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사제술의 위험


“사제술의 위험,”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106–11

“사제술의 위험,” 세미나리를 가르침, 106–11

사제술의 위험

2002년 교리와 성약 및 교회사에 관한 CES 대회, 2002년 8월 12일

오늘 저는 일종의 안전 교육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선교부 임지로 떠나기 전에 저는 농기구를 용접하여 제조하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공장 직원들은 우리에게 공장 안과 기계 주변에서의 안전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지키던 안전 표준과 관행에는 우리가 신는 신발 종류에 대한 규정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저는 몇 군데 탄광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탄광에 들어갈 때는 방문자들까지도 안전 교육을 받고 안전 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현대의 탄광은 공기 청정도를 감지하는 설비가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광부들은 경고를 받아 재빨리 탄광을 떠날 수 있습니다. 현대의 감시 시스템이 개발되기 전에 광부들은 카나리아를 데리고 갱도로 들어갔습니다. 카나리아는 독성 가스에 약해서 광부들보다 앞서 질식하게 됩니다. 카나리아가 죽으면 광부들은 거기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종의 조기 경보 시스템이었습니다.

제조업과 광업, 기타 산업에서 안전 교육의 목표는 위험한 상황을 없애고, 사고를 줄이며, 인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교육을 위험한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최소한 물리적인 사고와 관련해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영적인 위험은 존재합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님은 교육총감이셨을 때 주신 메시지에서 산업계의 고용주들이 직원의 안전을 위해 유의하는 것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직업에도 말하자면 고유한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용한 분들도 그런 사랑 어린 염려를 합니다. 지속적으로 상기하도록 여러분 앞에서 언급하는 이 이야기가 혹 믿음이나 신뢰의 부족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고압기기를 가리기 위해 지어진 판자집 앞에 붙은 표시처럼,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늘 우리의 복리를 위해 그 자리에 있으며, 제 생각에는 앞으로도 늘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Pitfalls and Powder Sheds”, The Growing Edge, Nov. 1978, 1)

우리가 직면하는 몇 가지 직업상의 위험이 있습니다. 일부는 우리 직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고용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재정적 부채 의무를 지키는 데 실패한다면 교회 교육 기구에서 일자리를 잃은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이혼과 결혼 생활의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직업에서는 고용 상태를 유지하는 데 결혼과 가정 생활이 감안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육 위원회에서는 교사가 훌륭한 역할 모델이어야 함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교회 교육 기구는 그런 일을 문제로 인식합니다.

또 다른 위험은 학생들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매년 우리는 직원들을 잃는데, 그들이 조심하지 않고 권고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여러 번 언급이 되었으므로 오늘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학생들에게 하는 언행에 주의하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은 교리상의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위험에 대해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제발 주의하고 자제하여 교회 교리의 모든 사항에 대해 전적으로 정통성을 유지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추측하시는 대로, 이 위대한 사업에 우리를 고용한 제일회장단과 사도들에게 큰 염려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우리를 개인적으로, 또 전체적으로도 사랑하고, 돕고, 신뢰하지만, 교실에서 일부 부적절한 교리적 또는 역사적 견해의 표방이 있었다고 느끼는 어느 회원이 염려를 표현하면, 그분들은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 앞에 늘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이런 위험에 대해서, …… 여러분을 주의시키고 환기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

이런 적절한 자제를 유념하면서,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선지자들과 거룩한 경전들에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색적이고 자극적이거나 아전인수격으로 교리를 가르치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분명 우리는 교육자로서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의 교리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것만 해도 바쁩니다. …… 여생 동안 계속해서 연구하십시오. 그러나 교실에서 여러분이 가르치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고 제일회장단과 사도들의 규정에 따라 제한을 두십시오. 그분들이 연차 대회에서 무엇을 가르치기로 선택하는지 주의 깊게 듣고 보십시오. 그분들은 성임된 분들입니다.”(“Pitfalls”, 1)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염려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세미나리와 종교 교육원과 행정 업무 공간에서 인터넷 사용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문을 열때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 교육 기구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 직장은 교회 기기로 인터넷 상에서 외설물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한 치도 묵과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합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참으로 싫으며,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사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필터링 시스템으로 모든 교회 교육 기구 컴퓨터에서 접속했던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보고서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매우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차후에 개인적인 외설물 중독이나 이용이 발각되면, 그것이 교회 교육 기구 컴퓨터이든 아니든, 그 결과는 실직입니다. 이 엄청난 전염병이 세상에 만연합니다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으로 들일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영을 지녀야만 합니다. 선지자들이 이 사악함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해 왔고, 우리는 이 부분에서 깨끗함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술의 위험

우리와 같은 직업 유형에 고유하게 따라오는 각종 위험들이 더 있지만, 오늘 저는 그 중 한 가지에만 초점을 두겠습니다. 그것은 사제술의 위험입니다. 제목은 서로 달랐으나 이 부분에 대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훈련을 해 왔는지 모릅니다. 봉급을 받는 직장인인 우리에게 가장 취약한 특정 함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위험을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더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술이란 무엇입니까? 니파이는 매우 간결하고 유용한 정의를 내려 주었습니다.

