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23장: 필요한 것은 오직


제23장

필요한 것은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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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연못과 야자수가 있는 하와이 라이에 성전의 경내

1935년 2월 6일, 열다섯 살의 코니 테일러와 다른 회원들은 제임스 에이치 월리스로부터 축복사의 축복을 받기 위해 신시내티 지부 집회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세기에는 축복사의 축복이 대체로 성인 성도들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생에서 한 명 이상의 축복사에게서 축복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교회 지도자들은 코니와 같은 십 대들이 신앙을 강화하고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축복사의 축복을 받을 것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축복사의 축복을 한 번만 받아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1

영국 출신의 개종자인 월리스 형제는 제일회장단에게서 교회의 외딴 지부에 있는 성도들에게 축복사의 축복을 주도록 부름을 받았다. 최근 2년간 그는 유럽으로 파견되어 1,400여 건의 축복을 주고 돌아왔으며, 이제는 미국 동부와 캐나다의 성도들에게 축복을 주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신시내티에서는 축복사의 축복을 받을 기회가 흔치 않았기에, 월리스 형제는 자격이 되는 모든 지부 회원들이 기회를 확실히 누릴 수 있도록 장시간에 걸쳐 축복을 주고 있었다.2

코니는 자신이 축복을 받을 차례가 되자 상호부조회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월리스 형제는 코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녀를 본명인 코닐리아 벨 테일러로 불렀다. 그는 축복을 주면서 주님이 코니를 알고 지켜 주신다고 확언했다. 그는 코니가 기도로 주님을 찾고, 악을 피하며, 지혜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평생 인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한, 재능과 지성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에서 기꺼이 일하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교회 활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라는 권고를 주었다. 월리스 형제는 코니가 언젠가 성전에 가서 부모에게 인봉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축복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약속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주님의 때가 되면, 성령이 그대의 아버지를 감화할 것이니라. 성령의 영향력을 통해 그대의 아버지는 진리의 빛을 보게 될 것이며, 그대와 함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3

위로가 되는 말들이었지만, 그만큼 큰 신앙이 필요한 내용이기도 했다. 코니의 아버지 이름은 조지 테일러였다. 시가[담배의 일종] 제조자인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지만, 후기 성도들을 몹시 싫어하는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이었다. 코니의 어머니인 애덜라인이 교회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을 때, 그는 아내가 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코니가 여섯 살 무렵이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는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가 부러진 다리를 회복하며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애덜라인은 교회에 가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다시 한번 간청했고, 이번에는 승낙했다. 조지의 마음은 계속 부드러워져서 최근에는 코니와 코니의 형제들에게도 침례를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본인은 교회에 가입하거나 가족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는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4

축복사의 축복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니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지부의 선교 활동에 자주 참여하기 시작했다.5 대공황 기간에 선교사 수가 감소한 것을 보강하기 위해 전 세계 성도들은 집 근처에서 하는 시간제 봉사에 자주 소집되었다. 1932년에 신시내티 지부 회장인 찰스 앤더슨은 신시내티에서의 선교 사업을 계속 진전시키기 위해 전도 협회를 조직했다.6 주일학교는 오전, 성찬식은 저녁에 열렸기 때문에 코니와 다른 청소년들은 오후가 되면 보통 한 시간 정도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사람들에게 회복된 복음을 이야기했다.7

전도 협회에서 코니의 동반자 중 한 명은 주디 방이었다. 얼마 전에 주디는 코니의 오빠 밀턴과 데이트를 시작했다. 밀턴과 주디는 교회 회원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많지 않았지만 함께 즐겁게 지냈다. 코니도 최근에 주디의 오빠 헨리와 첫 데이트를 했다. 그러나 코니는 헨리보다는 자신과 동갑인 헨리의 잘생긴 남동생 폴을 더 좋아했다.8

3월에 폴은 코니에게 상호향상회 롤러스케이트 활동에 함께 가자는 말을 하고 싶어 했는데, 코니는 그 사실을 주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코니는 그날 저녁 내내 폴이 그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폴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음 날, 활동을 몇 시간 앞두고서야 헨리가 밀턴에게 코니가 폴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갈 것인지 물어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코니는 폴의 이런 우회적인 방법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 주었고,

