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9장: 힘겹게 싸우며


“힘겹게 싸우며”,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2) 제9장

제9장: “힘겹게 싸우며”

제 9 장

힘겹게 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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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잡지들

조셉 에프 스미스가 유럽에서 돌아온 1906년 9월 당시, 미국 상원 의원으로서 리드 스무트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프랜시스 라이먼은 다섯 달 전에 열린 연차 대회에서 사도 존 더블유 테일러와 마티아스 카울리의 사임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조셉 태너 또한 지도자 직분에서 해임되었다.1

사임과 사도 마리너 메릴이 최근에 사망하면서 생긴 십이사도 정원회의 세 공석은 조지 에프 리차즈, 올슨 에프 휘트니, 데이비드 오 맥케이로 채워졌다.2

사임 발표는 리드의 많은 상원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리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듣는 말은 상원 의원들이 전반적으로 지난 연차 대회의 조치를 교회측, 특히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의 성의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3

그러나 조사에 배정되었던 상원 위원회 위원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교회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조사를 끝낸 후, 그들은 리드를 공직에서 물러나게 할 것을 권고하는 쪽으로 표를 던졌다.4

리드의 당선이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지 4년 만인 1907년 2월, 마침내 상원 전체가 이 문제를 고려하였다. 위원회는 적대적인 증인과 우호적인 증인 100여 명이 전한 3천 쪽 이상의 증언 기록을 남겼다. 상원 의원들은 그 기록을 검토하면서 리드와의 개인적인 교류도 고려했다. 그는 워싱턴 디시에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었다. 미국의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의 확고한 지지자였으며, 상원이 그에게 우호적인 표를 던질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상원 의원들이 마침내 이 문제에 대한 판결을 내렸을 때, 그들은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스무트 상원 의원의 의원직 유임을 허락하는 쪽으로 투표했다.5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조셉 에프 스미스는 리드를 축하하고 상원 의원들의 공정한 결정에 감사를 표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성도들을 더 잘 알 수 있기를 바랐다. “성도들을 잘 알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대한 현재의 오해와 널리 퍼진 오보가 영원히 중단될 것입니다.”라고 그는 적었다.6

몇 주 후, 스미스 회장은 더 좋은 소식을 들고 1907년 4월 연차 대회를 열었다. “1906년 한 해 동안 그 어떤 해보다도 더 많은 십일조가 바쳐졌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현재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당장 갚을 수 없는 빚은 단 1달러도 없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빚을 지지 않고 현금을 바로 지불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충실함을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는 더는 돈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후기 성도들이 계속해서 신앙을 실천하고 이 십일조의 법을 지킨다면 앞으로도 그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7

설교가 끝난 후, 스미스 회장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가 성도들의 믿음과 가치관에 대해 준비한 공개 성명서를 올슨 에프 휘트니에게 낭독하게 했다. 이 성명서는 스무트 청문회 동안 교회와 회원들에 대해 제기된 많은 혐의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성도들에게 전하는 기본적인 복음 원리와 실천에 대한 공식적인 요약문이기도 했다. 이 성명서는 “우리의 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여 설립되었습니다.”라고 확언했다.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지상에 회복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성명서는 성도들을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총명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일부일처 결혼을 포함하여 가정과 가족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증언했다. “전형적인 ‘몰몬’ 가정은 가족의 성전입니다. ‘몰몬’ 사람들은 복수 결혼 금지법에 공손히 복종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이 성명서는 개인의 선택의지와 십일조 및 신권 지도력에 대한 원리도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도들의 애국심, 지상의 정부에 대한 충성,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약속을 증명했다. “우리는 모든 정당과 모든 종교의 시민들과 함께 평화롭게 신뢰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성명서는 회복된 복음이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상시키려 한다고 언급했다. “우리의 종교는 우리의 삶과 엮여 있고, 우리의 인격을 형성했으며, 그 원리에 담긴 진리는 우리의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8

휘트니 장로가 성명서 낭독을 마친 후, 프랜시스 라이먼은 십이사도 정원회를 대표하여 성명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런 후 스미스 회장의 권유에 따라, 회중은 만장일치로 찬성 표시를 함으로써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지지했다.9


1908년 4월 16일, 최초의 흑인 후기 성도 중 한 명인 제인 매닝 제임스가 솔트레이크시티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847년 9월에 브리검 영의 선발대를 따라 서쪽으로 간 성도 중 첫 번째 부대의 일원으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솔트레이크밸리에 왔었다.10 그때부터 그녀는 그 도시에서 유명인사였다. 제인은 18명의 손주와 7명의 증손주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오빠 아이작과 함께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의 교회 모임에 나갔고, 교회의 “노인네들”과 개척자들의 재회 모임에도 자주 참석했다.11

제인의 장례식은 솔트레이크시티 제8와드 집회소에서 거행되었다. 예배당은 제인의 삶을 추억하기 위해 온 흑인과 백인 친구들로 붐볐다. 그곳은 제인의 신앙과 선함을 기리기 위한 꽃들로 채워졌다.