“그가 명하시기를 사제술이 없을 것이라 하시나니, 이는 보라, 사제술이란 사람들이 가르침을 베풀되, 스스로를 세상을 위한 빛으로 세워 이익과 세상의 칭찬을 얻으려 하는 것임이라. 그러나 그들이 시온의 복리를 구하지 아니하느니라.”(니파이후서 26:29)

니파이는 그들이 “이익”과 “칭찬”을 위해 “스스로를 세상을 위한 빛으로 세[우고]” “시온의 복리를 구하지 아니[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제술의 발현은 다양하며, 그것은 몰몬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서나 반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교육 기구의 교육자로서 우리는 우리 일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경우에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들은 아마도 니허나 코리호어의 경우보다는 훨씬 감지하기 어렵겠지만 여전히 니파이가 말씀한 사제술의 정의 안에 들어가며, 이 사업에 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학생들에게 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해가 될 것입니다.

이익 탐닉

니파이의 정의에서 우리는 자신을 빛으로 세우는 것이 바로 사제술이란 문제의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빛으로 세우고자 하는 동기가 이익과 칭찬을 얻기 위해서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범주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몇 주 전에 저는 한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몇 년간 교회 교육 기구에서 가르치다가 그 조직을 떠난 형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돈을 받고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그 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고 질문했습니다. 훌륭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점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우리 대부분이 아마도 그에 대해 숙고해 보았을 것이고, 아마 고용되기 전에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며, 그 후로도 여러 번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셨던 스펜서 더블유 킴볼 장로님이 해 주신 말씀은 제가 들어본 것 중 최고의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청소년들이 절대로 돈이 목적인 사람들에게서 배우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르치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라도 단순히 직업으로서, 거의 전적으로 급여를 위해 일하고 있다면, 다른 분야로 가서 일하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봉급은 부수적인 것이고 여러분의 위대하고 웅장한 열정이 우리 자녀들과 그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제 자녀들이 있는 뉴욕, 미시건, 위스콘신, 유타에서 가르치시길 소망합니다.”(“제가 여러분에게 제 손주들과 시온의 다른 모든 이들에게 가르치시길 바라는 것”, 종교 교육자들에게 전한 말씀, 브리검 영 대학교, 1966년 7월 11일, 8쪽)

이것은 우리에게 훌륭한 열쇠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이 시온의 복리와 우리 청소년들에게 있다면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익을 탐하는 욕망은 우리의 정규 임무와 급여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외부의 관련 관심사, 즉 책 출간이나 학업을 계속하는 것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질문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교육 기구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사제술에 관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을 내고, 계속된 학업을 위해 학비를 받고, 또는 다른 여러 기회의 혜택을 누리면서 사제술에 관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네,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동기가 무엇이냐입니다. 킴볼 회장님의 말씀은 이 부분의 열쇠입니다. 마음을 돈에 둔다면, 시야가 가려지고 나쁜 결정으로 이끌릴 것입니다.

세상의 칭찬

이익을 얻는 것과 함께 니파이는 사람들이 세상의 칭찬을 위해 자신을 빛으로 세운다고 했습니다. 어떤 교사들은 칭찬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 칭찬을 얻기 위해 자신을 빛으로 세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빛으로 바라볼 때,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칭찬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더 많은 칭찬을 원하는 그들의 욕망을 증가시키고 그런 순환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위험해지는 이유는 교사가 자신을 빛으로 보이게 하려고 교리를 바꾸거나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거나 사용하지 말아야 할 교수법을 행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마빈제이 애쉬튼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해 좋은 말을 할 때 조심하고, 자각하고, 지혜로우십시오. 사람들이 여러분을 큰 존경과 사랑으로 대할 때 조심하고, 자각하고, 지혜로우십시오. 여러분이 영예를 받고, 주목을 받고, 인정받을 때, 그것은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여러분이 자기에 대한 그런 말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

세상의 칭찬은 무거운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저는 이런 말을 참으로 자주 들었습니다. ‘그는 성공하기 전까진 참 훌륭했지만, 그 다음엔 자기 성공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돈과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정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책임에서도 말입니다. ……

