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위대한 행복의 계획


“위대한 행복의 계획,”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68–73

“위대한 행복의 계획,” 세미나리를 가르침, 68–73

위대한 행복의 계획

교리와 성약과 교회사 심포지엄에서 종교 교육자들에게 전한 말씀, 브리검 영 대학교, 1993년 8월 10일

며칠 전에 저는 윌리엄 이 베렛 회장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회장님은 아직 병원에 계셨습니다. 이제는 편안히 쉬고 계십니다. 가까운 미래에 있을 그분 생애의 졸업식을 고대하며 쉬고 계십니다.

언젠가 그분은 터틀 형제님과 저에게 솔트레이크밸리 남부가 아직 농촌이었을 때 거기서 십 대 시절을 보낼 당시 그곳 와드의 청소년들은 한 마디로 망나니들이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와드나 반의 청소년들처럼 말입니다. 그때는 세미나리가 막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걱정스러웠던 감독님은 청소년들을 가르치도록 한 형제님에게 부름을 주셨습니다. 베렛 형제님은 그 교사가 유럽에서 온 연로한 개종자로, 영어가 서툴렀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부름을 주지 말아야 할 만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노인이었습니다. 그것도 또 한 가지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감독님은 그분에게 부름을 주었습니다.

베렛 형제님은 그 반에 대해 들려주셨습니다. 처음에 반원들은 교사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베렛 형제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그 시절을 이런 묘사로 결론 지었습니다. “우리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문장은 엉터리 영어였지만 그분의 신앙의 불길은 우리의 손을 녹여줄 만큼 따뜻했습니다.” “그분의 신앙의 불길은 우리의 손을 녹여줄 만큼 따뜻했습니다.” 베렛 형제님은 그 이후로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일들에 그 교사가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교회 교육에 가까이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맨 처음부터 세미나리와 종교 교육원 프로그램의 거의 모든 개척자들을 개인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분들은 제 인생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공헌을 해 주셨습니다.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상에 만연한 가치관의 위기와 그 심각한 영향이 교회의 많은 회원들에게 미치고 있음을 아십니다. 청소년들을 다룰 때 그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도 아십니다. 모사이야가 이렇게 말했던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이렇게 되었나니 자라나는 세대 중 베냐민 왕이 그의 백성에게 말할 때, 어린아이여서 베냐민 왕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자가 많더니, 그들이 그 조상들의 전통을 믿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해서도 믿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제 그들의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었던지라, 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졌더라.”(모사이야서 26:1~3)

나중에 앨마는 적그리스도인 코리호어를 만나고, 조램인들의 배도도 목격합니다. 제 생각에 그런 일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부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교회 안에 비판과 도전, 배도의 감정을 지닌 사람들의 문제를 드러내는, 연달아 일어난 여러 사건을 깊이 우려하던 중, 저는 어떤 느낌을 계시로 받았습니다. 그 느낌은 강하고 분명했습니다.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왜입니까? 왜 우리가 이렇게도 단합해야 할 시기에?”라는 의문이었는데, 주어진 응답은 “그것이 허락되는 이유는 채로 치기 위함이며, 이는 교회에 오직 미미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였습니다.

앨마는 코리호어와 조램인들의 배도를 접했지만, 무엇을 행해야 할지에 대한 의심은 없었습니다. 기록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또 이제 말씀의 전파가 백성을 인도하여 의로운 일을 하게 하는 큰 경향이 있으므로-참으로 그것은 칼이나 그들에게 일어났던 다른 어떠한 것보다, 백성들의 생각에 더 강력한 효과가 있었더라-그리하여 앨마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였더라.”(앨마서 31:5)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였더라.”