둘은 함께 스케이트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활동 후에 몇몇 청소년들은 헨리의 차에 우르르 타고 근처 식당으로 가서 칠리 요리를 먹었다. 코니는 그날 밤 일지에 이렇게 썼다. “폴과 함께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9

그 봄이 가기 전에 코니는 축복사의 축복문 사본을 받았고, 자신이 받았던 약속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자매여, 이 축복이 그대의 발걸음을 인도해 줄 것이니라. 또한 이 축복은 그대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지 않고 영생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그대가 걸어갈 길을 보여 줄 것이니라.”10

그녀의 삶에서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코니는 주님의 인도가 필요했다. 코니는 교회에 들어왔을 때 언제나 옳은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복음이 방패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한다면, 코니는 온 생애 동안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받게 될 것이었다.11


한편,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스테이크 회장인 해롤드 비 리가 제일회장단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해롤드는 자기 자신을 아이다호의 작은 마을 출신에 경험도 부족한 시골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선지자 히버 제이 그랜트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랜트 회장은 “저는 파이어니어 스테이크에서 하고 있는 일과 비슷한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12

그랜트 회장과 그의 보좌 제이 르우벤 클라크, 데이비드 오 맥케이는 해롤드가 진행하는 일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13 파이어니어 스테이크의 야심 찬 구제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거의 3년이 지났다. 그동안 파이어니어 스테이크는 실업자들을 위한 다양한 일자리를 창출했다. 성도들은 완두콩을 따고, 옷을 만들고 수선하고, 과일과 채소 통조림을 만들고, 새로운 스테이크 체육관을 지었다.14 스테이크 창고의 복잡한 운영은 제시 드루리가 맡아 처리했으며, 스테이크 창고는 구제 프로그램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15

그와 동시에, 제일회장단은 공적 자금에 의존하는 교회 회원들의 수에 대해 몹시 우려했다. 그들은 식비나 집세를 낼 돈이 없는 성도들이 정부의 구제를 받는 것이나, 교회 회원들이 연방 정부의 공공사업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16 그러나 유타주가 정부 원조에 가장 많이 의존하는 주들 중 하나가 되면서, 제일회장단은 일부 교회 회원들이 필요하지도 않은 원조금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17 또한 정부가 얼마나 오랫동안 구제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다.18

클라크 회장은 그랜트 회장에게 연방 정부의 원조를 대체할 무언가를 성도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부의 일부 구제 프로그램이 게으름과 실의를 초래했다고 여긴 클라크 회장은 교회 회원들에게 교리와 성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서로를 돌보는 책임을 받아들이고, 가능하면 원조를 받는 대가로 일을 하도록 권고했다.19

그랜트 회장에게는 또 다른 우려도 있었다. 대공황이 시작된 이래로, 그는 일자리와 농장을 잃은 선하고 근면한 후기 성도들에게서 수많은 편지를 받아 왔다. 그는 종종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다. 가난한 가운데 자란 그는 빈곤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인생의 수십 년을 빚더미에 앉아 보낸 바가 있기에, 비슷한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동정심도 느꼈다. 사실 이제 그는 과부와 가족들,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융자금을 갚거나, 선교 사업을 계속하거나, 다른 의무를 다하도록 사비를 털어 돕고 있기도 했다.20

그러나 그랜트 회장은 자신의 노력도, 좋은 의도가 담긴 정부 프로그램을 통한 노력도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교회가 가난한 실직자들을 돌볼 의무가 있다고 여겼으며, 해롤드가 파이어니어 스테이크에서 했던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성도들이 함께 일함으로써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할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안하기를 원했다.