칭찬, 성공, 또는 심지어 자신을 위한 목표를 성취하는 것에 의해서도 우리가 미혹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Carry Your Cross”, Brigham Young University 1986–87 Devotional and Fireside Speeches [1987], 141)

우리의 직업은 칭찬과 과찬을 자주 들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학생들, 부모들, 신권 지도자들, 제일회장단과 사도들에게서도 그런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애쉬튼 장로님 말씀처럼 우리는 조심하고, 자각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1952년에 제일회장단은 스테이크 회장과 감독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유명세가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과도한 관심과 칭찬은 종종 우리 모두가 구하는 승영으로 우리를 데려갈 신앙과 노력을 무디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30June 1952, 4)

저는 이 원리가 과도한 관심과 칭찬을 받는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노력에 대해 많은 칭찬과 칭송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 자체가 목표가 되거나 그것에 중독된다면, 우리는 자신을 빛으로 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일회장단과 사도들의 말씀

제일회장단과 사도들은 여러 해 동안 우리 자신을 빛으로 세우는 것의 위험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분들의 말씀 중 몇 가지를 살펴봅시다. 1992년, 댈린에이치 옥스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점이 우리가 몰락하는 원인이 되는 또 다른 예는 카리스마 있는 교사입니다. 훈련된 머리와 노련한 발표 실력으로 유난히 인기 있고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 교사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모으도록 부추겨서 그 사람을 타락시키는 데 그 강점을 이용하려 할 것입니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으며 그 목적이 ‘부와 명예’(앨마서 1:16)인 교회의 교사, 교회 교육 기구 교사 또는 교회 대학의 교수는 사제술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제술이란 사람들이 가르침을 베풀되, 스스로를 세상을 위한 빛으로 세워 이익과 세상의 칭찬을 얻으려 하는 것임이라.’(니파이후서 26:29)

가장 인기 있고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교사들은 이러한 유형의 사제술에 특별한 약점이 있습니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강점은 영적으로 몰락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애먼 배빗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한 계시는 이렇습니다.

‘그는 내가 명한 권고 곧 나의 교회의 제일회장단의 권고 대신 자기의 권고를 확립하기를 갈망하니, 나의 백성이 예배할 금송아지를 세우는도다.’(교리와 성약 124:84)”(“Our Strengths Can Become Our Downfall”, Brigham Young University 1991–92 Devotional and Fireside Speeches [1992], 111)

1989년 어셈블리홀에서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셨던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님은 총관리 역원과의 연례 저녁 모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경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영향력 있고 설득력이 있어서 학생들이 복음보다도 오히려 교사인 여러분에게 더 충성하게 될 때, 어떤 잠재적인 위험이 따르는지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며, 우리는 여러분 모두가 그런 영향력 있는 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진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학생들이 경전 자체에 인도되도록 권유해야 하며, 단지 여러분이 해석하고 제시하는 것만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개인적 견해가 아닌 주님의 영에 의지하도록 권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이것이 바로 아무리 유능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직접 나아가도록 학생들에게 권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학생들 곁에 항상 있어 주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여러분이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추종자들을 거느릴 필요가 없습니다. ……

…… 학생들의 충성이 경전과 주님과 회복된 교회의 교리를 향하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참된 교회의 지도자들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개성과 강의의 화려함과 카리스마와 교실 환경이 사라진 후, 학생들이 빈 손으로 세상을 마주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학생들에게 홀로 서야 할 때 그들을 지탱해 줄 선물을 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 교회 전체는 앞으로 올 여러 세대에 걸쳐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

만일 우리가 매일 교실에서 일하는 교사로서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합당하지 않고 기만적인 수단으로 주님의 영의 참된 영향력을 모방하려 하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강렬한 감정이나 눈물을 펑펑 쏟는 것을 영의 임재와 동일하게 여기는 모습을 볼 때면 걱정이 앞섭니다. 분명 주님의 영은 눈물을 포함하여 강한 감정을 불러오기도 합니다만, 그러한 외적인 표시가 영의 임재 그 자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영원한 투자, 종교 교육자들에게 전한 말씀, 1989년 2월 10일, 2~3쪽)

지난 2월 총관리 역원과 함께하는 저녁 모임에서 로버트디 헤일즈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미나리와 종교 교육원에서 가르치는 여러분 각자는 마음속에 천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피리부는 사나이가 되어 주변에 학생들을 모두 모으고 그들의 사랑을 받고자 하거나 인기가 커지면 학생들을 이끌 수 있고, 역할모델이 되고, 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큰 유혹입니다. ……