각 복음 교리는 경전 한 곳에 다 설명이 되어 있거나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한 조각씩 이곳 저곳에서 모아야 합니다. 때로 큰 덩어리로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개 여러 장과 절에 작은 조각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침례에 관한 모든 참조 성구가 각 표준 경전의 한 장에 모두 모여 있고, 계시에 대한 성구도 또 다른 한 장에 모여 있다면 복음을 배우는 것이 훨씬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경전이 그 모습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경전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에 진리를 끝없이 조합할 수 있으며, 모든 상황에 처한 모든 개인의 필요 사항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 군복무를 하며 몰몬경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구했을 때 저는 당시의 단순한 참조 성구들과 각주에 익숙해졌습니다. 몰몬경 앞쪽에 있는 어느 각주를 보고 그 뒤쪽에 나오는 구절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주제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제가 각주에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 갑자기 깨달음이 왔고, 두 주제 사이의 관계가 보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오류가 없을 뿐더러 그 주석을 단 사람이 분명 영감을 받아 그렇게 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은 경전에 표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며 일종의 정리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에 더하여, 여러분이 그들 각자에게 우연히 발견하는 진리들을 개인적인 간증으로 조직할 수 있는 틀을 줄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훌륭히 봉사한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세미나리를 가르친 후에 저는 학생들의 습득 및 기억의 양에 영향을 주는 요소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간략하지만 매우 신중하게 정리한 과목 전체에 대한 개요를 맨 처음 시작할 때 제시하는 것이 아주 가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두 번의 수업으로 배도, 회복, 순교, 핍박, 서부로의 이주, 교회의 전 세계적 확장을 모두 한 번에 다루면, 학기를 계속해 나가면서 훨씬 느린 속도로 동일한 여정을 밟을 때 여러분이 제시할 정보를 어떻게 정리해 나갈지에 대한 틀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게 됩니다. 마치 오페라나 뮤지컬의 서곡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학기 초기에, 비교적 매우 짧은 시간을 투자하면, 학생들은 자신이 전체 여정의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감을 잡는 것입니다. 모든 조각이 모였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학생들이 알면, 수업에 끝까지 참여할 확률이 높아지고 배움의 빛이 더 밝게 빛나게 됩니다. 이러한 개괄은 전체의 틀을 제시하며,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큰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제가 세미나리를 가르치던 기간의 초기가 아니라 거의 끝날 무렵에 이 원리를 발견했다는 점입니다.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학생들이 정말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느 과목을 가르치든, 개요 목록 형태로라도 간단하게 내용을 개괄한다면, 우리 청소년들은 여러분이 제시할 진리, 많은 경우에 예상치 않게 주어질, 그러한 진리를 담을 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 맞는 한 가지 틀이 있습니다. 그러한 틀을 이루는 요소는 경전의 모든 부분에 있습니다. 이름도 여러 가지입니다.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몰몬경에서 찾은 문구입니다. 나머지 둘은 값진 진주에 나와 있습니다.

“행복의 계획”(저는 이 표현을 선택했습니다. 이 계획에 대해 말할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입니다.)을 초반에 간단히 개괄하고 때때로 다시 언급하는 것은 여러분의 학생들에게 크나큰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과제를 드리겠습니다. 예상은 하고 계셨겠지요? 여러분의 과제는 행복의 계획, 즉 구원의 계획에 대한 간단한 개요 또는 개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여러분이 나눌 진리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틀을 만들어 주십시오.

처음엔 간단한 과제라고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습니다. 간단함과 단순함을 성취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는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 이 충만한 계획은 사실 복음의 모든 진리를 포함합니다.

나부를 떠나는 성도 중에는 제일회장단과 사도들이 정한 짐의 한계에 순종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들처럼 개요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싶을 것입니다. 빼내야 하는 것들을 보면 마음이 괴로울 것입니다. 손수레로 이주한 개척자들에게는 겨우 70파운드(약 32킬로그램)가 허락되었습니다. 이 개요는 “손수레 개요”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교사 경력에서 가장 어렵고, 분명 가장 보람 있는 과제가 될 것입니다.

행복의 계획에 대한 여러분의 개요는 경전의 진리라는 긴 두루마리를 재빨리 훑어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학생들은 그 다음 그 계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왜?” 하고 궁금해합니다. 어떤 일들을 하라는 계명이 왜 왔는지, 또 어떤 일들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왜 받았는지 말입니다. 행복의 계획에 대한 지식은 단지 그 개요라 하더라도 청소년들의 마음에 “왜”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가 심각한 실수를 범한 자녀를 화가 나서 꾸짖었습니다. “세상에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니?” 자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유’를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학생들에게 서로 관련이 없는 진리들을 잔뜩 주는 것은 도움이 되는 만큼이나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전체 계획에 대해 감을 잡도록 하는 것은 단 몇 가지 세부 사항만 제시하더라도 학생들에게 참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계획이 대체 무엇인지 알려 주면, “왜”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교회에서 듣는 어려운 질문의 대부분을 나열해 보자면, 낙태와 기타 여러 가지 것들, 누구는 신권을 소유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이 계획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는 답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앨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최근에 가장 좋아하게 된 성구입니다. 그런 구절은 항상 변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속의 계획을 알려 주신 후, …… 계명을 주셨나니”(앨마서 12:32, 강조체 추가)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속의 계획을 알려 주신 , …… 계명을 주셨나니” 한 번 더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속의 계획을 알려 주신 후, …… 계명을 주셨나니”