그랜트 회장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보다 교회에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21

해롤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교회 전체를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난 중압감이 밀려왔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근처의 협곡 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솔트레이크시티 위쪽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동안 그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도로가 끝나는 공원 언저리에 이르렀을 때, 그는 차의 시동을 끄고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 거닐다 한적한 곳을 발견했다. 해롤드는 무릎을 꿇고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주님께 “당신 백성의 안전과 축복을 위해 당신의 인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22

고요한 가운데 강력한 느낌이 그에게 임했다. 해롤드는 깨달았다. “이 백성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 새로운 조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권을 행사하게 하는 것뿐이다.”23

그 후로 며칠 동안, 그는 사도이자 전 상원 의원인 리드 스무트를 포함하여 경험 많고 박식한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몇 주에 걸쳐 교회 구제 프로그램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는 도표와 상세한 보고서가 포함된 예비 제안서를 만들었다.24

해롤드가 계획서를 제일회장단에게 제출했을 때, 맥케이 회장은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랜트 회장은 성도들이 그런 대규모 프로그램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 망설여졌다. 회의가 끝난 후에 기도로 주님께 인도를 구했지만 그는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다.

그랜트 회장은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확신이 들기 전에는 진행하지 않을 것입니다.”25


구제 프로그램에 대한 주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동안, 그랜트 회장은 스테이크를 조직하기 위해 하와이 오아후섬으로 갔다.26 그가 그곳에서 성전을 헌납한 지 15년이 흘렀으므로,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한때 메마르고 관목이 무성하던 성전 터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야자수에 둘러싸인 계단식 인공 연못과 만개한 부겐빌레아 나무로 활기를 띠었다.27

하와이에 있는 교회도 번창했다.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호놀룰루에 처음 도착한 이후 85년이 지나는 동안 하와이의 교회 회원 수는 13,0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그중 절반이 오아후섬에 살고 있었다. 교회 모임의 참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았던 적이 없었고 성도들은 이제 스테이크에 소속되기를 열망했다. 오아후 스테이크는 교회의 113번째 스테이크이자 북미 이외의 지역에서 조직된 첫 번째 스테이크가 될 터였다. 이제 하와이 성도들에게는 처음으로 감독과 스테이크 지도자, 축복사가 생길 것이었다.28

성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히버는 하와이 성전의 건축을 감독했던 랠프 울리를 스테이크 회장으로 불렀다.29 하와이 원주민인 아서 카페와오케아오 와이파 파커는 보좌 중 한 명으로 봉사하게 되었다.30 스테이크 고등평의회, 상호부조회 회장단, 기타 지도자 직분에는 폴리네시아 및 아시아계 남성들과 여성들이 부름을 받았다.31

선지자는 하와이 교회 회원들의 다양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32 예전에는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집중적으로 선교 사업을 했지만, 이제는 더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1930년대에는 일본계 사람들이 하와이 인구의 삼 분의 일 이상을 차지했다. 하와이에 사는 그 밖의 주민들은 사모아인, 마오리인, 필리핀인, 중국인의 후손들이었다.33

1935년 6월 30일에 선지자는 새로운 스테이크를 설립했다. 며칠 후에 그는 교회의 일본계 회원들과 함께하는 만찬에 참석했다. 이 소규모 그룹은 매주 모여 일본어 주일학교 반에서 공부를 했다.34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히버는 성도들이 일본 전통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유타주 농업 대학에 유학하던 중 교회에 들어온 가스누마 토미조와 일본에서 침례를 받고 이후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해 1920년대에 하와이로 이민을 온 79세의 성도 나치에 츠네의 간증도 들었다.35

히버는 음식을 먹고 음악과 간증을 들으면서 일본 선교부의 초대 회장으로 봉사했던 30년 전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일본에서 했던 선교 사업에 늘 실망했었다.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어를 잘 배우지 못했으며, 그 선교부에서 나온 개종자는 단 몇 명뿐이었다. 이후의 선교부 회장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교회 회장이 되고 몇 년 후에 일본 선교부를 폐쇄하면서도 그는 그 선교부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더 했어야 했는지를 알고자 여전히 고심했다.36

한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도, 나는 주님께서 내게 기대하신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또 나를 그곳으로 보내신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37

