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내 구주 살아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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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내 구주 살아 계시다

“우리 구주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속박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저는 가족 사진첩 몇 권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족 소풍과 생일, 가족 모임, 기념일 등에 모였던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차례로 넘기는 동안 수많은 소중한 추억이 마음속에 차올랐습니다. 사진을 찍은 이후로 사랑하는 가족들 가운데 몇몇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너는 사랑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그리하여 너는 죽는 자들을 잃음을 슬퍼할지니”1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품을 떠난 분들 하나하나가 모두 그립습니다.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죽음은 필멸의 경험에서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우리는 전세를 떠나 이 지상에 옴으로써 이곳에서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시인 워즈워드는 “불멸의 송가”라는 영감에 찬 그의 시를 통해 이 여행의 의미를 잘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출생은 그저 잠들어 기억나지 않는 것

우리와 함께 뜬 영혼들은 마치 인생의 별처럼

다른 어딘가에서 이미 지고 있네

완전히 잊지도 않은 채

완전히 벌거벗지도 않은 채

저 멀리서부터 왔건만

영광의 구름을 끌고 우리는

우리 어렸을 적 지내던 그 천국 같던 곳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가 2

인생은 계속됩니다. 유년 시절 이후에 청소년기가 오고, 어느덧 모르는 사이에 성년기가 찾아옵니다. 인생의 목적과 문제들을 찾고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는 결국 인생의 길이에 관한 질문과 각 개인의 영원한 삶에 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질문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거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야 할 때 가장 강하게 떠오릅니다.

그런 순간 우리는 오래 전 욥이 물었던 보편적인 질문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3라고 수세기 전에 질문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회의론자들의 음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고 있으며, 각 사람은 자신이 누구의 말을 들을지 선택해야 합니다. 유명한 변호사이자 회의론자인 클라렌스 대로우는 “어떤 인생도 그다지 큰 가치는 없으며, 모든 죽음은 그저 사소한 상실일 뿐이다.”4라고 선언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이며 비관론자인 쇼펜하우어는 “영원한 것을 바라는 것은 커다란 실수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5라고 적었습니다. 또한 마치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새로운 세대의 말들이 여기에 더해지고 있으며, 그들은 주님의 기적을 변경하고, 그분의 신성함에 회의적이며, 그분의 부활을 거절합니다.

로버트 블래치포드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과 내 이웃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기도와 불멸과 같은 기독교의 신앙을 격렬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내가 증명하려 했던 모든 것들을 너무나 명백하고 충분히 증명했기에 제아무리 위대하거나 능력이 있는 기독교도 내 질문에 답하거나 내 주장을 뒤흔들 수 있지 못할 것이다.”6 그는 회의론의 벽으로 자신을 둘러쌌습니다. 그런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벽이 갑자기 무너져 먼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노출되었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천천히 그는 자신이 경멸하고 조롱했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태도에 이런 심오한 변화를 일으켰을까요? 그의 아내가 죽었던 것입니다. 상한 마음으로 그는 아내의 필멸의 몸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너무도 사랑했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방을 나오면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아내가 맞긴 한데 그녀가 아니야. 모든 것이 변했어. 전에는 있던 무엇인가가 떠나버렸어. 아내는 전과 같지 않아. 영혼 말고 그 무엇이 그렇게 가버릴 수 있었을까?”

훗날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죽음은 일부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그저 방을 옮겨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다른 방에서 우리는 … 우리가 사랑했으나 잃어버렸던 그리운 여성과 남성과 귀여운 아이들을 찾게 될 것이다.”7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세상의 회의와 의심에 맞서 우리는 중요한 참고 자료, 의심할 바 없는 근거, 심지어 눈으로 본 목격자의 증언을 구합니다. 성경에서 잔인한 죽음을 맞은 순교자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8

고린도인들에게 전한 바울의 감동적인 간증을 듣고 누가 설득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 보이셨나니.” 또 바울이 말하길, “맨 나중에 … 내게도 보이셨느니라”9

이와 똑같은 간증이 우리의 경륜의 시대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시드니 리그돈과 함께 간증하는 가운데 담대하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에 대하여 드린 많은 간증 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에 대하여 드리는 간증은 이러하니, 곧 그는 살아 계시다는 것이니라.”10

이것은 확증하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위로하는 진리입니다. 슬픔으로 고개숙인 사람들을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확신입니다.

