 복음서와 공통되는 내용*

58%

93%

41%

8%

이 복음서에만 있는 내용*

42%

7%

59%

92%

주요 독자

유대인

로마인

그리스인

예수 그리스도 교회 회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

왕이신 그리스도, 예언의 성취

그리스도, 고난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사람의 종

그리스도, 온 인류의 구주

그리스도, 신성한 하나님의 아들

구주의 생애 마지막 주에 대한 집중 조명

8개의 장, 21~28장

6개의 장, 11~16장

6개의 장, 19~24장

10개의 장, 12~21장

구주에 대한 간증의 예

마태복음 1:21~23; 8:16~17; 21:1~9; 27:54

마가복음 1:1; 4:41; 8:27~31;10:45; 14:61~62; 15:2~39

누가복음 1:1~4, 35; 2:10~11; 24:5~8, 25~32, 44~48

요한복음 1:1~4, 14; 5:36~39; 8:12, 58; 18:36~37; 20:30~31

  • 백분율 출처: Robert L. Millet, “The Testimony of Matthew,” Studies in Scripture, Volume Five: The Gospels, ed. Kent P. Jackson and Robert L. Millet (1986), 49

개관표의 첫 두 줄은 마태, 마가, 누가가 동일한 내용을 많이 공유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마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다소 유사한 내용이 나오며 문체에서도 상당 부분 공통점이 발견되고, 주요 요점도 비슷하다. 그래서 때로 이 책들은 ‘공관복음서’(같은 관점에서 본다는 뜻)로 불린다. 하지만 각 복음서에는 고유하면서도 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상당한 세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요한의 기록은 단어와 문체, 사건 제시 면에서 다른 세 복음서들과 분명한 차이점을 보인다.”(Bible Dictionary, Gospels)

신약전서 기록의 정경 채택

현존하는 신약전서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주후 2세기 전반부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약전서의 책 중에 저자의 자필 원고, 즉 저자가 직접 쓴 원본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신약전서의 책 중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주후 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약전서 전권 모음집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의 것이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배도는 사도들이 생존해 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사도행전 20:29~30; 고린도전서 1:10~13; 갈라디아서 1:6~8; 베드로후서 2:1~3; 요한3서 1:9~10; 유다서 1:3~4, 18~19 참조) 사도들의 죽음으로 사도의 권세가 지상에서 거두어진 후, 즉 신권 열쇠들이 사라진 후, 배도는 가속화되었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다양한 기독교도 단체가 자신들의 믿음이 성서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다양한 필사본의 신빙성과 가치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자 기독교인들은 신뢰할 수 있는 기독교 기록 모음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일부 기록은 신빙성이 있었지만 의심의 여지가 있는 기록들도 있었으며, 어떤 기록은 다른 것들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3세기와 4세기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떤 기록들을 인정된 성서 정경에 포함시킬지를 결정했다. 이 결정은 그 기록이 사도의 것으로 알려진 것인지의 여부, 기독교 사회의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지지, 그리고 거짓 가르침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기준으로 했다. 이러한 기준에 입각하여 주후 367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현재 신약전서에 포함된 27개 책의 목록을 제안했다. 이 모음집은 주후 397년에 제3회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이미지
파피루스 모형

그리스의 파피루스 코덱스 모형

1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은 관례적으로 구약전서를 기록했던 방식인 두루마리 형태가 아니라 코덱스 형태로, 즉 낱장을 제본한 “책”의 형태로 신약전서 사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현재의 성경과 같은 책 모음집이 나오게 된 한 가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Bible[성경]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biblia에서 나왔고 문자 그대로 “책들”이라는 뜻이다. 코덱스 형태로는 다수의 책들을 묶어 한 권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가장 오래된 신약전서 전권 모음집은 주후 4세기에 제작된 코덱스 시나이티쿠스이다.

성경의 번역

신약전서를 구성하는 27개의 책이 정경으로 채택되자, 이 책들은 번역과 체계적인 정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이 되었다. 다음은 역사상 중요한 몇 가지 성경 번역에 대한 개관이다. 이 개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성경을 온 세상에 내놓는 일을 해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했다.(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경전의 축복”,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32쪽)