일본 성도들을 만나 그들의 주일학교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히버는 하와이가 일본에 새로운 선교부를 개설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호놀룰루에 있는 동안, 그는 새로 침례받은 일본 회원 두 명에게 확인 의식을 집행했다. 그중에는 침례받기 2년 전부터 주일학교를 가르쳐 온 이케가미 키치타로도 있었다. 이 인상적인 젊은이는 헌신적인 아버지였고 오아후섬에서 활동하는 영향력 있는 사업가였다.38

히버는 문득 자신이 방금 일본 성도들에게 해 준 확인 의식 수가 일본에서 선교 사업을 하던 전 기간에 자신이 행했던 확인 의식 수보다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39 아마도 때가 되면 이 성도들은 일본으로 선교 사업을 나가도록 부름받아, 교회가 그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40


헬가 마이주스 주변의 일상은 계속 변화했다. 1935년 초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세계 대전이 종식되었을 때 체결한 조약을 위반하는 처사였다. 유럽 국가들은 딱히 그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선전부 장관의 도움으로 독일을 제 뜻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나치의 힘을 보여 주는 거대한 집회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독일 어디를 가더라도 친히틀러 라디오 프로그램과 민족주의 음악이 들리고 나치 스와스티카(하켄크로이츠: 나치의 갈고리 십자 표장—옮긴이)를 볼 수 있었다.41

변화는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꿀벌 소녀 프로그램은 계속되었던 반면, 정부는 더 많은 청남들이 나치당의 청소년 단체에 가입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독일의 교회 보이 스카우트 프로그램을 해산시켰다. 또한 나치가 유대인들을 증오했으므로, 정부는 교회들이 유대교와 관련된 단어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과 “시온”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신앙개조가 금지되었고, 『신성한 권세』[Divine Authority]라는 제목의 전도용 소책자를 포함한 교회 서적들도 나치의 권력에 도전하는 듯 보인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42

독일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금지 사항 중 몇 가지에 저항했지만, 결국은 성도들에게 새 정부에 적응하고 교회와 회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어떠한 언행도 삼가달라고 권고하기에 이르렀다.43 비밀경찰이 어디에나 있었기에, 틸지트의 성도들은 반란이나 저항의 어떤 징후도 금세 들키고 말 것임을 알았다. 대부분의 독일 성도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지부의 누군가가 나치와 결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지부 회원들 다수는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독일인 시늉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일이라고 믿었다. 지부 회원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불충한 행위를 한다면 모든 회원이 나치의 보복을 당할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44

교회에서 헬가는 남동생 시그프리드와 이종사촌 쿠흐트 브라흐츠를 포함한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위안과 안전, 우정을 찾았다. 헬가가 참석하는 지부에서는 종종 연극과 음악 프로그램을 상연하거나 감자 샐러드, 독일 소시지, 그리고 맛있는 슈트로이젤쿠헨 케이크로 식탁을 가득 차린 활기찬 파티를 열었다.45 청소년들은 보통 안식일에 하루 종일 함께 지냈다. 그들은 오전에 주일학교에 참석한 후 헬가의 이모나 외할머니 같은 교회 회원의 집에 가곤 했다. 피아노가 있는 곳에서는 누군가가 피아노 앞에 앉아 반주를 했고 모두들 함께 피아노 반주에 맞춰 교회의 독일어 찬송가를 부르곤 했다.

성찬식이 끝난 후에는 하인츠 슐츠케(오토 슐츠케 지부 회장의 십 대 아들)의 집으로 가서 함께 이야기하고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슐츠케 회장은 헬가와 다른 청소년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청소년들에 대한 기대가 높았으며, 회개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훈계를 자주 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고 엉뚱한 유머 감각도 있었다. 누군가 교회에 늦게 와서 모두들 누구인지 보려고 뒤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자가 언제 들어오는지는 제가 말씀드릴 테니 여러분은 뒤돌아보지 않으셔도 됩니다.”46

헬가는 또한 외할머니에게서 위안과 인도를 얻었다. 외할머니 요하네 워치스머스는 오토 슐츠케처럼 엄격한 면이 있었으며, 손주들이 응석받이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대화하는 법을 아는 신앙심 깊은 여성이었다. 헬가가 외가에 머물 때마다 요하네는 손녀가 자신과 나란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원했다.