해롤드 비 리 회장님이 자주 말씀하신 것처럼,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이 아니라 절대 잘못 이해할 수 없도록 말씀하십시오.(“충성심” [종교 교육자들에게 주신 말씀, 1966년 7월 8일]9쪽 …… 참조) 학생들에게 “왜”를 설명하려면 이 방식을 따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속의 계획을 알려 주신 , …… 계명을 주셨나니”

여러분의 학생들 또는 자녀들이 유혹을 받을 때 여러분은 그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위험한 순간에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복음 계획의 틀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들은 엄청나게 강해질 것입니다.

이 계획은 계속해서 되풀이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목적, 구속주의 실재성, 계명이 주어진 이유를 그들이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의 복음 공부와 인생 경험은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그리스도와 속죄와 복음의 회복에 대한 간증을 더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따를 수 있는 모형으로 짧은 행복의 계획 개요를 만들어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개요를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대로 하려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와 기도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여러분은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배우게 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여러분이 받는 보상이 될 것입니다.

시작을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개요를 드리겠습니다만, 여러분은 자신의 틀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위대한 행복의 계획, 구속의 계획, 구원의 계획에서 핵심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전세

    • 영적인 창조

    • 선택의지

    • 천국 전쟁

  • 육체적 창조

  • 타락과 필멸의 삶

    •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원리와 의식(첫째 되는 원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회개, 침례, ……)

  • 속죄

  • 무덤 너머의 삶

    • 영의 세계

    • 심판

    • 부활

제이 르우벤 클라크 이세 회장님은 교회 교육의 진로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은 분명 해마다 이 책을 읽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매해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계시입니다. 표준 경전을 펼쳐서 읽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계시입니다. 그 중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 성숙을 향해 순탄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들을 영적으로 어린 아이처럼 다루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영적인 축복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세미나리나 종교 교육원을 찾아오는 학생은 거의 없으며, 기도의 효험을 보지 못하고 또는 병고침에 대한 신앙의 권능에 관한 간증을 갖지 않고 혹은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영적인 경험을 갖지 않고 세미나리나 종교 교육원을 찾아오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경험을 한 이 청소년 뒤로 다가가서 그의 귀에 대고 종교에 대해 가만히 속삭일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당당히 나서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에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적인 일을 은폐물로 삼아 종교적인 진리를 위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들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그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청소년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여러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접근하거나 “옛날 이야기”식으로 말해 주거나, 응석을 받아 주거나, 선심 쓰는 체하거나, 영적인 경험이 없고 영적으로 거의 죽은 그러한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사용하는 기타 유치한 방법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1992 개정판 [종교 교육자들에게 한 말씀], 1938년 8월 8일, 9쪽)

교회 교육의 진로를 읽으십시오. 이제 과제가 두 개가 되었군요.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는 여러분의 청소년들이 행복의 계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계속해서 충실하도록 붙들어 줄 진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의 청소년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클라크 회장님의 말씀은 저도 참으로 공감하는 내용인데, 여러분도 동의하신다면, 학생들에게 불멸과 영원에 관한 진리들을 활짝 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영적인 것들의 실재성에 대해 확신시켜 주십시오. 먼저 “영과 몸이 곧 사람의 영혼이라”(교리와 성약 88:15)는 점을 가르치십시오. 인간은 이중으로 된 존재, 즉 필멸의 몸에 담긴 영입니다.

만질 수 없는 영적인 부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학생들은 컴퓨터를 잘 압니다. 금속과 플라스틱, 유리, 또 여러 가지의 물질로 만들어진 개인용 컴퓨터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정보를 저장합니다. 표준 경전 전부를 저장하고, 백과사전 전질을 저장하고, 각종 사전과 모든 주제에 대한 책들, 심지어 그림과 수학 공식들도 저장합니다.