때로 개종자가 주님보다 선교사에게 집중하듯 학생이 사랑과 관심을 교사에게 집중시킬 때보다 더 위험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 교사나 선교사가 떠나거나 복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그 학생은 절망할 것입니다. 간증이 흔들리고, 신앙이 파괴됩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가 청소년의 삶을 감화시킨 후에는 그들이 기도하고 연구하며 복음 원리를 삶에 적용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우리 구속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해야 합니다.”(Teaching by Faith, address to religious educators, 1 Feb. 2002, 7)

1997년 4월 연차 대회에서 헨리비 아이어링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경고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증인의 법, 즉 공인된 증인의 법이 적용되었을 때입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일 때, 우리의 주의를 그곳에 못 박아 두듯 하면서 그런 축복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97, 32; 또는 Ensign, May 1997, 25) 이제 우리는 선지자와 사도들이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반복된 경고를 검토했습니다.

징후를 인식함

사제술을 인식하고 피하는 것에서 어려운 점 한 가지는 이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과 비슷합니다. 사실 교만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제조업 공장에서 사고가 있다면 보통 출혈이나 공황 상태와 같은 눈에 보이는 징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고가 났다는 것을 즉시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부상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의 조기 징후를 인식하려면 우리는 더 민감해야 합니다.

이러한 징후는 광부들이 탄광으로 데리고 들어가던 카나리아와 약간 비슷한지도 모릅니다. 갱도에서 작업을 하던 사람에게 카나리아가 정말 생기 없어 보인다면 두 가지 접근법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즉시 그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카나리아가 감기에 걸렸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접근법은 광부에게 치명적일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에서도 그와 비슷한 유형의 접근법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음 증상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신의 행동과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점검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증상들은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라 단순한 증상입니다. 그러나 카나리아가 단순히 감기에 걸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추종자들을 모으는 것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는 우리의 수업이나 말씀에 대한 남들의 칭찬에 따라 우리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이것은 의지하기에 위험한 근거입니다. 칭송이 척도가 될 수 있고 그러면 우리가 더 많은 칭송을 받기 위해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나 가르치는 방법에서 타협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증상은 우리의 임무에 변경이 있을 때 교회 교육 기구에 큰 공백이 생겼다고 느끼는 것, 즉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점은 그 변경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걱정하도록 두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면, 단언컨대, 의사결정자들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 학생들이 특정 교사에게서 배울 수 없다면 세미나리나 종교 교육원 수업을 듣지 않겠다고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때로 일부 교사의 수강생 수가 다른 교사들과 불균형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한 건물에서 같이 지내는 다른 교사들보다 더 많은 학생을 보유하고 싶은 경쟁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 한 교사가 다른 동료 교사들이나 특정 지역의 추종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심지어 지명된 그들의 지도자들보다 그 교사와 더 강한 유대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 말씀하거나 그들을 가르치라는 흔치 않은 그런 요구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볼 만한, 추종자를 모으는 교사의 징후들이 분명 더 있을 것입니다.

지식이나 학문 분야에서 자신을 빛으로 세우는 증상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 일부는 자신이 어떤 교과 과정이나 다른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보다 더 깊은 교리, 더 순수하고 단순한 교리를 가르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다른 이들이 일반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특별한 자료들이 있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다고 느끼게 만드는 특별한 연구 방식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교회 교육 기구나 교회가 특정 교리를 충분히 강조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거나 심지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특정 교리를 제일회장단과 사도들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소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가 되면, 카나리아가 땅에 쓰러져서 숨을 거둔 상태입니다.

우리 중 일부는 어떤 과목을 가르치든 상관 없이 어느 수업에서든 자신이 좋아하는 복음 주제만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학생이 우리가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하면 난처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특정 총관리 역원들 또는 교회 교육 기구 교사들만을 순수한 복음을 아는 사람들로서 존경하고 다른 총관리 역원들이나 교사들을 얕볼 수도 있습니다.