불가타 성경: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번역본. (라틴어로 vulgate[불가타]는 “공통된”이라는 뜻이다) 북아프리카와 같이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경전을 가져가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면서, 그리스어 칠십인 역 성경(구약전서)과 신약전서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면밀한 검사를 거치지 않았기에 개별 번역본마다 많은 변조와 일치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를 낳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 다마수스가 주후 383년, 자신의 서기이자 그리스어 및 라틴어에 능통한 학자였던 히에로니무스에게 라틴어 번역본을 새로 펴내게 했다.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의 불가타 번역본 신약전서 서문에 다마수스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을 포함시켰는데, 그 내용 중에는 새 번역본 제작의 문제점을 토로한 부분도 있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신앙의 근간을 라틴어 성경에 두려 한다면, 아마도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떤 원문을 사용해야 하는지 왈가왈부할 것입니다. 여러 사본이 존재하는 만큼 각기 다른 형태의 원문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만약 우리가 많은 본문을 비교해 가며 그 안에서 진리를 찾아 모으려 한다면, 차라리 그리스어 원전으로 돌아가서 그 안의 실수들을 바로잡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부정확한 번역자들의 실수와 무지하면서도 독단적인 비평가들이 어리석게 변경시킨 부분들, 더 나아가 깨어 있기보다는 잠든 것에 가까운 필사자들이 집어넣거나 바꿔 버린 모든 것을 말입니다.” 히에로니무스의 글에는 조셉 스미스가 조셉 스미스 역 성경을 만들 때 봉착했던 어려움과 같은 문제가 설명되어 있다.

불가타 성경으로 알려진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경은 결국 다른 모든 번역본을 밀어내고 거의 천 년 동안 서구 세계의 성경이 되었다. 불가타 성경은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공식 허가를 받았다. 이 성경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북방의 야만성에 맞서 유럽의 영적, 지적 유산을 보존하는 표준이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루터 성경: 마틴 루터의 독일어 번역본. 성경의 독일어 번역 역사는 주후 348년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 사제였던 불필라(때로 울필라스로 알려짐)는 고트족 족장의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독일을 떠나 현재의 불가리아 북부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불필라는 그리스어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했다. 그의 번역본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는 상당수의 독일어 기독교 단어가 확립되었다.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에 여러 권의 독일어 성경이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판본은 마틴 루터의 독일어 번역본이었다. 독일인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루터가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당한 사건은 개신교 종교 개혁의 불을 당겼다. 루터는 경전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교회의 많은 관행에 반대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신뢰할 수 있는 권위의 근원은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1517년, 자신은 교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식 선언한 마틴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1522년에 신약전서 번역을 마쳤고 1534년에 완역본 성경을 출판했다. 이처럼 성경을 독일어권 민족의 토착어로 번역한 것은 종교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꼽힌다. 이 번역은 독일인에게 성경을 접할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종교와 문학에 쓰이는 독일어를 표준화했으며, 국가적 화합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기여했다. 독일어 성경이 독일어에 미친 영향은 흠정역 성경이 영어에 미친 영향에 비견할 수 있다. 루터의 성경은 또한 결과적으로 흠정역 성경이 나오게 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1984년 개정판 루터 성경은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여러 언어로 번역된 신약전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중에는 마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셉 스미스는 신약전서의 일부 성구들에 대해 여러 번역본을 비교하였고, 루터의 번역이 매우 훌륭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History of the Church, 6:307)

존 위클리프의 영어 번역본. 마틴 루터 시대로부터 한 세기 반 전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선구적으로 착수한 사람은 존 위클리프였다. 당대의 독보적인 학자였던 그는 경전을 사랑했고,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공통적으로 경전에 무지한 것을 염려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는 점점 교회에 환멸을 느꼈다. 위클리프는 사람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성경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존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율법”을 국민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어로 제공하기 위한 힘겨운 작업을 시작했다.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던 위클리프와 그의 동료들은 1380년에 영어 신약전서를 완성하고, 1382년에 구약전서 일부에 대한 번역본을 완성했다. 하지만 위클리프 사후 약 30년 뒤, 그는 이단자로 매도되었다. 1432년에는 교황 마틴 5세의 명령으로 그의 유골을 파내어 그 재를 흩뿌리기까지 했다. 롤라드파로 불린 위클리프 학설의 신봉자들 또한 그의 사후에 오랫동안 핍박을 받았다.