키 몇 개를 누르면 저장된 정보의 어느 부분이든지 즉시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키 몇 개를 더 누르면 컴퓨터에 저장된 것들을 다시 정리하고 첨부하거나 삭제할 수 있습니다. 다른 키 한두 개를 더 누르면 원하는 것을 다양한 색으로도 인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가 무엇이고 어떻게 정리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손에 잡히는 완전한 증거물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컴퓨터를 완전히 분해한다면 저장된 자료에서 단 한 글자나 단 한 장의 그림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책과 문구와 시와 그림에 대한 만질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를 산에 녹이거나 불에 태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 안에 담긴 것들에 대한 실질적 증거가 될 한 단어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컴퓨터가 타고 난 재에서 한 단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육신을 화장한 후 남은 재에서 영을 찾을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정보가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몸 안에 영이 있다는 것을 각 청소년에게 가르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져지지 않더라도, 그것은 실재성의 정수입니다. 여러분은 복음 계획의 맥락에서 영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맥락에서 영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고, 우리 각자의 운명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들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시는 것을”(고린도전서 3:16) 가르치십시오.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가르치는 경전 내용을 보여 주십시오. “그 빛은 만물 안에 있으며, 만물에게 생명을 주며, 만물을 다스리는 율법이니”(교리와 성약 88:13; 강조체 추가; 요한복음 1:9; 교리와 성약 84:45~47; 88:6과 비교)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은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신다]”(교리와 성약 84:45~46; 강조체 추가; 교리와 성약 88:1~13; 요한복음 1:9; 모로나이서 7:15~19와 비교)는 것을 가르치십시오.

이 내면의 빛, 옳고 그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그리스도의 빛, 도덕적 감각, 또는 양심으로 불리며, 우리의 행동을 절제시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억누르거나 파괴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동물들에게는 없는 요소입니다.

리하이는 “사람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고, 율법이 사람에게 주어졌[다]”(니파이후서 2:5; 강조체 추가)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양심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실재함을 확인해 줍니다. 또한 선과 악, 공의, 자비, 명예, 용기, 신앙, 사랑, 덕성과 그에 필요한 상대되는 것들, 즉 미움, 탐욕, 잔인함과 질투가 실재함도 확인해 줍니다.(니파이후서 2:11, 16) 그런 가치들은 만질 수는 없지만, 물리적 법칙들과 똑같이 인과관계로 율법에 반응합니다.

“사람도 또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느니라. 예지 곧 진리의 빛은 창조되거나 지음을 받지 아니하였나니, 참으로 그리될 수도 없느니라.

일체의 진리는 하나님이 놓아두신 영역 안에서 독립되어 있어 스스로 작용하며 또한 모든 예지도 그러하니, 그렇지 아니하고는 존재하는 것이 없느니라.

보라, 여기에 사람의 선택의지가 있고, 여기에 사람의 정죄가 있나니, 태초부터 있던 것이 그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났으되 그들이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까닭이니라.

또 그 영이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은 정죄 아래 있느니라.

무릇 사람은 영이니라. 원소는 영원하며, 영과 원소는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충만한 기쁨을 받느니라.

그리고 분리되어 있을 때 사람은 충만한 기쁨을 받을 수 없느니라.

원소는 하나님의 성막이니, 그러하도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막 곧 성전이니라. 어떠한 성전이든지 더럽혀지면,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영광은 예지니, 다른 말로 하면 빛과 진리니라.

빛과 진리는 저 악한 자를 버리느니라.

모든 사람의 영은 태초에 무죄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타락에서 구속하셨으므로 사람은 그의 어릴 때에 다시 하나님 앞에 무죄하게 되었느니라.

그리고 저 사악한 자가 와서 사람의 자녀들에게서 불순종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조상의 전통으로 말미암아 빛과 진리를 빼앗아 가느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명하여 너희 자녀를 빛과 진리로 양육하라 하였느니라.”(교리와 성약 93:29~40)

학생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십시오. 율법은 변경될 수 없는 일관된 규칙이며 독립적으로 변함 없이 존재합니다. 율법을 준수하거나 거역하거나 무시하는 것까지도 언제나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가르치십시오.