교리와 관련한 자신의 철학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실에서 가르쳐 온 일부 내용에 대해 부모들이나 신권 지도자들이나 교회 교육 기구 지도자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가르치고 학생들이 자기 편을 들도록 강력하게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교육 기구 교실 밖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증상으로, 복음과 관련된 일에 대해 자기 와드나 스테이크에서 자신을 전문가로 세우는 것입니다. 복음 교리반 시간에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면 사람들 대부분이 답을 듣기 위해 우리를 쳐다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은근히 빛으로 들어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만큼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런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느낍니까? 몰몬경에는 “백성들[이] 그들의 부와 그들의 배움을 위한 기회를 따라 계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한]”(제3니파이 6:12) 시대가 나옵니다. 종교 교육자인 우리는 아마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에 대해 배울 기회가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에는 복음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같은 기회를 누리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 현임 교사 훈련 모임에서의 발표는 누가 가장 심도 있는 연구를 했는지, 또 누가 전에 아무도 들어 본 적 없는 관점을 제시했는지에 대한 무언의 경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통찰 중독 증후군”, 즉 우리에게 복음을 보는 참된 통찰이 있으니 학생들은 무조건 우리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에 따르는 위험에는 그것이 감성적 통찰이든 학문적 통찰이든 간에 그 자체만 중요시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복음대로 생활한다는 의미는 아닌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특정 분야에서 소위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종교 교육원에서 여러 다른 과목을 가르치게 하는 정책에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출간이나 장학금에 너무 집중하여 자신의 지식을 추구하는 일이 학생과 가르치는 일보다 우선순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감정적 또는 영적인 면에서 자신을 빛으로 세우는 일의 몇 가지 증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교실에서 사용할 특별히 감성적인 이야기들을 찾는 데 의지하거나 자신이나 개인 생활에 지나치게 집중된 이야기들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살짝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그것이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서슴없이 영이 뭔가를 “나에게 하라고 했다”는 말을 몹시 자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헌터 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감정을 조작하고서 그것을 영이라 이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의 개인 상담에 과도하게 관여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

그래서 우리 기구에 사제술이 있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요? 제 생각에 큰 위험은 우리의 가르침이 힘을 잃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의 가르침에 힘이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이 아닌 것입니다.(교리와 성약 50:13~23) 감정적으로나 학문적으로는 힘이 있을 테지만, 학생의 생활에 일어나야 하는 지속적인 변화를 촉진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일회장단과 사도들이 우리에게 면밀히 살펴보라고 요청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경전과 복음 지식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달하여 우리 학생들이 생활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사제술에 연관되어 있다면, 잘못된 메시지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교사를 숭배하나 복음 교리와 진정한 연계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들에게 정직하라고 강요하면서 자신은 탈세를 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필요한 말은 다 했지만, 거기에 힘이 실리지 않은 것입니다. 학생은 정확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테지만, 뭔가가 모자랍니다. 뭔가 모자라는 이유는 영이 원래 그래야 하는 대로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사들이 사제술로부터 자유롭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엄청난 힘이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복음을 단순하고 꾸밈 없이, 영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사실, 영으로 가르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도록 요청받은 일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것들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영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 학생들이 이 후기에 복음대로 살아갈 힘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 교사들이 사제술에서 자유롭다면, 학생들은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에게 의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의 가르침에 대해 감사해하겠지만, 그들은 주님께 향할 것입니다. 자기 부모와 신권 지도자들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학생들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제술은 직업상의 위험입니다. 우리가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조심하고 겸손하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강력한 교실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사람들, 바로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훌륭한 태도를 지녔습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 주님의 강력한 영향이 미치도록 했습니다. 교회 교육 기구에서 함께하는 교사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최근에 일부 직원들과 함께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때로 관리자들이 소총을 써야 할 경우에 산탄총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소수와 관련된 문제를 당사자들한테 직접 이야기하는 대신 기구의 모든 사람에게 산탄총을 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이 주제를 모든 전임 직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이것은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저에게, 지역 관리자들에게, 교육 기구의 모든 교사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메시지를 특히 주의 깊게 들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명단을 머릿속으로 만드는 일은 실수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 직업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제술이 마음의 문제이기에 이것에 맞서 싸우고 없애는 일은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신권 지도자들과 관리자들이 우려할 정도가 되기 전에 스스로 관리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활에서 면밀히 살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을 때 스며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직업과 관련된 위험 요소들을 정기적으로 숙고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학생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홀런드 장로님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여러분과 그들을 위해 여러 위험을 피하며 주의 깊고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가십시오. 우리가 고압기기 저장소 앞에 이 표시를 한 번 더 걸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우리의 안전을 위해 필히 또 다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Pitfalls”, 1)

결론

신약에 나오는 성구로 말씀을 마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되짚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제술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교사의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구를 읽는 동안 바울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 (특히 사제술과 관련된 맥락에서) 그가 왜 그렇게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일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우리는 ……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끝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데살로니가전서 2:3~13)

저는 복음이 참됨을 압니다. 저는 우리가 매우 중요한 사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압니다. 교회의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영의 권능을 통해 그들의 영혼에 복음 진리에 대한 간증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삶을 순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이 선지자이시며 경전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압니다. 우리가 경전에서 가르치고 선지자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위대한 특권입니다. 저는 여러분 훌륭한 교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저의 감사를 전합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제 아내 질에게 감사하고, 아내가 함께하는 것에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