제인의 친구 엘리자베스 라운디는 제인이 몇 년 전에 그녀에게 받아쓰게 한 짤막한 자서전 초고를 읽었다. 제인은 노예 제도가 여전히 합법이었고 전 세계 흑인들이 자주 사회적 하급자로 취급받던 시기에 자유민으로 태어났다. 제인의 자서전에는 미국 동부에서 개종하고, 가족들이 나부까지 약 1,200킬로미터를 걸어갔고,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가족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일했던 그녀의 경험이 담겨 있었다. 또한 에머 스미스가 어떻게 제인에게 그녀와 조셉의 가족으로 입양되도록 두 번이나 권유했는지에 대해서도 서술되어 있었다.12

자서전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인은 열렬한 간증을 남겼다. 그녀는 과부였고, 자녀 둘과 손주 열 명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와 손주들보다 오래 살았으며,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제인은 이렇게 확언했다. “주님은 무력한 상태에 있는 나를 지켜 주시고 잘 보살펴 주신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 가르침받은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현재 나의 신앙은 처음 침례받았던 날 신앙만큼, 아니 그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13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제인의 장례식에서 말씀을 전했다. 여러 해 동안 제인은 자신과 죽은 가족들을 위한 성전 의식을 받기 위해 이따금 그에게 도움을 구했었다. 제인은 특히 엔다우먼트를 받고 어떤 가족에게든 인봉되기를 갈망했다.14 그러나 1850년대 초반부터 교회는 아프리카계 성도들이 신권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침례 외에는 어떤 성전 의식도 받지 못하도록 제한해 왔다. 제한을 두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다양했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추측에 근거한 것이었다. 브리검 영은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성도가 언젠가는 복음의 모든 의식과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었다.15

다른 흑인 성도들처럼, 제인은 죽은 친족을 위해 침례를 받았다. 그녀는 또한 대리인을 통해 엔다우먼트를 받고 워커 루이스에게 인봉되기를 요청했었다. 워커는 그 제한 규정이 발효되기 전에 신권을 소유했던 몇 안 되는 흑인 성도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그녀는 조셉 스미스의 가족으로 입양되어 인봉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인이 엔다우먼트나 인봉을 간청할 때마다 조셉 에프 스미스나 교회의 다른 지도자는 교회의 제한 규정을 고수했다.16

그러나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인 지나 영의 도움으로, 제인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조셉 스미스의 가족과 영원히 함께하도록 허락받았다. 제인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제인을 하인으로서 그 가족과 결합하는 대리 의식을 준비했다. 그 의식에서 지나 영은 제인의 대리인 역할을 했으며, 조셉 에프 스미스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17

비록 제인은 그 의식에 불만을 느꼈지만, 계속 충실히 생활했다. “나는 십일조와 헌금을 내고, 지혜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제인은 말했다.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미약하나마 모든 사람에게 좋은 모범이 되려고 노력한다.”18

1902년에 제인은 조셉 에프 스미스의 형인 축복사 존 스미스에게 자신이 언제 엔다우먼트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주님이 그녀를 지켜보고 계시다고 확신시키며, “인내하고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했다. 존은 주님께서 “그녀가 꿈꾸었던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제인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젠가 모든 성전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했다.19

장례식이 끝난 후, 제인은 솔트레이크시티 묘지에 묻혔다. 『데저렛 뉴스』[Deseret News]는 “신앙과 충실함 면에서 제인 매닝 제임스보다 더 잘 알려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라고 칭송했다. “비록 이 지상에서는 미천하게 살았지만, 그녀의 친구와 지인은 수백 명에 달한다.”20


1909년 7월, 『솔트레이크 트리뷴』[Salt Lake Tribune]이 성명서 이후 새로운 복수 결혼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들의 명단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명단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에 경종을 울렸다. 조셉 에프 스미스는 즉시 사도 프랜시스 라이먼, 존 헨리 스미스, 히버 제이 그랜트를 지명하여 그 사안을 조사하고 두 번째 성명서 이후 복수 결혼에 대한 교회의 정책을 위반한 성도들을 징계하게 했다.21

이 조사는 1년 이상 지속되었고, 최근에 복수 결혼을 했거나 새로운 복수 결혼을 집행한 두 남성을 파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제일회장단은 또한 모든 스테이크 회장단에게 서한을 보내어 감독들에게 두 번째 성명서를 위반한 자들을 징계하도록 지시하라고 명했다. 그들은 서한에서 “우리는 누구든 이 중요한 규칙과 조치를 위반하는 사람은 개인적인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도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라고 말했다.22

이 무렵 미국의 인기 잡지 『피어슨스』[Pearson’s]가 교회를 비판하는 기사를 잇따라 게재했다. 이 기사들은 『솔트레이크 트리뷴』에 실린 새로운 복수 결혼 가담자 명단을 근거로, 교회가 부정직하고 부패하다고 비난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는 또 다른 인기 잡지 『에브리바디스』[Everybody’s]가 조지 큐 캐넌의 아들 프랭크 캐넌이 쓴 비슷한 글을 연재할 계획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23

프랭크는 유타주 출신의 전직 상원 의원이었고, 한때 제일회장단의 고문이었다. 그러나 과음, 외도, 그 밖의 부정 행위로 그는 교회 지도자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는 교회와 조셉 에프 스미스를 신랄히 비판하고 나섰다. 그가 전에 성도들 사이에서 누렸던 지위는 그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 주는 듯했다.24

