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20장: 힘든 시기


제20장

힘든 시기

이미지
꿀벌 소녀 지침서

유타 주립 농업 대학을 갓 졸업한 22세의 에블린 호지스는 봉급을 주는 학교 교사 자리를 마다하고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상호부조회 사회봉사부의 사회 복지사로 자원했다.1

그녀의 부모는 그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에블린의 어머니는 상호부조회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지만 사회 복지 업무가 자신의 딸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블린의 아버지는 그저 딸이 로건에 있는 가족 농장에서 계속 자신들과 함께 살기를 바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딸은 하나뿐이니, 마땅히 내가 부양해야지. 집에 있거라. 석사 학위도 따고, 박사 학위도 따고,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집을 떠나는 건 안 된다.”2

결국 에블린은 부모님과 타협을 했다. 우선 9주 동안만 사회 복지사 일을 해 보고, 만약 그때까지 상호부조회에서 유급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 것이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맞은 첫 번째 토요일, 에블린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 제1보좌이자 상호부조회 사회봉사부 책임자인 에이미 브라운 라이먼에게 정식으로 인사하러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에이미가 문간까지 나와서 그녀를 맞이해 준 것은 아니었다. 에블린은 그 집 2층까지 올라가서야 침대 한가운데서 다리를 꼬고 앉아 바느질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는 에이미와 대면할 수 있었다. 다소 구겨진 옷차림을 하고 주변에 바느질 도구들을 늘어놓고 있는에이미의 모습과 그 무관심에 에블린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솔트레이크시티에 오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옳았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졌던 것이다. 정말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그녀가 바라온 일이었단 말인가?3

그로부터 9주가 지난 뒤, 에블린은 그것이 자신이 원했던 일임을 깨달았다. 에블린은 약 80가구를 맡은 사회 복지사로서 도시 곳곳을 누비며 가로와 골목길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용기가 없어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곧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꼈다. 9주가 지나고 부모님이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에블린은 절망스러웠다. 그때까지도 상호부조회에서는 일자리 제안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에블린이 에이미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은 로건으로 돌아오고 사흘이 지난 후였다. 에이미는 상호부조회의 한 사회 복지사가 인근 병원에 채용되었다면서 그 복지사가 해 오던 일을 대신 맡아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네, 좋아요.” 에블린이 대답했다. 봉급이 얼마나 되는지 묻지도 않았다.

전화가 왔을 때 출타 중이었던 아버지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딸이 일자리를 수락한 것을 알고는 실망스러워했다. 에블린은 아버지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진로를 향한 결의가 굳건했다.4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온 에블린은 과부, 장애인, 실직자 가족, 기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상호부조회에 위탁하는 현지의 감독들과 직접 협력하며 일했다.5 그녀는 감독의 지휘 아래 각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계획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또한 궁핍한 사람들이 금식 헌금, 상호부조회 기금, 그리고 각 군에서 운영하는 자선 단체를 통해 금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와드 및 지방 정부와 협력했다.

당시 교회의 지침에 따르면, 사람들은 교회에 도움을 청하기 전에 먼저 정부의 도움을 받도록 권장받았다. 그래서 에블린이 담당했던 꽤 많은 가정이 정부와 교회 양쪽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대체로 원조금이 많지는 않았으므로, 그녀는 늘 자신이 담당하는 가족들에게 친척, 친구, 또는 이웃에게서 추가로 받을 수 있는 도움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6

에블린이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오고 몇 달 후인 1929년 10월, 미국의 주식 시장이 폭락했다. 처음에는 멀리 떨어진 뉴욕시의 주가 폭락이 에블린의 업무량에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1930년 봄에는 붕괴된 경제가 회복되는 듯도 했다.7

그러나 회복의 기류는 오래가지 못했다. 빚이 많은 개인과 기업은 부채를 상환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재화와 용역에 대한 수요를 줄여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8 유타는 특히 큰 타격을 받았다. 광물과 농산물 수출에 크게 의존했던 유타 경제는 주식 시장이 폭락했을 때부터 이미 허덕이고 있었다. 모든 기본적인 원재료 가격이 떨어지자 생산자들은 이윤을 남기거나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할 수 없었고, 결국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실직자로 전락했다. 설상가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선 단체에 기부할 돈이 있는 사람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십일조와 교회의 기타 헌금 역시 감소했다.