어느 날 밤, 헬가는 외할머니에게 화가 나서 기도하지 않으려고 했다. 요하네는 헬가를 그냥 두지 않고 함께 기도하기를 고집했다.

헬가는 결국 할머니를 이기지 못하고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꿇었는데, 그때 속상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외할머니는 헬가에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가르쳐 준 친구 같은 존재였고, 후에 헬가는 그 경험에 감사해했다. 헬가는 분노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다.47


1936년 2월, 해롤드 비 리는 제일회장단과의 첫 만남 이후 10개월 만에 다시 한번 그 사무실에 앉았다. 그랜트 회장은 궁핍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 계획을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얼마 전 감리 감독단이 와드 및 스테이크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성도들은 5명 중 1명꼴로 어떤 형태로든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도움을 얻기 위해 교회에 의지하는 회원은 소수였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근 몇 년간 연방 정부가 각 주에 지급하는 원조 규모를 극적으로 늘렸기 때문이었다 감리 감독단은 모든 후기 성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다한다면 교회가 모든 궁핍한 회원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48

그랜트 회장과 보좌들은 해롤드에게 이전의 제안서를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역 구리 광산의 복지 프로그램 책임자인 캠벨 브라운 이세를 채용해 해롤드를 보조하게 했다.49

해롤드는 그 후로 몇 주 동안 밤낮으로 통계 자료를 분석하고, 캠벨과 의논하고, 이전의 계획을 재고했다. 3월 18일에 그들은 수정된 제안서를 들고 맥케이 회장을 찾아가 모든 세부 사항을 설명했다.50 새로운 계획에 따르면, 교회의 각 스테이크는 지리적 지역으로 조직되고, 각 지역은 식량과 의복을 비치한 자체적인 중앙 창고를 보유하게 될 것이었다. 그 물품들은 금식 헌금이나 십일조 기금으로 마련되거나, 작업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 내거나, “현물” 십일조 헌금을 통해 받게 될 것이었다. 만약 한 지역에서 특정 물품이 남을 때는 그 물품을 다른 지역과 필요한 물품으로 맞바꿀 수 있었다.

프로그램 관리는 스테이크 회장들로 구성된 지역 평의회의 몫이지만,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대부분의 책임은 감독단, 와드 상호부조회 회장단, 그리고 새로 조직된 와드 취업 위원회가 맡을 것이었다. 취업 위원회의 위원들은 모든 와드 회원들의 고용 상태를 명시한 기록을 보존하고 그 기록을 매주 갱신하는 책임과 더불어, 작업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그 밖의 구제 활동을 통해 회원들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51

성도들은 이 계획에 따라 파이어니어 스테이크가 했던 것처럼 노동의 대가로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작업 프로젝트의 참가자들은 감독과 만나 필요한 식량, 의복, 연료 또는 기타 필수품에 대해 논의하게 되며, 그 후에는 상호부조회 대표자가 해당 가정을 방문해서 가족의 상황을 평가하고, 스테이크 창고에 제출할 주문서를 작성할 것이었다. 원조는 성도들 각자의 상황에 따라 받게 되는데, 이는 두 사람이 하루에 똑같은 분량의 일을 하더라도 가족 수나 기타 요인에 따라 서로 다른 양의 식량이나 물품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52

해롤드와 캠벨이 설명을 마치자, 맥케이 회장은 흡족해하는 듯했다.