프랭크의 계획을 알게 된 조셉 에프 스미스와 안톤 룬드는 즉시 『에브리바디스』의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프랭크의 글은 허위이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당시 잡지 편집자들은 자주 추문과 폭로 기사 보도에 열을 올렸고, 편집자는 즉시 프랭크의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곧 그 잡지에 대한 구독 신청이 전국에서 쇄도했다.25

프랭크는 과거에 후기 성도였다가 교회를 공개적으로 공격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집필 활동을 통해 교회에 피해를 입히려 했던 이들에는 에즈라 부스, 존 시 베넷, 티 비 에이치, 패니 스텐하우스, 윌리엄 자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가 쓴 연재물의 인기는 낙담케 하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교회는 여론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26


베를린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에머 루시 게이츠가 두 번째 커튼콜을 받고 등장하자, 소수의 후기 성도 학생들과 스위스-독일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루시는 10년 전에 존과 리아 윗소와 함께 독일에 처음 온 이후로 유럽 오페라에서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고, 유명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청중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무대 위의 루시는 구석진 맨 위층 관람석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과 지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유타 꾀꼬리”라고 불렀다. 그들 중 다수는 그날 밤 그녀의 성공을 위해 기도했고, 일부는 그녀를 위해 금식도 했다.27

신문들은 그녀의 공연을 칭찬했다. 한 평론가는 “그녀의 목소리 상태는 전혀 흠잡을 데가 없으며, 섬세하고 선명한 기교가 진정한 음악 예술을 보여 주었다.”라고 썼다.28

몇몇 평론은 루시의 불완전한 독일어를 지적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출신지나 종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교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루시는 자신이 교회 회원이라는 사실을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 비밀로 해 두었다. 대부분의 독일 성도들은 지역 사회에서 괴롭힘을 당했고, 선교사들은 자주 벌금, 추방, 체포, 투옥의 대상이 되었다.29

루시의 발성 교사인 블랑쉬 코렐리 부인은 그녀에게 커리어를 위해 종교를 숨기라고 권했었다.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루시는 어머니 수사 게이츠에게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을 개신교 신자로 소개했다고 말했다. 루시는 자신의 종교를 숨기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편견으로 자신의 미래가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30

수사는 딸의 선택을 지지했다. 수사는 자신이 스미스 회장에게 그 문제를 이야기했으며, 종교를 비밀로 한 것을 그도 괜찮게 여긴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 제이컵 게이츠도 지지를 보냈다. 그는 “너는 네가 참되다고 알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서가 아니라 좋은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잖니.”라고 썼다.31

1910년 여름, 교회에 대한 독일의 반대가 더 심해지자 루시는 베를린에서 성도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예배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베를린 경찰은 최근 21명의 후기 성도 선교사와 관광객, 학생들을 체포했다. 당국이 18시간 후에 그들을 감옥에서 풀어 주었을 때, 풀려난 이들을 “바람직하지 않은 외국인”이라고 그 도시에서 추방하였다. 소수의 학생들만이 교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혹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남을 수 있었다.32

9월에 3주간 교회 모임에 가지 못한 루시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성찬을 취하고 싶은 갈망이 컸다. 그녀는 자신이 괴팅겐에서 리아와 존과 함께 했던 것처럼 베를린에서 미국 성도들을 위한 작은 성찬 모임을 열자고 제안했다. 베를린에서는 모든 종교 모임을 공식적으로 등록해야 했기에 그 작은 모임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그 모임에서 미국인 성도들은 성찬을 취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간증을 했다. 루시는 경전을 포함하여 몇 권의 교회 서적을 베를린으로 가져왔었다. 그래서 두 번째 모임에서 그들은 교리와 성약을 공부하고 한 시간 동안 부활의 교리에 대해 토론했다.

루시는 그 모임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에서 어머니에게 주의를 주었다. “엄마, 이런 상황을 절대로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말아 주세요.” 독일 정부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나오는 언론 보도를 감시했다. 만약 그들의 비밀 모임에 관한 기사가 유타 신문에 나고 베를린 경찰이 그걸 알아차린다면, 루시와 그녀의 친구들은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었다.

“우리가 감옥에 갈 수도 있어요.” 루시는 이렇게 썼다. “그러니까 제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조심해 주세요.”33


1911년 1월과 2월, 뉴욕시의 잡지 『매클루어스』[McClure’s] 잡지는 “몰몬의 일부다처제 부활[The Mormon Revival of Polygamy]”이라는 제목으로 성명서 이후의 복수 결혼에 관한 2부작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들의 출현으로, 이제 미국에서 가장 널리 유포되는 잡지 중 세 곳이 교회를 공격하는 글을 게재하게 되었다. 그 기사들은 수백만 독자에게 전해졌다.34

『매클루어스』의 기사는 성명서 이후 21년 동안 1,500건에서 2,000건 사이의 복수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추정했다. 실제로 그 수는 260건 정도였지만, 그 사실이 저자의 허위 기사 작성을 막지는 못했다. 저자는 “이 관행이 사라질 즉각적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최소 앞으로 50년 동안은 새로운 복수 결혼을 실행하여 그 관행을 번성시킬 젊은이들이 충분히 있다고 여겼다.35

이 기사는 유타의 교회에서 성장한 뉴욕시 기자 아이크 러셀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는 사도 팔리 피 프랫의 손자였고, 아내의 고모부는 뉴욕시의 선교부 회장이었다. 아이크는 십 대 시절에 교회를 떠났지만, 유타에서 나오는 소식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으며, 성도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36