교회의 100주년 기념행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블린은 생계가 위태로워진 가족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공포가 뿌리내리고 있었다.9


1930년 5월 19일 저녁, 케이프타운에 사는 윌리엄과 클라라 대니얼스 부부는 자신들의 집을 찾은 남아프리카 선교부 회장 돈 돌턴을 반갑게 맞았다. 대니얼스 가족은 제임스 이 탈매지의 저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한 장을 토론하기 위해 집에서 소규모 영적 모임을 열고 있었다. 윌리엄과 클라라의 성인이 된 딸 앨리스도 그들과 함께했다.10

대니얼스 부부는 1921년부터 월요일 밤마다 집에서 모임을 열어 왔다. 그 모임은 주변에 만연한 인종 갈등에서 벗어나는 그들의 피난처였다. 케이프타운의 교회와 학교는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어 흑인과 혼혈인이 다니는 곳과 백인이 다니는 곳이 서로 달랐다. 하지만 대니얼스 부부의 집에서 열리는 영적 모임에는 예배자가 피부색으로 인해 참석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흑인과 동남아시아인 혈통을 가진 윌리엄과 클라라는 참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영했다.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돌턴 회장과 선교사들은 백인이었다.11

윌리엄이 회복된 복음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누이인 필리스를 통해서였는데, 필리스는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입하여 1900년대 초에 유타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15년에 윌리엄은 한 후기 성도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복음에 대한 선교사의 진정성과 이타적인 헌신에 마음이 끌렸다.12

교회에 관심이 생기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후기 성도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유타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본 것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교회 회원들의 신앙에 감탄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전서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과도 두 차례 만났는데, 스미스 회장은 윌리엄에게 아프리카 혈통의 남성들이 신권을 받을 때가 아직은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지자의 말에 윌리엄은 마음이 괴로웠다. 윌리엄이 남아프리카에서 다니던 개신교 교회는 인종 분리 정책을 따르긴 했지만 그가 회중의 장로로 봉사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었다. 만약 후기 성도가 된다면, 그는 그와 비슷한 직분을 맡지 못할 것이었다. 스미스 회장은 윌리엄에게 축복을 주며 언젠가는, 비록 그 시기가 내세가 될지라도 그가 신권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축복에 윌리엄은 감동을 받았고, 희망을 얻었다. 윌리엄은 유타에서 침례를 받은 뒤 곧 남아프리카로 돌아왔다.13

그 후로 그는 케이프타운의 모브레이 지부에서 백인 회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윌리엄은 자신의 지부에서 간증을 전하고 기도도 했으며, 집회소에서 사용할 새 오르간을 구입할 기금을 마련하는 일에도 동참했다.14 윌리엄이 침례를 받고 몇 년 후에 클라라도 교회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선교사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새로운 선교사들을 환영하고, 떠나는 장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생일과 명절을 축하하기 위해 선교사들에게 자주 식사를 대접했다. 윌리엄은 이따금 전축으로 미국 국가를 틀어 주거나 야구 경기를 개최하여 젊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집에서 환영받는다고 느끼게끔 했다.15

하지만 정작 그들은 지부의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윌리엄은 몇몇 회원이 자신의 가족을 동료 회원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턴 회장은 모브레이 지부의 회중에 혼혈인들이 있는 것을 본 방문객들이 교회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16

어느 날, 윌리엄은 클라라에게 자신이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클라라가 말했다. “여보, 당신은 솔트레이크시티까지 가서 침례를 받았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만두려고 한단 말인가?17

걱정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윌리엄은 클라라의 말과 월요일 저녁의 영적 모임을 통해 신앙을 지킬 힘을 얻었다. 1930년 봄의 그 저녁 모임에 참석한 대니얼스 가족과 손님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은 후, 폭풍으로 요동치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구주에 대해 토론했다.

시련의 순간에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구절들이었다. 인간의 힘은 대개 한계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잠잠하라 고요하라”라는18 간단한 명령으로 모두를 구하실 수 있었다.