그는 손으로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형제님들, 이제 교회 회원들에게 발표할 프로그램이 생겼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 여러분에게 영감을 주셨습니다.”53

  1. Taylor, Diary, Feb. 6, 1935; Bates, “Patriarchal Blessings and the Routinization of Charisma,” 25–26; Heber J. Grant to Mrs. Wilford J. Allen, Sept. 12, 1932, First Presidency Miscellaneous Correspondence, CHL. 주제: 축복사의 축복

  2. Taylor, Diary, Feb. 6, 1935; Wallis, Journal, Feb. 4–6, 1935; Rytting, James H. Wallis, 6–7, 154, 177, 189–91. 주제: Outmigration[인구 유출]

  3. Taylor, Diary, Feb. 6, 1935; Cornelia Taylor, Patriarchal Blessing, Feb. 6, 1935, 1–2, Paul and Cornelia T. Bang Papers, CHL.

  4. Bang, Autobiography, 4–6, 8–9; Taylor, Diary, Apr. 12, 1936; Charles Anderson to Adeline Yarish Taylor, Apr. 18, 1936; Oct. 26, 1936, Paul and Cornelia T. Bang Papers, CHL.

  5. Taylor, Diary, Feb. 10 and 17, 1935; Mar. 3 and 24, 1935; June 2, 1935.

  6. Danish Mission, French Mission, Northern States Mission, Annual Reports, 1932, Presiding Bishopric, Financial, Statistical, and Historical Reports, CHL; Northern States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Dec. 31, 1930, and Dec. 31, 1931; Anthony W. Ivins to Preal George, Feb. 5, 1932, First Presidency Miscellaneous Correspondence, CHL; First Presidency to John A. Widtsoe, Aug. 1, 1933, John A. Widtsoe Papers, CHL; Cincinnati Branch, Minutes, Jan. 16, 1932, 4.

  7. South Ohio District, General Minutes, Nov. 1931; Taylor, Diary, Feb. 3, 10, and 17, 1935.

  8. Taylor, Diary, Jan. 20, 1935; Feb. 3, 10, and 15–17, 1935; Fish, “My Life Story,” [6].

  9. Taylor, Diary, Feb. 15 and Mar. 22–23, 1935; Paul Bang, “My Life Story,” 10–11; Bang, Autobiography, 7.  

  10. Taylor, Diary, May 26, 1935; Cornelia Taylor, Patriarchal Blessing, Feb. 6, 1935, 1, Paul and Cornelia T. Bang Papers, CHL.  

  11. Cornelia Taylor Bang, “Youth Meeting,” circa 1944, 1, Paul and Cornelia T. Bang Papers, CHL.

  12. Harold B. Lee, in One Hundred Forty-Second Semi-annual Conference, 123–24; Gibbons, Harold B. Lee, 25–85; Harold B. Lee, Journal, Apr. 20, 1935; Grant, Journal, Apr. 20, 1935.  

  13. Lee, “Remarks of Elder Harold B. Lee,” 3; Rudd, Pure Religion, 14.

  14. Salt Lake Pioneer Stake, Confidential Minutes, Nov. 5–6, 1932; Salt Lake Pioneer Stake Manuscript History, Mar. 26, 1933; June 30, 1933; Nov. 28, 1933; “Exchange Idea Assures Many Jobs for Idle,” Salt Lake Tribune, July 25, 1932, 14; Goates, Harold B. Lee, 99; Harold B. Lee, Charles S. Hyde, and Paul Child to Heber J. Grant, May 23, 1933, J. Reuben Clark Jr. Papers, BYU; Eugene Middleton, “Personality Portraits of Prominent Utahns,” Deseret News, Oct. 24, 1934, 16.

  15. Lee, “Remarks of Elder Harold B. Lee,” 2–3; Drury, “For These My Brethren,” [5]–[11].

  16. Heber J. Grant to Grace Evans, Sept. 12, 1933, Letterpress Copybook, volume 70, 931–32,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J. Reuben Clark Jr. to Richard M. Robinson and H. M. Robinson, Oct. 26, 1934, enclosed in J. Reuben Clark Jr. to David O. McKay, Oct. 26, 1934, David O. McKay Papers, CHL; Heber J. Grant to Bessie Clark Elmer, Jan. 5, 1934; Heber J. Grant to J. N. Heywood, Oct. 23, 1934, First Presidency Miscellaneous Correspondence, CHL; Arrington and Hinton, “Origin of the Welfare Plan,” 67, 76–77; Mangum and Blumell, Mormons’ War on Poverty, 110–11.