아이크는 『매클루어스』 기사에 허위이거나 호도하는 내용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났다. 한 면에는 성명서 이후 복수 결혼을 한 사도들 7명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에 딸린 설명문에는 “이들 중 계시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파문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그중 다섯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둘은 이제는 십이사도 정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존 더블유 테일러와 마티아스 카울리였다. 그 기사는 또한 사진 속의 사도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일부일처주의자인 후임들로 교체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37

아이크는 『매클루어스』 편집자에게 그 기사의 숱한 오류를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다른 잡지사에도 편지를 썼지만, 편집자들은 대부분 그를 무시했다.38

그러자 그는 다른 것을 시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피어슨스』에 실린 한 기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선거 기간에 표를 얻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과 거래를 했다고 주장했다. 만약 아이크가 편지로 루스벨트에게 그 주장을 부인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는 이를 통해 그 기사의 신빙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었다.

아이크는 앉아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각하께서 기록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저에게 도움을 주시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씁니다.”39


한편, 영국에서, 사도이자 유럽 선교부 회장인 러저 클로슨은 영국 정부가 후기 성도의 선교 사업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이 여러 도시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려 애쓰는 것을 의식한 일부 의원들은 영국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몇몇 영국 기자들이 성도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지만, 영국의 많은 사람은 계속 선교사들을 이상한 사상을 가르치고 영국 여성들을 복수 결혼으로 유인하는 외국 교회의 대표자로 여겼다.40

교회를 비난하는 이들은 이러한 공포를 조장하며, 후기 성도 여성들이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선교사로서 했던 훌륭한 일들을 허사로 만들었다. 여전히 가끔 강의를 하는 윌리엄 자먼의 전철을 따라, 과거에 후기 성도였던 미국 출신의 또 한 사람도 그 나라를 돌아다니며 교회에서 겪었던 일들을 몹시 비판적으로 이야기했다. 다른 비난자들은 적대적인 서적을 출판하고 성도들에 대한 반발을 주도했다.41

1911년 초, 러저는 윈스턴 처칠 영국 내무 장관에게 정부와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는 편지를 썼다. 러저는 “조사가 있을 경우, 우리는 무엇이든 기꺼이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곧 교회와 교회의 선교 사업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그는 “저는 진지하게 조사에 임하고 있습니다.”라고 의회에 말했다.42

영국에서 교회에 대한 반대는 봄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4월의 어느 일요일, ‘리버풀 반몰몬 운동’이라는 이름의 한 단체가 30여 명의 성도들이 한 회관에 모여 모임을 하고 있던 버켄헤드 마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군중에게 자극을 받은 일부 폭도는 회관 밖에 모여 있는 경찰들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폭도들은 회관 창문에 돌을 던졌다.

폭력 사태가 커지자 경찰관들은 문제를 일으킨 이들을 체포하려 했지만, 폭도들은 경찰들에 맞서 싸웠다. 일부 폭도는 선교사들에게 7일 이내에 버켄헤드를 떠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주었다.

대회를 감리하던 선교사 리처드 영은 “그 말에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또한 기꺼이 감수할 텐가?”

한 폭도의 말에 그는 “네.”라고 답했다.43

지역 신문들은 폭동과 폭도의 최후통첩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고, 많은 사람은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몹시 궁금해했다. 러저는 선교사들이 그 마을에 남아 있으면 신체적으로 해를 입을 것이 우려되었다. 하지만 리처드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상의한 끝에 러저는 그들이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만약 장로들이 버켄헤드를 버린다면, 폭도가 다른 마을에서도 선교사들을 몰아내려 할 때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44

러저는 그다음 일요일을 선교사들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는 날로 지정했다. 날이 밝자, 버켄헤드의 장로들은 폭동 이후 첫 공개 모임을 하기 위해 모였다. 출동한 경찰들은 회관 앞에 한 줄로 늘어섰다. 곧 약 5천 명의 군중이 모였고, 폭도는 관악대와 함께 가두 행진을 하며 경찰 앞을 지나갔다. 군중은 폭도를 응원했지만,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폭도에 맞선 장로들의 저항은 그 상황을 지켜본 일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일로 우리에 관한 신문 기사의 논조가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러저는 제일회장단에 보고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후기 성도들에 대한 학대와 적의의 분위기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45

그 기간에도 윈스턴 처칠은 교회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다. 경찰들은 전국에 걸쳐서 교회 회원이 되어 유타로 이민을 간 젊은 여성들의 가족들을 심문했고, 정부 대표들은 예배에 참석했다. 그 누구도 교회나 선교사들이 해를 끼치고 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이에 만족한 처칠은 선교사들을 추방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짓고, 성도들에 대한 법적 조치를 권고하지 않았다.46


유타에서 조셉 에프 스미스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아이크 러셀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사본을 받아 보았다. 그 편지에서 루스벨트는 유타의 표를 얻기 위해 성도들과 거래를 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루스벨트는 아이크에게 말했다. “그 비난은 그저 허위일 뿐만 아니라 너무 터무니없어서 진지하게 논하기도 어렵군요.”47