1930년 6월 24일 오후, 스위스 바젤에 있는 스위스-독일 선교부 회장 사택에 비둘기 알 크기만한 우박이 쏟아졌다. 존과 리아 윗소는 한 주 전부터 그 집에 머물며 선교부 회장 부부들에게 선교사들의 필요 사항과 책임에 대한 교육을 진행해 오고 있었다. 장시간의 모임과 유럽 교회에 대한 흥미로운 토론이 날마다 이어졌고, 대회를 방해하는 것은 가끔 들리는 우박 소리뿐이었다.19

리아는 선교 사업을 나온 이후로 이때처럼 바빴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유럽의 성도들이 자신의 지방부와 지부에서 상호부조회와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 및 초등회를 조직하는 일을 돕도록 선교부 회장들의 부인들을 교육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전 세계 성도들에게 각자의 조국에서 시온을 세우도록 권고하고 있었으므로, 리아는 현지 성도들이 이런 조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20 일부 지부에서는 선교사들이 연합 상호향상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리아는 모든 지부의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에서 현지 회원이 회장, 두 명의 보좌, 서기, 그리고 필요한 만큼 많은 보조를 맡도록 요청했다.

더욱이, 모든 조직을 직접 감독하는 것은 선교부 회장의 부인이 맡을 역할이 아니었다. 한 명의 여성인 선교부 회장의 부인이 그 모든 일을 효과적으로 다 해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사실 선교부 회장의 부인이 현지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위임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곳의 교회 조직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리아는 선교부 지도자들이 유럽 성도들에게 스스로 지도자가 되도록 힘을 북돋워 주고 훈련을 실시하기를 바랐다.21

6월 27일에 리아는 여성들에게 유럽의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가 더 강해져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는 꿀벌 소녀와 이삭줍기 소녀[Gleaner Girls] 두 프로그램으로 나뉘었다. 꿀벌 소녀는 만 14세 이상의 청녀를 위한 3년 과정 프로그램이었다. 꿀벌 소녀 프로그램을 마친 청녀는 이삭줍기 소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삭줍기 소녀 프로그램은 체계상 좀 더 유연한 프로그램으로, 청녀들이 성인이 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유럽에는 이미 2,000명의 소녀들이 꿀벌 소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리아는 여성들에게 유럽 선교부 전역에서 이 프로그램을 장려하도록 촉구했다.22

리아는 또한 본부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 회장인 루스 메이 팍스가 최근 자신에게 유럽판 꿀벌 소녀 지침서를 만들도록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사용하던 지침서는 다양한 실내 및 실외 활동을 통해 청녀들을 강화하도록 구상되었다. 그러나 이 지침서는 특히 미국의 청녀들에게 맞춰서 작성되었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내용도 더러 들어 있었다. 리아는 새로운 지침서에 대해 자신이 구상한 것들을 선교부 회장들의 부인들에게 소개하면서 유럽 청녀들의 필요에 맞추기 위해 지침서를 어떻게 개작해야 할지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23

대회가 끝난 후, 리아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제일회장단에게 서신을 보냈다. “제가 느끼기에는 보고 드릴 만한 얼마간의 성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각 선교부에 있는 여성들은 성장을 위해 자신들이 필요하다는 것과 교회 활동에서 자신의 몫을 수행해야 할 책임을 점점 더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리아는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부름을 수행하면서 서로를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리아는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이곳에서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리아는 이듬해에는 교회의 현지 역원과 지도자들을 지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할 계획을 세웠다.

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매일 거의 한 시간도 쉬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제가 훨씬 더 젊어진 것 같고, 마음이 훨씬 더 행복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그다음으로는 우리의 지도자이자 친구들인 여러분께 감사를 전합니다.”24


그해 가을, 독일 틸지트에 사는 열 살 소녀 헬가 마이주스가 메멜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기온은 쌀쌀했지만 머리 위 하늘이 별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물에서 나온 헬가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이 된 것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25