율법은 물리적인 우주를 그토록 정확한 일관성과 정확성으로 다스리기에, 인간이 그런 법칙들을 발견하고 나면 그 법칙들이 존재함을 예외 없이 정확하게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물리적, 영적 율법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십시오.

율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진리와 마찬가지로 “항상 존재하며 끝이 없[습니다.]”(교리와 성약 88:66) 이론은 한시적이고, 변할 수 있으며, 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론은 끝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가 끝은 아닙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과 같은 가치에 상응하는 도덕적, 영적인 율법들이 있습니다. 이들 율법은 물리적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과 마찬가지로 영구적이고 정확하며 유효합니다.

인간도 동물에 불과하며 따라서 도덕 표준을 지키는 일에서 제외된다고 가르치는 이론이 돌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들을 지배하는 율법들은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하늘에서, 변경될 수 없도록 선포되었습니다.(교리와 성약 130:20) 종종 젊은이들은 도덕적 영적 율법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으로는 측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율법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물리적 또는 자연적 법칙들은 시연하기가 훨씬 쉬운데 그것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 가르칠 때 유용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해수면에서 물은 0도일 때 얼고 액체에서 고체로 변합니다. 100도에서는 기체가 됩니다. 여러분의 학생들은 이 사실을 알며, 이에 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또는 부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고, 화씨든 섭씨든 또는 다른 단위로 복잡한 계측을 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사실에 대한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그 이유는 이 현상이 법칙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법칙에 따라 얼거나 증발할 것입니다.

언제나 존재해 온 기본적인 영적 율법들이 있고, 그것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며, 결과를 야기하고, 우리가 그 결과를 바꿀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러한 영적 율법들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악함은 결코 행복이 아니었느니라”(앨마서 41:10 참조)라는 말씀을 시험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학생들이 영적인 율법들을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들처럼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경전에서 속죄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칠 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의의 법은 범법에 대한 충족을 요구했습니다. 속죄는 메시야가 대신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복음의 법과 의식에 순종할 때, 속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구속될 것이고 모든 인류는 회개하기만 한다면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구속될 수 있습니다.

창조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모든 사건은 다 율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연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선택에 근거합니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그렇게 계획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계획, 위대한 행복의 계획에 따라 작동합니다.

인간은 이중적 존재입니다. “원소는 영원하며, 영과 원소는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충만한 기쁨을 받[기 때문입니다.]”(교리와 성약 93:33)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학생들이 필멸의 육신을 입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눈으로 보도록 가르치십시오.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귀로 듣도록 가르치십시오. 필멸의 삶에 드리운 휘장을 들추어 영원을 바라보도록 가르치십시오.

우리는 시작과 끝이란 측면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합니다. 출생을 우리의 시작이라고 보고 사망을 우리의 끝으로 봅니다. 그 사이의 모든 것은 시간 단위로 측정합니다. 매분, 매시간, 매해에 각기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것이 필멸의 삶의 방식입니다.

청소년들은 생각을 넓혀서 영적인 면에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구속의 계획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물질은 끝이 없고

우주도 끝이 없으며

영은 끝이 없고

자손은 끝이 없고

덕성은 끝이 없고

권능은 끝이 없고

지혜는 끝이 없고

빛은 끝이 없습니다.

화합은 끝이 없고

젊음은 끝이 없고

신권은 끝이 없으며

진리는 끝이 없습니다.

(“If You Could Hie to Kolob,” Hymns, no. 284).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학생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십시오. 어떤 것들은 시작이 없었고 절대 끝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구원의 계획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우르는 일종의 개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가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거라는 점을 떠올리고는 멈췄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확장시켜서 영원을 바라보십시오. 맑은 날 밤에 밖에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면 도움이 됩니다. 필멸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창조의 끝 없는 광활함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 즉 이해의 눈으로 보면 경전에 이에 관해 참조할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교리와 성약 110편이 그렇습니다. “휘장이 우리의 마음에서 걷히고 우리의 이해의 눈이 열렸더라. 우리가 보니 주께서 우리 앞 설교단 흉벽 위에 서 계시는데”(1~2절)

우리가 그런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실상 느끼다라는 단어에 더 일치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으로 보는 방법인데,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뭔가가 더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학생들의 “이해의 눈”을 열어 주고 광대하고 끝이 없는 창조에 대한 감을 알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참으로 정확하고 질서 있게 작동하며 인간은 절대 그렇게 만들지 못했을 것임을 확신시켜 주십시오. 인류는 스스로 발명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도구를 가지고도 그것을 측량조차 못 할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인간이 속한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현세적 세상에서조차도 그러함을 가르치십시오. 현세적이란 곧 한시적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세상에 어울립니다. 인간의 육신에 어울립니다. 끝없는, 영원한, 끝이 없다라는 단어는 우리의 영적인 운명을 표현합니다. 새롭게 된 육신과 함께 본래부터 영원했던 영을 갖게 되면, 충만한 기쁨이 찾아옵니다.