조셉은 아이크가 이 편지를 『콜리어스』[Collier’s]에 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콜리어스』는 약 백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잡지였다. 리드 스무트 또한 조셉에게 그 공격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수사를 피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리드는 경고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셉은 그 잡지 기사에 거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48

그 후 1911년 4월 초, 그는 리드에게 전보를 쳐서 동부 지역에 교회의 공식 반응을 게재할 신문사가 있을지 문의했다. 리드는 즉시 몇몇 신문사에 연락을 했지만,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했다. 한편, 아이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편지가 『콜리어스』에 실리도록 조처했다. 조셉은 그것에 기뻐하며, 그 편지와 잡지 기사에 대한 교회의 대답을 소책자로 발행하여 미국과 영국 전역의 저명한 시민들에게 배부하게 했다.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잡지들은 교회에 관한 새로운 기사를 계속 내고 있었다. 3월에 네 번째 잡지인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은 교회를 단란한 가정을 공격할 태세를 갖춘 독사에 비유한 세 가지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다른 잡지들처럼, 그 기사도 교회가 여전히 복수 결혼을 장려한다고 주장했다.50

이 무렵, 프랜시스 라이먼은 존 더블유 테일러와 마티아스 카울리가 최근에 새로운 아내와 복수 결혼을 했고 더 많은 복수 결혼을 집행했다는 보고를 듣게 되었다. 그와 그가 소속된 위원회는 두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났다. 그 만남에서 존 더블유는 완고했다. 그는 실제로 1909년에 또 다른 복수 아내와 결혼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부인하는 것도 거부했다.51 마티아스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결국, 십이사도 정원회는 존 더블유를 파문하고 마티아스에게는 신권 권세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52

과거 사도였던 이들에게 징계가 내려진 후, 조셉 에프 스미스는 워싱턴 디시로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리드와 앨리 스무트의 집에서 한 기자를 만났다. 그 기자는 정치, 교회 재정, 그리고 평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에서 제기되는 기타 사안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나 사실 질문의 대부분은 복수 결혼에 관한 내용이었다. 조셉은 잡지를 통해 떠도는 그릇된 보도를 바로잡기를 열망하며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몰몬들 사이에서 일부다처제는 이제 완전히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며, 교회는 이를 금하고 있습니다.”라고 조셉은 말했다.

이에 기자가 “몰몬 교회가 현재 일부다처제를 완전히 금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진지하고 양심적으로 일부다처제와 싸우고 있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예전에 교회의 사도이자 교회를 관리하는 평의회의 일원이었던 테일러 씨가 파문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53

그 인터뷰는 며칠 뒤 신문에 실렸고, 곧 성도들에 대한 다른 호의적인 기사들이 이어졌다. “회장님이 이곳을 방문하고 나서부터 좋은 소식만 들립니다.” 리드가 조셉에게 말했다. “저는 그것이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54

잡지사들은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다루는 것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해 여름 후반에 조셉은 최근의 소란을 곰곰이 생각하며 아이크 러셀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여론이 바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힘겹게 싸우며 헤쳐 나와야 했으며, 승리를 거둘 때까지 이런저런 반대가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55

  1. “Joseph F. Smith Is Now in Zion,” Salt Lake Tribune, Sept. 30, 1906, 1; Francis Marion Lyman, Journal, Apr. 8, 1906; “J. M. Tanner Dropped from Two Boards,” Salt Lake Telegram, Apr. 10, 1906, 6; Church Board of Education, Minutes, Apr. 25, 1906, 51. 조셉 태너는 학년 말까지 교회에 대한 계약상의 의무를 완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2. John Henry Smith, Diary, Apr. 8, 1906; Francis Marion Lyman and George Albert Smith, in Seventy-Sixth Annual Conference, 79–80, 93–94. 주제: 십이사도 정원회

  3. Reed Smoot to Charles Penrose, Apr. 30, 1906, Reed Smoot Papers, BYU.

  4. “Senator Smoot’s Case,” Evening Star (Washington, DC), June 11, 1906, 6.

  5. Flake, Politics of American Religious Identity, 5; Paulos, Mormon Church on Trial, xxiv–xxxiii; Heath, “First Modern Mormon,” 1:179, 184–87; Winder, “Theodore Roosevelt and the Mormons,” 12–13; “Smoot Keeps His Seat,” Evening Star (Washington, DC), Feb. 21, 1907, 9; “Senator Smoot Seated,” Washington (DC) Times, Feb. 21, 1907, 10. 주제: Reed Smoot Hearings[리드 스무트 청문회]; 미국의 법적 제도와 정치 제도

  6. Joseph F. Smith to Reed Smoot, Feb. 23, 1907, Reed Smoot Papers, BYU.

  7. Joseph F. Smith, in Seventy-Seventh Annual Conference, 7. 주제: 십일조; Church Finances[교회 재정]

  8. Address to the World,” and “An Address,” in Seventy-Seventh Annual Conference, 8–9, 3–16 (second numbering).

  9. Address to the World,” in Seventy-Seventh Annual Conference, 9.

  10. “Death of Jane Manning James,” Deseret Evening News, Apr. 16, 1908, 1; “First Negroes to Join Mormon Church,” Salt Lake Herald, Oct. 2, 1899, 5; 『성도들』, 제2권, 제5장 및 제6장;James, Jane Elizabeth,” Pioneer Database, history.ChurchofJesusChrist.org/overlandtravel; see also “James, Jane Elizabeth Manning,”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주제: 제인 엘리자베스 매닝 제임스

  11. “Death of Jane Manning James,” Deseret Evening News, Apr. 16, 1908, 1; James, Autobiography, [8]; Newell, Your Sister in the Gospel, 128; see also, for example, “Old Folks’ Day at the Lagoon,” Salt Lake Herald, June 27, 1902, 5; and “Salt Lake Observes Day of the Pioneers,” Salt Lake Tribune, July 26, 1904, 1.