당시는 헬가의 인생에서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헬가는 새로운 학교에 다니기로 결정했고, 처음에는 그 변화에 들떠 있었다. 학교가 집에서 가까웠기에 많은 친구와 이웃들도 그 학교에 다닐 터였다. 하지만 헬가는 곧 그 결정을 후회했다. 담임교사인 마울 선생은 헬가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헬가는 학교에서 요청한 대로 자신의 개인 정보를 작성해서 제출했는데, 문서를 살펴보던 마울이 헬가가 후기 성도라고 적은 내용을 보고 비웃음을 흘렸다. 독일은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후기 성도가 사는 지역이었지만, 독일의 성도들은 잘 알려지지도, 높이 평가되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울은 헬가에게 말했다. “이건 종교가 아니야. 한 교파일 뿐이지. 그것도 나쁜 교파!”26

“교파”라는 말은 헬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종교 때문에 나쁜 대우를 받은 경험이 없었던 헬가는 집에 가서 선생님이 한 말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헬가의 어머니는 종이를 한 장 꺼내어 헬가의 가족이 어떤 교회에 다니든 선생님이 상관할 바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울은 교장을 대동하고 교실에 들어섰다. 모든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마울은 교실 앞쪽에 서 있던 헬가 앞으로 다가갔다.

“이 아이예요.” 마울이 헬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가 그 끔찍한 교파에 소속되어 있어요.”

교장은 괴물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헬가를 보며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헬가는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헬가는 자신의 종교를 사랑했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7

그 후로 헬가의 많은 친구들은 더는 헬가와 놀려고 하지 않았다. 걸어서 학교를 오갈 때면 가끔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는 학생들도 있었다. 한번은 헬가가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학교에 외투를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일이 있었다. 헬가는 얼른 학교로 돌아갔고, 외투는 놓아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외투를 집어 들었을 때, 헬가는 누군가 외투에 코를 풀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8

반 친구들은 계속해서 헬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소녀는 속으로 교회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며 힘을 얻었다. 그 노래의 영문 제목은 “난 몰몬 소년[I Am a Mormon Boy]”이지만, 독일어 번역에서는 제목이 모든 후기 성도 어린이에게 적용되었다.

몰몬 어린이, 몰몬 어린이

난 몰몬 어린이

왕도 부러워할

난 몰몬 어린이.29


1931년 1월 30일, 에블린 호지스와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상호부조회의 다른 사회 복지사들이 상호부조회 사회봉사부 사무실이 있는 감리 감독 건물의 2층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리에서는 거의 1,500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유타주 의회 의사당을 향해 북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시위대의 목표는 유타주의 실업자 수가 증가하는 문제에 대해 주의회에 탄원하는 것이었다.30

시위대를 내려다보던 에블린은 그들이 분노나 폭력성을 보이지 않는 것에 놀라워했다. 시위대는 두 개의 미국 국기와 함께 다른 노동자들에게 동참을 촉구하는 표지판과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많은 시위자들이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들은 슬퍼 보였다.31

이런 힘든 시기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에블린이 상대하던 사람들은 주로 건강 문제나 장애 때문에 실직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을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단순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일부는 숙련된 노동자였고 대학생, 대학교 졸업생도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자존감을 잃고, 도움을 구하려는 의지도 잃은 상태였다.32

에블린은 여러 해 동안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해 왔던 한 남성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좋은 동네에 있는 안락한 집에 살았었지만 이제 그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고, 가정은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제 자기 집에 남은 음식은 밀가루와 소금뿐이라고 말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금전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분명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겠으나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33

에블린은 그러한 사안을 자주 다루었다. 경제 악화로 상호부조회도 사회 복지사를 한 번에 다섯 명 이상을 쓸 여유가 없어지자 에블린의 업무량이 크게 가중되었다. 기본 식량이나 한 달치 집세, 소량의 겨울철 석탄을 지급하는 데 필요한 서류 작성을 위해 한 사람의 상황을 단시간에 평가하는 일 말고는 보통으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겨를이 거의 없었다.34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인 루이스 와이 로비슨과 그녀의 보좌들은 성도들을 위한 복지 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감리 감독단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했다. 이와 비슷하게, 감독들과 상호부조회 지도자들도 와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파악하고 기본적인 필요 사항을 제공하기 위해 함께 일했다. 지방 정부와 일부 기업들 또한 근로자들을 계속 먹여 살리고 고용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들을 모색했다. 어떤 자치 군에서 운영하는 물류 창고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무료로 식품을 나누어 주었고, 시 정부는 1만 명 이상의 실업자들을 위해 삽으로 눈을 치우거나 장작을 패는 것과 같은 임시 일자리를 만들었다.