윌리엄 틴들의 영어 번역본. 위클리프의 선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어권 주민들이 널리 성경을 접하게 된 것은 “영어 성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틴들의 시대에 와서였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틴들의 공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항해할 무렵 영국에서 태어난 틴들은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한 후,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라틴어를 비롯한 여덟 개 언어에 능통했습니다. 틴들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으며,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경전에 몹시도 무지한 것을 보고는 깊은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평민에게 경전을 주는 것에 반대하는 한 성직자와 벌인 격한 논쟁에서 틴들은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신다면 나는 몇 년 안에 쟁기질하는 소년이 당신보다도 경전에 대해 더 많이 알도록 만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틴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따를 수 있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준비하겠다고 교회에 허가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요청은 거절당했습니다. 당시에는 성직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경전을 직접 접하게 하는 일은 교회의 권위를 위협하며 ‘진주를 돼지 앞에’(마태복음 7:6) 던지는 격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틴들은 힘겨운 번역 작업을 감행했습니다. 1524년, 틴들은 신분을 숨긴 채 독일로 들어갔고, 계속되는 체포 위협을 피해 상당 기간 동안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틴들은 헌신적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영어로 번역한 신약전서를 출간했습니다. 나중에는 구약전서도 출간했습니다. 틴들이 번역한 성경책은 영국으로 몰래 들여보내졌고, 이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의 손에 전해지면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책을 비밀리에 돌려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당국은 그 책을 찾는 대로 불태웠습니다.”

1535년, 틴들은 이단 행위와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벨기에 브뤼셀 가까이에 있는 어느 성의 지하 감옥에서 일 년 반 동안 수감되었다. 어두운 지하 감옥은 춥고 적막한 곳이었다. 1536년 10월 6일, 그는 성 밖으로 끌려나가 기둥에 묶였다.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큰 소리로 ‘주님, 영국 왕이 눈을 뜨게 하소서’ 하고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곧이어 목을 조르는 처형이 집행되었고 시신은 그 자리에서 불태워졌습니다. …

그러나 틴들이 사망하고 3년이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 아버지는 헨리 8세의 눈을 뜨게 하셨고, 당시에 ‘대성경(Great Bible)’이라 불리던 성경이 편찬되어 영어로 된 경전이 대중에게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틴들이 만든 번역본은 그 이후에 나온 거의 모든 영문 성경의 토대가 되었으며, 그중 하나가 바로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입니다.”(“경전의 축복”,리아호나, 2010년 5월호, 32쪽)

틴들의 성경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영어 번역본 성경이며, 동시대에 발명된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혜택으로 널리 보급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었다.

이미지
성경

흠정역. 1604년에서 1611년까지, 약 50명의 번역자들로 구성된 팀이 영국의 왕 제임스 1세(1566~1625)의 명에 따라 성경을 영어로 새롭게 번역했다. 이 번역본은 킹 제임스 역, 때로는 흠정역 성경으로 불린다. 번역자들은 틴들의 성경을 사용했으며, 그와 더불어 다른 유용한 자료, 즉 성경의 다른 영문본들과 스페인어, 불어, 독일어 및 이태리어 성경,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자료 및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성경의 필사본들을 참조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번역본은 루터의 성경이 독일어에 그러했듯 영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공부하고 사용한 성경도 흠정역 성경이었다. 흠정역 성경의 단어와 문체는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 전체에서도 관찰된다.(교리와 성약 1:24 참조) 흠정역 성경의 가치는 회복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1992년 8월, 당시 교회의 제일회장단이었던 에즈라 태프트 벤슨, 고든 비 힝클리, 토마스 에스 몬슨은 흠정역 성경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다른 성경 번역본들이 흠정역에 비해 읽기 쉬울지 모르나 교리적인 측면에서 후기의 계시는 다른 영어 번역본들보다 흠정역을 지지한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모든 선지자들은 교회에서 흠정역 성경을 계속 사용할 것을 장려하며 이를 지지하였다. 이러한 모든 이유를 기반으로, 흠정역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사용하는 영어 성경이다.”(First Presidency Statement on the King James Cersion of the Bible”,Ensign, Aug. 1992, 80)

레이나 발레라 스페인어 번역본. 이미 1490년에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사복음서가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1543년, 신교도인 프란치스코 데 엔지나스가 신약전서 전권을 번역하였는데, 그 번역에 왜곡된 해석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그는 투옥되었다. 1569년, 까시오도로 데 레이나는 성경 전권을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레이나는 수도사였지만 종교 개혁가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많은 다른 종교 개혁가들과 성경 번역자들처럼 그도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1564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는 레이나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레이나는 거의 평생을 망명자로 살았다. 레이나의 동료인 치프리아노 데 발레라는 20년 동안 레이나의 번역본을 수정하고 개선하는 데 힘썼으며, 그가 일흔이 되었던 1602년에는 레이나 발레라 번역본으로 알려진 성경을 출간했다. 이 번역본은 스페인어 성경의 고전이 되었다. 이 책은 스페인어 경전을 이해하는 데 영어의 흠정역 만큼이나 중추적 역할을 해 왔다. 수세기 동안 레이나 발레라 성경은 수차례 개정 과정을 거쳤다. 레이나와 발레라는 “스페인에 모국어로 된 성경을 선사하겠다는 고귀한 목표를 가슴에 품은 두 사람”으로 영예롭게 기억되고 있다.(Eduardo Balderas, How Scriptures Came to Be Translated into Spanish,”Ensign, Sept. 1972, 27)