  12. “‘Aunt Jane’ Laid to Rest,” Deseret Evening News, Apr. 21, 1908, 2; “James, Jane Elizabeth Manning,”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James, Autobiography, [1], [6]. 주제: 조셉과 에머 헤일 스미스 가족; 노예 제도와 노예 제도의 폐지

  13. James, Autobiography, [8]; Newell, Your Sister in the Gospel, 72–73; “James, Jane Elizabeth Manning,”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14. “‘Aunt Jane’ Laid to Rest,” Deseret Evening News, Apr. 21, 1908, 2; Jane James to Joseph F. Smith, Feb. 7, 1890, Joseph F. Smith Papers, CHL; Jane James to Joseph F. Smith, Aug. 31, 1903, First Presidency Temple Ordinance Files, CHL;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Minutes, Jan. 2, 1902,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J. Willard Marriott Library, University of Utah, Salt Lake City.

  15. 인종과 신권”, 복음 주제 관련 글, ChurchofJesusChrist.org/study/manual/gospel-topics-essays; Hardy, Solemn Covenant, 12.

  16. Newell, Your Sister in the Gospel, 97–100, 106–8, 114, 119; 『성도들』, 제2권, 제39장; “James, Jane Elizabeth Manning,”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Reiter, “Black Saviors on Mount Zion,” 105–13. 주제: 신권 및 성전 제한; 죽은 자를 위한 침례

  17. Zina D. Young to Joseph F. Smith, June 15, 1894, First Presidency Temple Ordinance Files, CHL; Salt Lake Temple, Sealings for the Dead, Couples, 1893–1942, volume A, May 18, 1894, microfilm 184,587, U.S. and Canada Record Collection, FHL; Newell, Your Sister in the Gospel, 114–15.

  18.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Minutes, Jan. 2, 1902,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J. Willard Marriott Library, University of Utah, Salt Lake City; James, Autobiography, [8].

  19. Clawson, Journal, Nov. 13, 1902; Jane James to Joseph F. Smith, Aug. 31, 1903, First Presidency Temple Ordinance Files, CHL. 제인 매닝 제임스를 위한 대리 성전 의식은 1979년에 행해졌다.

  20. “‘Aunt Jane’ Laid to Rest,” Deseret Evening News, Apr. 21, 1908, 2; “Death of Jane Manning James,” Deseret Evening News, Apr. 16, 1908, 1.

  21. “But One of Many Cases,” Salt Lake Tribune, July 28, 1909, 4; “Some New Polygamists,” Salt Lake Tribune, Nov. 13, 1909, 6; George F. Richards, Journal, July 14, 1909; Francis Marion Lyman, Journal, July 14 and 21–22, 1909; John Henry Smith, Diary, July 14, 1909. 주제: Plural Marriage after the Manifesto[성명서 이후의 복수 결혼]

  22. Francis Marion Lyman, Journal, Jan. 7, 1910; Feb. 9–10, 1910; Sept. 28, 1910; Oct. 3, 1910; George F. Richards, Journal, July 21–22, 1909; Sept. 22, 1909; “Excommunication,” Deseret Evening News, Sept. 28, 1910, 1; “Excommunication,” Deseret Evening News, Oct. 3, 1910, 1; First Presidency to Presidents and Counselors, Oct. 5, 1910, in Clark, Messages of the First Presidency, 4:216–18; Hales, Modern Polygamy and Mormon Fundamentalism, 95–105.

  23. Richard Barry, “The Political Menace of the Mormon Church,” Pearson’s, Sept. 1910, 24:319–30; “The Mormon Evasion of Anti-polygamy Laws,” Pearson’s, Oct. 1910, 24:443–51; “The Mormon Method in Business,” Pearson’s, Nov. 1910, 24:571–78; Cannon, “Magazine Crusade against the Mormon Church,” 4, 6–8; Smoot, Diary, Oct. 18, 1910, Reed Smoot Papers, BYU.

  24. Cannon, “Cannon’s National Campaign,” 65, 105; Cannon, “Wives and Other Women,” 83.

  25. Joseph F. Smith and Anthon H. Lund to John O’Hara Cosgrave, Oct. 20, 1910, First Presidency Cumulative Correspondence, CHL; Tichi, Exposés and Excess, 65–72, 76–83; Frank J. Cannon and Harvey J. O’Higgins, “Under the Prophet in Utah,” Everybody’s Magazine, Dec. 1910, 23:722–37, 99–104 [second numbering]; Jan. 1911, 24:29–35; Feb. 1911, 24:189–205; Mar. 1911, 24:383–99; Apr. 1911, 24:513–28; May 1911, 24:652–64; June 1911, 24:825–35; Frank J. Cannon and Harvey J. O’Higgins, “The New Polygamy,” Everybody’s Magazine, July 1911, 25:94–107; Frank J. Cannon and Harvey J. O’Higgins, “The Prophet and Big Business,” Everybody’s Magazine, Aug. 1911, 25:209–22; Cannon, “Cannon’s National Campaign,” 65–74.