  17. Hall, Faded Legacy, 124; Presiding Bishopric, Office Journal, June 3, 1935; Cannon, “What a Power We Will Be in This Land,” 68; J. Reuben Clark Jr. to Richard M. Robinson and H. M. Robinson, Oct. 26, 1934, enclosed in J. Reuben Clark Jr. to David O. McKay, Oct. 26, 1934, David O. McKay Papers, CHL.

  18. Arrington and Hinton, “Origin of the Welfare Plan,” 74–76; Mangum and Blumell, Mormons’ War on Poverty, 114. 주제: Welfare Programs[복지 프로그램]

  19. Lee, “Remarks of Elder Harold B. Lee,” 3; J. Reuben Clark to Heber J. Grant and David O. McKay, Apr. 16, 1935, David O. McKay Papers, CHL; J. Reuben Clark, in One Hundred Fifth Semi-annual Conference, 96–100; Cannon, “What a Power We Will Be in This Land,” 66–68; Mangum and Blumell, Mormons’ War on Poverty, 119–29; Doctrine and Covenants 104:15–18; J. Reuben Clark Jr., in One Hundred Fourth Semi-annual Conference, 102–3.

  20. Heber J. Grant to Mrs. Claude Orton, Mar. 3, 1932; Heber J. Grant to Mrs. C. M. Whitaker, June 9, 1932; Heber J. Grant to Pauline Huddlestone, Sept. 14, 1935; Heber J. Grant to Mrs. Lee Thurgood, Jan. 29, 1932; Heber J. Grant to B. B. Brooks, Dec. 16, 1932; Heber J. Grant to Geo. W. Middleton, Aug. 5, 1931, First Presidency Miscellaneous Correspondence, CHL; Heber J. Grant to Grace Evans, Dec. 19, 1931,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21. Harold B. Lee, Journal, Apr. 20, 1935; Heber J. Grant and David O. McKay to J. Reuben Clark, Mar. 15, 1935, J. Reuben Clark Jr. Papers, BYU.  

  22. Harold B. Lee, in One Hundred Forty-Second Semi-annual Conference, 124; Harold B. Lee, Journal, Apr. 20, 1935.  

  23. Harold B. Lee, in One Hundred Forty-Second Semi-annual Conference, 124.

  24. Harold B. Lee, Journal, Apr. 20, 1935.

  25. Harold B. Lee, Journal, Apr. 20, 1935; David O. McKay to J. Reuben Clark, May 6, 1935,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CHL.  

  26. “Grant to Organize New Hawaii Stake,” Salt Lake Telegram, May 31, 1935, 13; Grant, Journal, June 20, 1935.

  27. Historical Department, Journal History of the Church, June 30, 1935, 10. 주제: 하와이

  28. J. Reuben Clark, “The Outpost in Mid-Pacific,” Improvement Era, Sept. 1935, 38:530; Saints, volume 2, chapter 9; Hawaiian Mission, Annual Report, 1934, Presiding Bishopric Financial, Statistical, and Historical Reports, CHL; Castle Murphy to First Presidency, Feb. 28, 1934; Apr. 3, 1934; Nov. 30, 1934,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Historical Department, Journal History of the Church, June 30, 1935, 5–6. 주제: 와드와 스테이크

  29. Clark, Diary, June 28–30, 1935; “Woolley Heads New LDS Stake Formed Locally,” Honolulu Advertiser, July 1, 1935, 1; “Woolley, Ralph Edwin,” in Jenson, Latter-day Saint Biographical Encyclopedia, 4:173–74.

  30. Britsch, Moramona, 279–81, 299; “First Offshore Stake Organized at Honolulu,” Deseret News, July 1, 1935, [9].

  31. Grant, Journal, June 29–30, 1935; “Organization of LDS Stake Nearly Ready,” Honolulu Star-Bulletin, July 4, 1935, 2.

  32. Grant, Journal, June 25, 1935; Heber J. Grant to Frances Bennett, July 3, 1935,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33. Britsch, Moramona, 257–59.