1997년 성탄절 전날 저는 한 훌륭한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 가족은 하나같이 진리에 대해, 그리고 부활의 실재에 대해 흔들림 없는 간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네 자녀가 있었고, 아들 셋과 딸 하나였는데, 각 자녀는 근육 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을 갖고 태어난 신체장애자였습니다. 당시 열여섯이었던 마크는 몸을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해 척추 수술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다른 두 소년, 열세 살의 크리스토퍼와 열 살의 제이슨도 비슷한 수술을 받기 위해 며칠 뒤에 캘리포니아로 떠나야 했습니다. 외동딸인 셰나는 당시 다섯 살로 아름다운 아이였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총명하고 신앙이 돈독했으며, 부모인 빌과 셰리가 각 자녀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잠시 방문한 동안 그 가족의 특별한 영이 제 사무실과 제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 아버지와 제가 수술을 앞둔 두 소년에게 축복을 주었고, 그런 뒤 부모는 어린 셰나가 저를 위해 노래를 불러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셰나의 폐활량이 적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셰나가 해보고 싶어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카세트에 녹음된 반주에 따라 아름답고 깨끗한 음성으로 셰나는 한 음도 놓치지 않고 더 밝은 미래에 대해 노래했습니다.

내가 꿈꾸는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내가 보고 싶은 세상에

태양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곳이 있어요

나를 위해 하늘에서 빛나죠

이 아름다운 겨울 아침에

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어쩌면

꿈꾸는 아름다운 날이

지금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 11

노래가 끝나자 우리의 얼굴에 고조된 감정이 역력했습니다. 이 방문에 의한 영이 그 해 성탄절에 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았고, 장남인 마크가 19살이 되었을 때, 교회 본부에서 선교사로 봉사할 수 있도록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후에 다른 두 형제들 또한 그와 비슷한 선교 사업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한 일 년 전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크리스토퍼가 자신과 형제들을 괴롭혀온 그 질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후 지난 9월에 저는 막내 셰나가 열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에는 셰나를 추억하는 아름다운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남은 두 오빠들인 마크와 제이슨이 차례로 저와 연단에 몸을 의지하고 감동적인 가족 경험을 들려 주었습니다. 셰나의 어머니는 다른 한 명과 아름다운 이중창을 들려 주셨습니다. 셰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가슴 뭉클한 설교를 전했습니다. 비록 그들의 마음은 아팠으나 그들의 간증은 강하고 깊이 있었으며, 부활의 실재성, 그리고 셰나가 오빠 크리스토퍼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살아 있으며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영광스럽게 재회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간증이었습니다.

제가 말씀할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거의 9년 전쯤 그 가족이 제 사무실을 찾아왔던 일을 떠올리며 당시 셰나가 불렀던 아름다운 노래에 관해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말로 끝맺었습니다. “우리 구주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속박할 수 없습니다. 셰나는 온전히 살아 있으며, 셰나에게 있어 1997년의 특별한 성탄절 전날에 그녀가 노래했던 그 아름다운 날, 즉 셰나가 꿈꾸었던 그 날은 바로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웃고, 울고, 일하고, 놀고,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죽습니다. 죽음은 보편적인 유산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문을 지나야 합니다. 죽음은 나이들고, 지치고 힘든 사람을 찾습니다. 희망을 꽃피우고 영광스런 기대를 받는 청소년에게도 찾아옵니다. 어린 아이도 그 손아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에 따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12

한 사람, 즉 나사렛 예수와 그분의 사명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죽은 상태로 남을 것입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뉘어진 그분의 탄생으로 많은 선지자들의 영감에 찬 선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분은 높은 곳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생명과 빛과 길을 주셨습니다. 무리가 그분을 따랐습니다. 아이들이 그분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오만한 자들은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그분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범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온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 오셨지만 일부 사람들은 적이나 배신자를 맞이하듯이 그분을 맞았습니다. 소위 재판이라 하는 조롱이 뒤따랐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3라는 외침이 사방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런 다음 갈보리 언덕을 올라야 했습니다.

그분은 조롱을 당하고, 비난 받았으며, 놀림과 야유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14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15라는 외침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16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숨지[셨습니다]”17 그분의 육신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돌로 만든 무덤으로 옮겨졌습니다.

사흘 째 아주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다른 이들과 함께 무덤으로 왔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의 육신은 없었습니다.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18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주에 기독교 세계는 역사에 기록된 가장 뜻깊은 사건을 기념할 것입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는 단순한 선언이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의 부활에 대한 첫 번째 확인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빈 무덤은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19라는 욥의 질문에 대해 위안의 확신과 긍정의 대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욥의 질문을 그 답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장정이라도 죽으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계시된 진리의 빛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압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0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때 오는 눈물과 시련을 통해, 두려움과 슬픔을 통해, 마음의 고통과 외로움을 통해서 삶은 영원하다는 확신이 옵니다. 우리 주님이신 구주께서는 그 사실에 대한 살아 계신 증인이십니다.

제 온 마음을 다해 영혼의 간절함으로, 저는 특별한 증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소리 높여 간증드리고 선언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의 독생자이십니다. 우리의 구속주이시며, 그분은 우리와 아버지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그분이시며, 그분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아, 이 말은 얼마나 따뜻한 기쁨을 전해줍니까. “내 구주 살아 계시다.”21 온 세상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지식에 따라 생활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이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겸손히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