  26. 『성도들』, 제1권, 제13장, 제39장; 『성도들』, 제2권, 제25장, 제27장; Howard, “William Jarman,” 61.

  27. Lucy Gates to “Dearest Ones,” Apr. 6, 1909, Emma Lucy Gates Bowen Papers, BYU; Horace G. Whitney to the Burtons and others, Apr. 18, 1909, Susa Young Gates Papers, CHL; Horace G. Whitney, “Emma Lucy Gates Scores a Big Hit,” Deseret Evening News, Apr. 26, 1909, 1; “Emma Lucy Gates Sings in the Berlin Royal Opera House,” Deseret Evening News, May 8, 1909, 26.

  28. Horace G. Whitney, “Emma Lucy Gates Sings in the Berlin Royal Opera House,” Deseret Evening News, May 8, 1909, 26; Horace G. Whitney, “Emma Lucy Gates Scores a Big Hit,” Deseret Evening News, Apr. 26, 1909, 1; Horace G. Whitney to the Burtons and others, Apr. 18, 1909, Susa Young Gates Papers, CHL.

  29. Lucy Gates to “Dearest Ones,” Apr. 6, 1909, Emma Lucy Gates Bowen Papers, BYU; Horace G. Whitney, “Emma Lucy Gates Sings in the Berlin Royal Opera House,” Deseret Evening News, May 8, 1909, 26; Alexander, Mormonism in Transition, 227–30; Mitchell, “Mormons in Wilhelmine Germany,” 152–56, 163–70; Allen, Danish but Not Lutheran, 161–76.

  30. Lucy Gates to “Dearest Ones,” Apr. 6, 1909, Emma Lucy Gates Bowen Papers, BYU; Horace G. Whitney to the Burtons and others, Apr. 18, 1909, Susa Young Gates Papers, CHL; Arthur M. Abell, “Enrico Caruso,” Musical Courier, Nov. 18, 1908, 57:6.

  31. Susa Young Gates to Lucy Gates, Apr. 12, 1910; Jacob Gates to Lucy Gates, Apr. 13, 1910, Susa Young Gates Papers, CHL.  

  32. Thomas McKay, “Concerning the Banishment from Berlin,” Latter-day Saints’ Millennial Star, Aug. 11, 1910, 72:508–9; Swiss-German Mission, Office Journal, July 21–23, 1910, 111; Lucy Gates to “Dearest Ones,” Sept. 27 and Oct. 2, 1910, Emma Lucy Gates Bowen Papers, BYU; “Salt Lake Boy in Berlin Jail,” Deseret Evening News, Aug. 8, 1910, 5.

  33. Lucy Gates to “Dearest Ones,” Sept. 27 and Oct. 2, 1910, Emma Lucy Gates Bowen Papers, BYU, emphasis in original.

  34. Burton Hendrick, “The Mormon Revival of Polygamy,” McClure’s Magazine, Jan. 1911, 36:245–61; Feb. 1911, 36:449–64; Cannon, “Magazine Crusade against the Mormon Church,” 2–4; Wilson, McClure’s Magazine and the Muckrakers, 56, 190–200; Miraldi, Muckraking and Objectivity, 57–60.

  35. Burton Hendrick, “The Mormon Revival of Polygamy,” McClure’s Magazine, Feb. 1911, 36:458; Hardy, Solemn Covenant, 183.

  36. Cannon, “Mormon Muckraker,” 47–52; Cannon, “Magazine Crusade against the Mormon Church,” 27, note 100; “Benjamin Erastus Rich,” Missionary Database, history.ChurchofJesusChrist.org/missionary; Isaac Russell to D. B. Turney, Apr. 28, 1911, B. H. Roberts Collection, CHL.

  37. Burton Hendrick, “The Mormon Revival of Polygamy,” McClure’s Magazine, Feb. 1911, 36:457; Isaac Russell, “Mr. Roosevelt to the Mormons,” Collier’s, Apr. 15, 1911, 47:28; “Authorities Sustained,” in Eighty-First Semi-annual Conference, 114; “성명서와 복수결혼의 종료”, 복음 주제 관련 글, ChurchofJesusChrist.org/study/manual/gospel-topics-essays; Deseret News Church Almanac [1974], 133–34.

  38. Isaac Russell to B. H. Roberts, Jan. 16, 1911; Feb. 8, 1911, B. H. Roberts Collection, CHL; Burton Hendrick, “The Mormon Revival of Polygamy,” McClure’s Magazine, Feb. 1911, 36:457; Cannon, “Mormon Muckraker,” 57–59; 57, note 31.

  39. Isaac Russell to Joseph F. Smith, Feb. 11, 1913; Isaac Russell to Theodore Roosevelt, Feb. 2, 1911, First Presidency Mission Administration Correspondence, CHL; Richard Barry, “The Political Menace of the Mormon Church,” Pearson’s, Sept. 1910, 24:327.