학생들에게 필멸의 감각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은 한계가 있으나 영적인 것들은 그렇지 않음을 가르치십시오. 그들은 필멸의 감각으로는 가르침 받을 수 없는 것들을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자녀이며, 필멸의 육신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한 율법에 따라 운용되며,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것임을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학생들은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구속의 계획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해를 못할지도 모르나 신앙으로써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이해의 눈을 열어 주어 영광스러운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줄 진리를 가르치십시오.

영에 대해 배우는 일에서 사물의 올바른 질서를 가르치십시오. 먼저 신앙으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진리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진리들을 확인 받을 것입니다.

행복의 계획, 구속의 계획은 진리입니다. 학생들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진리를 강력히 제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계획에 대해 신앙을 가지라고 가르친다면, 여러분은 그들을 잘못 이끌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잘못 이끌림을 받지도 않을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고대 사람들처럼 되라고 가르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일지라도 그 신앙이 그처럼 심히 강하였던 자가 많이 있었으매, 그들에게는 휘장 안을 금할 수 없었던지라, 그들은 그들이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것들을 진실로 그들의 눈으로 보고 기뻐하였더라.”(이더서 12:19)

학생들이 “부지런히 찾[고], 항상 기도하[며], 또 믿으[면] ……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함께 역사하리라”(교리와 성약 90:24)는 것을 가르치십시오.

학생들이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것이며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법칙이 있듯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율법으로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계획, 영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해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과 진리로 자녀들을 양육하며 서로 왕국의 교리를 가르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부지런히 가르치라. 그리하면 나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이는 너희가 이론에 있어서, 원리에 있어서, 교리에 있어서, 복음의 법에 있어서, 너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계되는 모든 것에 있어서 더욱 온전히 가르침을 받게 하려 함이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 전에 있었던 일이나 지금 있는 일이나 머지않아 반드시 있게 될 일, 국내에 있는 일이나 외국에 있는 일, 열국의 전쟁과 혼란, 그리고 땅 위에 있는 심판과 또한 나라들과 왕국들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더욱 온전히 가르침을 받게 하려 함이요-

내가 너희를 부른 그 부름과 내가 너희에게 맡긴 그 사명을 영화롭게 하도록 내가 또다시 너희를 보낼 때에 너희[와 그들이] 모든 일에 준비가 되어 있게 하려는 것이니라.”(교리와 성약 88:78~80)

동료 교사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여러분에게서 배울 셀 수 없이 많은 청소년이 여러분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행복의 계획을 알고 이해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삶에서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한 말이 서툴었던, 그 위대한 교사 윌리엄 이 베렛 형제님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가족을 축복하셔서 여러분이 청소년들에게 봉사하는 동안, 즉 그분의 자녀들을 구하는 동안 그분께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구하시기를, 여러분의 결혼생활을 보살피시고 여러분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기를,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과 편리한 것들과 삶이 계속되어 가면서 사치라 할 만한 것들까지도 제공할 수 있기를,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 사랑할 만하고 칭찬할 만하며 듣기 좋은 것들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여러분이 예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의 독생자이며, 이 교회가 그분의 교회이고, 그분이 우리의 구속주이며, 우리 모두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이 계획이 경전에서 밝힌 대로 진행될 것이며, 여러분이 수사적으로, 또 말 그대로 수천 명의 청소년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끌어서 그들이 때가 되었을 때 그분 면전으로 돌아가도록 할 수 있다는 간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살아 계심을 간증드립니다. 저는 그분이 살아 계심을 압니다. 저는 그러한 간증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이 교회를 감리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일을 지도하십니다. 그분은 이곳 지상에서 그분의 종들에게 낯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봉사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에게 드리는 간증과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