교회와 지역 사회 지도자들은 그러나, 자신들의 노력과 자원만으로는 경제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되었다.35

에블린은 자신과 에이미 브라운 라이먼, 그리고 상호부조회의 다른 사회 복지사들이 더 많은 시간을 업무에 쏟아붓고 있는 것을 곧 인식했다. 때로는 이런 날들에 끝이 올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가릴 것 없이 일하는 경우가 잦았다. 사회 복지 업무 기록은 기밀 사항이기에 에블린은 사무실에서만 업무를 처리하려고 노력했지만, 업무량이 늘어나자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도 일을 하기 위해 기록들을 서류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갔다.

업무를 다 처리하려면 엄청난 기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결국 에블린은 일 때문에 건강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 의회 의사당을 향해 행진하던 짓눌린 사람들의 그 슬픈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주 의회는 그들의 간청을 대부분 무시하고 실업자들에게 수당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다. 시위대의 절망적인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에블린은 그저 울고 싶었다.36

  1. “Large Class of Graduates at U.S.A.C.,” Journal (Logan, UT), May 25, 1929, 8;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1–2.

  2.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1–2, 25. 주제: 상호부조회

  3.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2. 주제: 에이미 브라운 라이먼

  4.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2–3.

  5.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3; see also, for example, “Relief Society Social Service Department Report for January 1930,” [1]–[4], Presiding Bishopric General Files, 1872–1948, CHL.

  6. Ward Charity, [3]–6; Derr, “History of Social Services,” 40–41;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3; Bell family entry, Relief Society Family Welfare Department Budget, Nov. 24, 1928, Presiding Bishopric General Files, 1872–1948, CHL. 주제: 감독; Welfare Programs[복지 프로그램]

  7.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6; Payne, Crash!, 5, 83–84; Shlaes, Forgotten Man, 85–93, 101; Kennedy, Freedom from Fear, 56–58. 주제: 대공황.

  8. Payne, Crash!, 84–85; Shlaes, Forgotten Man, 95–104; Kennedy, Freedom from Fear, 58–69.

  9. Bluth and Hinton, “Great Depression,” 481–85; Alexander, Utah, the Right Place, 310–11; Orval W. Adams to John A. Widtsoe, May 26, 1930, Widtsoe Family Papers, CHL;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6; Heber J. Grant to Reed Smoot, Jan. 14, 1932, First Presidency Miscellaneous Correspondence, CHL.

  10. Love Branch, Miscellaneous Minutes, May 19, 1930. 주제: 남아프리카 공화국

  11. Mowbray Branch, Cottage Meeting Minutes, Apr. 25–Dec. 12, 1921; Stevenson, Global History of Blacks and Mormonism, 49–50; Bickford-Smith, Ethnic Pride and Racial Prejudice in Victorian Cape Town, 210–11; Chidester, Religions of South Africa, 81–83; Adhikari, Not White Enough, Not Black Enough, 2–5. 주제: Racial Segregation[인종 분리]

  12. Wright, History of the South African Mission, 2:252–54; Philles Jacoba Elizabeth February Sampson entry, Cape Town Conference, South African Mission, no. 153, in South Africa (Country), part 1,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see also William P. Daniels, “My Testimony,” Cumorah’s Southern Messenger, Feb. 20, 1935, 9:28. Spellings of the name “Phyllis Sampson” are inconsistent in the records.

  13. Wright, History of the South African Mission, 2:252–55; Love Branch, Miscellaneous Minutes, Dec. 14, 1931; Okkers, Oral History Interview, 3–4. 주제: 조셉 에프 스미스; 신권 및 성전 제한

  14. Stevenson, Global History of Blacks and Mormonism, 50; Mowbray Branch, General Minutes, July 24, 1921–Jan. 1, 1928; Nicholas G. Smith, Diary, Nov. 5, 1920.