  40. 24 Parliamentary Debate, House of Commons, 5th series, Apr. 20, 1911, 1044–45; Arthur L. Beeley, “Government Investigation of the ‘Mormon’ Question,” Improvement Era, Nov. 1914, 18:57; Bennett and Jensen, “Nearer, My God to Thee,” 118–20; Thorp, “Crusade against the Saints in Britain,” 79–81.

  41. Rasmussen, Mormonism and the Making of a British Zion, 117–19; “Mormonism Exposed by Mr. William Jarman,” East Anglian Daily Times (Ipswich, England), May 27, 1909, 4; “Jarman,” Nuneaton (England) Observer, July 12, 1912, 3; Thorp, “Crusade against the Saints in Britain,” 74–77.

  42. Rudger Clawson to Winston Churchill, Jan. 12, 1911, copy, First Presidency Mission Administration Correspondence, CHL; 22 Parliamentary Debate, House of Commons, 5th series, Mar. 6, 1911, 811, 989.

  43. “Anti-Mormon Crusade,” Evening Express (Liverpool), Apr. 3, 1911, 7; “The Mormons,” Evening Express, Apr. 19, 1911, 5; “Anti-Mormon Riots,” Evening Express, Apr. 21, 1911, 4; “Anti-Mormon Riots at Birkenhead,” Liverpool Daily Post and Liverpool Mercury, May 4, 1911, 5; Rudger Clawson to First Presidency, Apr. 25, 1911, First Presidency Mission Administration Correspondence, CHL.  

  44. “The Mormons,” Evening Express (Liverpool), Apr. 19, 1911, 5; “Anti-Mormon Campaign,” Manchester Guardian, Apr. 24, 1911, 12; Rudger Clawson to First Presidency, Apr. 25, 1911, First Presidency Mission Administration Correspondence, CHL.

  45. Rudger Clawson to First Presidency, Apr. 25, 1911, First Presidency Mission Administration Correspondence, CHL; “Anti-Mormonism,” Evening Express (Liverpool), Apr. 24, 1911, 4; “Anti-Mormon Campaign,” Manchester Guardian, Apr. 24, 1911, 12; see also “Anti-Mormon Riots,” Evening Express, Apr. 21, 1911, 4.

  46. Rudger Clawson to First Presidency, Apr. 7, 1911, First Presidency Mission Administration Correspondence, CHL; Beeley, Summary Statement, 13; Thorp, “British Government and the Mormon Question,” 308–11.

  47. Theodore Roosevelt to Isaac Russell, Feb. 4, 1911, First Presidency Mission Administration Correspondence, CHL.

  48. Smoot, Diary, Mar. 14, 16, and 22, 1911; Apr. 2, 1911, Reed Smoot Papers, BYU; Cannon, “Magazine Crusade against the Mormon Church,” 27; Reed Smoot to First Presidency, Apr. 1, 1911, First Presidency General Authorities Correspondence, CHL.

  49. Smoot, Diary, Apr. 7, 1911, Reed Smoot Papers, BYU; Isaac Russell, “Mr. Roosevelt to the Mormons,” Collier’s, Apr. 15, 1911, 47:28; Theodore Roosevelt Refutes Anti-Mormon Falsehoods, 1911; Isaac Russell, “Mr. Roosevelt to the ‘Mormons,’Improvement Era, June 1911, 14:713–18; Joseph F. Smith to Isaac Russell, Apr. 25, 1911; B. H. Roberts to Isaac Russell, May 15, 1911, Isaac Russell Papers, Special Collections, Cecil H. Green Library, Stanford University, Stanford, CA.

  50. Alfred Henry Lewis, “Viper on the Hearth,” Cosmopolitan, Mar. 1911, 50:439–50; “The Trail of the Viper,” Cosmopolitan, Apr. 1911, 50:693–703; “The Viper’s Trail of Gold,” Cosmopolitan, May 1911, 50:823–33; see also Givens, Viper on the Hearth, 97–120.

  51. Francis Marion Lyman, Journal, Jan. 5, 1911; Feb. 15 and 22, 1911; Mar. 28, 1911; Cowley, Journal, May 2, 1911; Miller, Apostle of Principle, 540–51; Hardy, Solemn Covenant, appendix 2, [422].

  52. Francis Marion Lyman, Journal, May 10–11, 1911; George F. Richards, Journal, May 11, 1911; Cowley, Journal, May 10–12, 1911; Joseph F. Smith to Isaac Russell, June 15, 1911, Letterpress Copybooks, 505, Joseph F. Smith Papers, CHL; “Excommunication,” Deseret Evening News, May 2, 1911, 2; “Official Action,” Deseret Evening News, May 12, 1911, 1. 주제: 교회 선도; Matthias F. Cowley[마티아스 에프 카울리]

  53. “No Polygamy Now,” Washington (DC) Post, June 30, 1911, 1–2.  

  54. Theodore H. Tiller, “Mormon Head Says Work and Thrift Are First Teachings of His Religion,” Washington (DC) Times, June 29, 1911, 8; “Gives Mormon View,” Evening Star (Washington, DC), June 30, 1911, 10; Reed Smoot to Joseph F. Smith, July 2, 1911, First Presidency General Authorities Correspondence, CHL.

  55. Joseph F. Smith to Isaac Russell, July 13, 1911, Letterpress Copybooks, 540–41, Joseph F. Smith Papers, CHL. 주제: Public Relations[홍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