2009년,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지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후기 성도판 레이나 발레라 성경을 발간했다. 새로워진 언어에 더하여 새로운 머리말, 각주, 교회의 모든 표준 경전과 이어지는 상호 참조, 지도 및 그 밖의 학습 보조 자료들이 추가되었다.(“교회, 스페인어 후기 성도판 성경 출판”,리아호나, 2009년 9월호, 교회 소식, 3~4쪽)

이미지
스페인어 성경

성경, 레이나 발레라 역, 스페인어 후기 성도판 성경, 2009년 출판.

성경의 기적적인 속성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성경의 기적적인 속성에 관해 설명했다.

“4,000년에 이르는 종교적, 세속적 역사가 선지자와 사도, 영감받은 성직자들에 의해 성경에 기록되고 또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힘찬 교리와 원리, 시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역과 말씀이 중세 암흑기를 거쳐 수많은 세대에 걸친 분쟁 속에서도 보호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기적입니다.

성경이 문자 그대로 개종과 그리스도의 치유의 영을 그 페이지마다 담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옳은 길을 선택하고, 구주를 찾도록 인도하며 수세기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왔다는 것도 기적입니다.

성경은 그 이름처럼 성스러운 경전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가르치기에 성스럽고, 그 영으로 감동을 주기에 성스러우며,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그분께서 인간들에게 베푸신 것을 이해하도록 돕기에 성스럽습니다. 또한 그것은 페이지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 성스럽습니다.”(“성경의 기적”,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80쪽)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와 성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성경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며 개인 공부에서 성경을 간과하지 말라고 독려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을 지탱하는 기둥들 중 하나요, 구주의 강력한 증거이며, 그분을 예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우리가 성경과 그 가르침을 읽고 연구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에 대한 교리적 토대를 더욱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을 함께 보낸 경전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경전을 사랑하고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균형 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 여러분, 성경을 도외시하거나 그 가치를 경시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주님의 생애에 대한 거룩하고 신성한 기록입니다. … 그것은 모든 기독교계의 반석입니다. …

저는 이 교회의 성경에 대한 믿음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우리의 입장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교회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입니다. 여기 이 건물에서 있었던 지난 연차 대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을 거의 200번이나 인용했습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께서 신약시대에 세웠던 그 교회와 같이 조직되고 또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경을 통해 밝혀 주신 그분의 말씀을 참되고 충실히 믿는 사람들임을 엄숙히 간증드립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의 교훈을 따르고 그 메시지를 가르치려 노력합니다.”(“성경의 기적”, 82쪽)

조셉 스미스 역 성경

경전 안내서에는 조셉 스미스 역(조성)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1830년 6월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영어로 된 흠정역 성경의 개정 또는 번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번역을 하였으며 그것을 선지자로서의 그의 부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1833년 7월에 비록 조셉이 거의 모든 번역을 끝냈지만, 그는 출판을 위해 원고를 준비하는 동안 수정을 하기 위해 1844년 그의 사망 때까지 작업을 계속하였다. …

선지자는 번역하는 동안에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번역 작업 때문에 ((교성 76, 77, 91편 … 같은) 교리와 성약의 여러 편(및 교리와 성약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계시들)을 받았다. 또한 주께서 조셉에게 번역을 위해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는데, 이것들은 교리와 성약에 기록되어 있다(교성 37:1; 45:60~61; 76:15~18; 90:13; 94:10; 104:58; 124:89). 현재 값진 진주에 포함되어 있는 모세서와 조셉 스미스—마태는 조셉 스미스 역으로부터 직접 발췌한 것이다. … 조셉 스미스 역은 성경에서 잃어버린 간결하고 진귀한 것들 가운데서 몇 가지를 회복시켜 주었다.(니파이전서 13~14장 참조)”(경전 안내서, “조셉 스미스 역”)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조셉 스미스 역 성경이 “경전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부분의 하나”라고 말하며, 그러므로 “그것이 나올 때마다 주목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Scripture Reading,” Plain and Precious Truths Restored, ed. Robert L. Millet and Robert J. Matthews [1995], 13)

조셉 스미스 역 발췌문은 경전 안내서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