  15. Wright, History of the South African Mission, 2:253, 256; South Africa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Jan. 4, 1923; Martin, Autobiography, Jan. 1, 1927; see also, for example, Love Branch, Miscellaneous Minutes, Feb. 20, 1929–Apr. 28, 1930; and Mowbray Branch, Cottage Meeting Minutes, Aug. 29, 1921.

  16. Stevenson, Global History of Blacks and Mormonism, 49–50; Don M. Dalton to First Presidency, Apr. 11, 1930,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17. Okkers, Oral History Interview, 4.  

  18. Love Branch, Miscellaneous Minutes, May 19, 1930; 탈매지, 『예수 그리스도』, 311~313.

  19. Widtsoe, Diary, June 18–24, 1930; “Conference on Womans Activity in European Missions,” June 18–24, 1930, 1–2, Susa Young Gates Papers, CHL; European Mission Presidents Conference, June 18–24, 1930.

  20. Leah D. Widtsoe to Anna W. Wallace and Eudora Widtsoe, Apr. 8, 1930, Widtsoe Family Papers, CHL; “Conference on Womans Activity in European Missions,” June 25–28, 1930, 2–7, Susa Young Gates Papers, CHL; Presiding Bishopric, Office Journal, Sept. 3, 1929, 244. 주제: 이스라엘의 집합

  21. Conference on Womans Activity in European Missions,” June 28, 1930, 8–11, Susa Young Gates Papers, CHL; see also, for example, German-Austrian Mission, General Minutes, May 1930, 130.

  22. “Conference on Womans Activity in European Missions,” June 27, 1930, 3, 13, Susa Young Gates Papers, CHL; European Mission Relief Society Presidents’ Conference, Minutes, [Aug. 21], 1929, 28–29; Eudora Widtsoe, “The Bee-Hive Girl,” Latter-day Saints’ Millennial Star, Apr. 3, 1930, 92:273. 주제: 청녀 조직

  23. “Conference on Womans Activity in European Missions,” June 27, 1930, 3, 12–13, Susa Young Gates Papers, CHL; Hand Book for the Bee-Hive Girls of the Y. L. M. I. A. [10th ed.], 9; Handbook for the Bee-Hive Girls of the Young Ladies’ Mutual Improvement Association, [5]; Leah D. Widtsoe to First Presidency, Sept. 16, 1933,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24. Leah D. Widtsoe to First Presidency, Oct. 8, 1930,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25.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36; German-Austrian Mission, General Minutes, Sept. 1930, 143.

  26.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32, 34; Scharffs, Mormonism in Germany, xiv, table 1; Naujoks and Eldredge, Shades of Gray, 30. 주제: Germany[독일]

  27.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34.

  28.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34–36.

  29.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34; see also Evan Stephens, “The ‘Mormon’ Boy,” Deseret Sunday School Songs, no. 269.

  30.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8; “Unemployed Plan to Ask State Aid,” Salt Lake Tribune, Jan. 29, 1931, 9; “Idle Workers March upon Utah Capitol,” Salt Lake Tribune, Jan. 31, 1931, 7. 주제: Church Headquarters[교회 본부]

  31.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8; “Unemployed March on Utah Capitol,” Salt Lake Telegram, Jan. 30, 1931, 8B; Alexander, Utah, the Right Place, 312.

  32. Derr, “History of Social Services,” 42;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7, 15.

  33.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16.

  34. Derr, “History of Social Services,” 39;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6–8, 15–16; Presiding Bishopric to Louise Y. Robison, Feb. 4, 1930; Amy Brown Lyman to Presiding Bishopric, Mar. 5, 1930; Presiding Bishopric to Amy Brown Lyman, [Mar. 1930], Presiding Bishopric General Files, 1872–1948, CHL; Hall, Faded Legacy, 112–13.

  35. Relief Society, Minutes of Meetings with the Presiding Bishopric, Jan.–Dec. 1930; May 24, 1932; Nov. 2, 1932; Derr, Cannon, and Beecher, Women of Covenant, 251; Hall, Faded Legacy, 113; Bluth and Hinton, “Great Depression,” 484–85. 주제: 대공황; Welfare Programs[복지 프로그램]

  36. Lewis, Oral History Interview, 8–9; Bluth and Hinton, “Great Depression,” 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