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간증의 영으로


“간증의 영으로,”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101–2

“간증의 영으로,” 세미나리를 가르침, 101–2

간증의 영으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1991), 15~19쪽

간증은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간증은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간증은 구속하는 힘입니다.

프로그램은 그것이 간증을 만들어 내는 만큼만 구원할 것입니다. 정교하게 프로그램을 짜는 것은 영이 함께할 때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만, 영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

간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전하는 간증은 사람들을 들어올리고 축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중요한 것인데, 학생들 스스로 하는 간증은 그들을 구속하고 승영에 이르게 할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학생들이 우리의 말을 듣고 간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증은 학생들이 진리에 대한 자신의 간증을 말하고 성신이 그것을 그들에게 확인해 줄 때 생깁니다. 야고보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 ……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을] …… 알리라”(요한복음 7: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한 자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교회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여러분이 잃은 양을 구속하려 한다면, 정상적이고 균형 잡힌 식사로 영양을 공급 받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영양이 결핍된 사람들에게도 “비타민”이 전달되게 하십시오.

활동, 즉 봉사하고 간증할 기회는 약품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강화할 것입니다. 이것은 잃은 양을 구속하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성장을 위한 기회를 이미 많은 활동으로 포화상태인 이들에게 주는 경향, 거의 프로그램화된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스테이크와 와드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이런 방식은 잃은 양들을 계속 밖에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

몇 년 전에 저는 매우 능력 있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형제님이 감리하는 스테이크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스테이크 대회의 세부 내용은 계획되어 있었고, 회장님은 으레 그렇듯이 스테이크 회장단, 고등평의원, 감독, 스테이크 축복사라는 특정 범위 안에서 기도할 사람을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 임무를 알리지 않은 상태였기에 우리는 그런 영예를 입어 마땅한 그런 사람들 대신, 이러한 경험이 너무나도 절실한 사람들에게 임무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 스테이크 회장님은 총회들에 대한 계획을 자세히 세워 두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총회에 계획하지 않은 시간 20분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다른 식으로는 그런 기회를 받지 못하지만, 강화하는 경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임무를 제안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는 반론을 제기하며 몇 명의 유능하고 돋보이는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맡기겠노라고 했습니다. “비회원들이 많이 참석할 것입니다. 저희는 잘 계획되고 아주 매끄러운 대회에 익숙합니다. 우리 스테이크에는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아주 훌륭한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함께 모임을 하면서 스테이크 회장님은 두 번이나 일정에 대해 언급했고, 스테이크에서 “가장 유능한 연사”를 부르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가장 필요한 사람을 위해 그 시간을 남겨두면 어떻겠습니까?” 회장님은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네, 장로님이 총관리 역원이시니까요.”

일요일 이른 아침에 스테이크 회장님은 제게 누군가를 대기시켜 최고의 감명을 줄 시간은 아직 있다고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오전 모임이 스테이크 회장님의 세련되고 감동적인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말씀을 그분의 제2보좌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확실히 당황한 것 같았는데, “패커 형제님의 말씀을 믿으면 안 되겠어요.”라는 말로 입을 열었습니다.(그 전에 우리는 두 보좌들이 아마도 오후 모임에서 말씀하게 될 거라고 알려 준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형제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원고를 살펴볼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원고를 집에 두고 왔던 것입니다.

원고가 없는 그 형제는 간증을 나누는 것으로 말씀 방향을 바꾸었고 그 주에 했던 일 중에서 영감을 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의사에게 사망 선고 진단을 받은 한 형제가 죽음을 앞 둔 상태에서 신권 권능으로 살아났다는 일화였습니다. 저는 그의 원고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들려준 간증에 담긴 영감을 따라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앞줄에는 나이 지긋한 자매님이 세월 앞에 왜소해져 가는 형제님의 손을 잡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 자매님은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회중과는 동떨어져 보일 정도로 수수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대회에서 꼭 말씀해야 할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기회를 드리자, 그 자매님은 자신의 선교 사업에 대한 보고를 하셨습니다. 그녀는 52년 전에 선교 임지에서 돌아왔는데, 그 후로 한 번도 교회에서 말씀 요청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감동적이고 가슴 찡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어서 말씀을 부탁받았고, 모임을 마쳐야 할 시간이 가까워 오자 스테이크 회장님은 남은 시간은 제가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언했습니다. 저는 “다른 영감을 받으신 것이 없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시장님이 자꾸 생각났다고 했습니다.(그 대도시의 유권자들은 교회 회원인 후보를 시장으로 선출했고 그가 청중 가운데 있었습니다.) 제가 그럼 시장님의 인사 말씀을 듣자고 하니 회장님은 그가 교회에서 활동적이지 않다고 속삭였습니다. 저는 그래도 말씀을 청하자고 했지만, 회장님은 거절하며 그가 대회에서 말씀하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계속 고집하자 회장님은 그를 불러 연단에 세웠습니다.

시장의 아버지는 그 지역에서 교회의 개척자였습니다. 그는 한 와드에서 감독으로 봉사했으며, 제 기억으로는 시장의 쌍둥이 형제가 그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시장은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그는 연단으로 나왔으며, 놀랍게도 신랄함과 적대감에 찬 말을 꺼냈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시작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왜 저를 부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왜 교회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회와 맞지 않습니다. 한 번도 어울린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듭니다.”

솔직히 저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춘 후 시선을 떨어뜨리고 연단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을 마칠 때까지 그는 눈을 들지 않았습니다. 잠시 주저한 후,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6주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주먹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회중 앞에 흔들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그것이 쉽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제가 지난 몇 주 동안 경험한 지옥을 맛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런 다음 그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복음이 참됨을 압니다. 그 사실을 항상 알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 배웠죠.

교회는 뒤죽박죽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뒤죽박죽인 것은 접니다. 그 사실도 항상 알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잃어버린 양들을 대변하듯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잘못된 것은 저라는 사실을 압니다. 저는 돌아오고 싶습니다. 돌아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저를 받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받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그에게 그 점을 제대로 알려 주지 못했습니다. 모임이 끝난 후 회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 시장에게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대회가 끝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스테이크 회장님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 교훈을 확인해 보기 위해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장님이 바라는 대로 했다면 회장님은 그분 아버지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렇죠? 아니면 그의 형제인 감독을 불렀겠지요.”

그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두 사람 모두 5분을 받았으면 감동적인 15분, 20분짜리 설교를 하고, 그것이 모든 청중에게도 받아들여졌을 거예요. 허나 잃은 양을 찾는 일은 없었겠지요.”

와드와 스테이크를 이끄는 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양들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이 들어오도록 옆으로 비켜 주십시오. 우리는 문을 막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문은 좁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 문을 막고 서 있으면서 그들을 문 안으로 잡아 끌려는 어색한 자세를 취하기도 합니다. 그들을 들어올리는 영을 지닐 때에만, 우리 앞으로 그들을 밀어 주고 우리 위로 높여줄 때, 우리는 간증을 싹트게 하는 영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태복음 9:12)

표준을 낮추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표준이 낮을 때보다 표준이 높을 때 더 많은 잃어버린 양들이 더 빨리 반응할 것입니다. 영적인 훈육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훈육은 사랑의 한 형태이자 사랑의 표현입니다. 훈육은 사람들의 삶에 꼭 필요하고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유아가 길 가까이에서 놀고 있으면 우리는 조심스레 아이를 비켜갑니다. 멈춰서 그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필요하다면 아이를 가르치십시오. 그 아이가 내 자녀나 손주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충분히 사랑한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에 기여할 훈육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과 관심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으로 표현하고 간증으로 확인하는 영적 훈육은 영혼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