  34. Grant, Journal, July 3, 1935; John A. Widtsoe, “The Japanese Mission in Action,” Improvement Era, Feb. 1939, 42:88.

  35. J. Reuben Clark, “The Outpost in Mid-Pacific,” Improvement Era, Sept. 1935, 38:533; Grant, Journal, July 3, 1935; Clark, Diary, July 3, 1935; Takagi, Trek East, 16–22; Parshall, “Tsune Ishida Nachie,” 122–30; John A. Widtsoe, “The Japanese Mission in Action,” Improvement Era, Feb. 1939, 42:88125.

  36. Heber J. Grant, in Seventy-Fourth Semi-Annual Conference, 7, 11; Walker, “Strangers in a Strange Land,” 231–32, 240–41, 247–48, 253; Britsch, “Closing of the Early Japan Mission,” 263–81. 주제: 일본; 선교 사업의 성장

  37. Heber J. Grant to Matthias F. Cowley, May 12, 1903, Letterpress Copybook, volume 36, 239,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Walker, “Strangers in a Strange Land,” 250.  

  38. J. Reuben Clark, “The Outpost in Mid-Pacific,” Improvement Era, Sept. 1935, 38:533; Grant, Journal, June 30, 1935; Ikegami, “We Had Good Examples among the Members,” 228–29; Ikegami, “Brief History of the Japanese Members of the Church,” 3; Kichitaro Ikegami and Tokuichi Tsuda entries, Oahu District Baptisms and Confirmations, 1935, nos. 42 and 43, in Hawaiian Islands, part 22,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39. Britsch, Moramona, 282.

  40. J. Reuben Clark, “The Outpost in Mid-Pacific,” Improvement Era, Sept. 1935, 38:533; Ikegami, “Brief History of the Japanese Members of the Church,” 3–4.

  41. Müller, Hitler’s Wehrmacht, 7–12; Naujoks and Eldredge, Shades of Gray, 44–45; Wijfjes, “Spellbinding and Crooning,” 166–70.

  42. Nelson, Moroni and the Swastika, 123–34; Naujoks and Eldredge, Shades of Gray, 35; German-Austrian Mission, General Minutes, Jan. 1934, 315–16; Apr. 1934, 327–28; Carter, “Rise of the Nazi Dictatorship,” 59–63.

  43. Carter, “Rise of the Nazi Dictatorship,” 59–63; Nelson, Moroni and the Swastika, 167–84.

  44. Naujoks and Eldredge, Shades of Gray, 35; Tobler, “Jews, the Mormons, and the Holocaust,” 80.

  45.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10-12.

  46.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57–59; Naujoks and Eldredge, Shades of Gray, 35–37.  

  47.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44.

  48. Harold B. Lee, Journal, Feb. 1936; “Summary of Relief Survey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Apr. 1, 1936,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CHL; Olson, Saving Capitalism, 14–15; Derr, “History of Social Services,” 49–50.

  49. Harold B. Lee, Journal, Feb. 1936; Cannon, “What a Power We Will Be in This Land,” 69.

  50. Harold B. Lee, Journal, Mar. 15, 1936; David O. McKay, Diary, Mar. 18, 1936 [University of Utah].

  51. Mangum and Blumell, Mormons’ War on Poverty, 134; Henry A. Smith, “Church-Wide Security Program Organized,” Improvement Era, June 1936, 39:334, 337; “Detailed Instructions on Questions Arising out of the Development of the Church Security Program,” [1936], 1–5, Presiding Bishopric Welfare Files, CHL.

  52. Henry A. Smith, “Church-Wide Security Program Organized,” Improvement Era, June 1936, 39:333; “Detailed Instructions on Questions Arising out of the Development of the Church Security Program,” [1936], 3–4, Presiding Bishopric Welfare Files, CHL; Arrington and Hinton, “Origin of the Welfare Plan,” 78.

  53. Harold B. Lee, Journal, Mar. 15, 1936. 주제: Welfare Programs[복지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