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36장: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2)

제36장: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제36장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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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에 서 있는 군인

과테말라시티 중앙역에서 열차가 출발하자 클레멘시아 피바랄은 시계를 흘끗 보았다. 1951년 10월 10일, 아침 8시였다. 저 멀리 하늘은 잿빛 구름에 뒤덮여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했다. 그러나 기차역 바로 위 하늘은 맑고 화창했다. 클레멘시아는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열두 살 난 아들 로드리고는 다른 두 명의 과테말라 성도와 함께 3천 킬로미터 거리의 여정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애리조나주 메사에 있는 성전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성도들의 대규모 대회에 참석할 것이었다.1

지난 7년 동안 메사에서는 해마다 멕시코, 중미, 미국 서부에서 온 수백 명의 성도들이 대회에 참석하고 성전 사업을 하기 위해 모였었다. 행사에 온 대부분의 성도들은 충분한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수년간 저축을 해 왔다. 행사 주최는 애리조나의 3개 스테이크가 맡았으며, 현지 회원들은 방문객들이 도착하면 그들이 성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숙식을 제공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성도들은 대회 참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스페인계 미국인 선교부 회장의 아내 아이비 존스가 계보를 주제로 쓴 연극 ‘때가 왔다[The Time Is Come]’ 공연과 장기자랑 대회를 열고 입장료를 받았다.2

클레멘시아가 대회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1950년 초에 선교사들을 만났는데, 그 때는 지방부 회장인 존 오도날이 장로 두 명을 과테말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그녀의 고향 케찰테낭고로 보낸 직후였다. 스물아홉의 클레멘시아는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그녀를 가르친 장로와 자매 선교사들은 죽은 자를 위한 침례, 성전, 기타 복음 원리 등에 관한 토론을 곧바로 받아들이는 클레멘시아를 보며 기뻐했다. 몇 달 후에 그녀는 과테말라시티에서 시각 장애, 청각 장애, 언어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는 아들과 그곳으로 이사해서 오도날 가족 및 과테말라시티 지부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3

어느 날 클레멘시아가 지부 집회소에서 교리와 성약을 공부하고 있을 때, 멕시코 선교부 회장인 루시안 메캄은 그녀에게 교회 회원이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선교사들로부터 침례를 받고 싶냐는 질문을 아직 받지 못했어요.”

메캄 회장은 즉각 그녀와 접견을 시작했다. 그가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것을 모두 믿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메캄 회장이 물었다. “침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면 내일은 어떠신가요?”

그녀는 “좋아요!”라고 대답했다.4

그리고 1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녀는 엔다우먼트를 받기 위해 성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과테말라의 교회는 여전히 회원 수가 70명도 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성전 축복을 받은 과테말라인은 침례 후 이듬해에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엔다우먼트와 인봉을 받은 카르멘 오도날을 포함하여 단 몇 명 뿐이었다.5 클레멘시아는 이번 여행에 참여하게 되어 기뻤다. 기차 안의 숨 막히는 더위에 맥이 풀렸지만, 창밖으로 과테말라 해안의 멋진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기분을 망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차 안에서 그녀와 성도들은 경전을 읽고 복음에 대해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클레멘시아는 열차 안에서 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듯한 한 여성을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클레멘시아는 사도 존 에이 윗소가 쓴 선교사 소책자 『회복된 진리』[La verdad restaurada]를 그녀에게 주었다. 클레멘시아는 그 여성에게 다음번에 과테말라시티에 오면 교회에 참석해 보라고 권유했다.6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클레멘시아와 과테말라 성도들은 대회로 가는 길에 멕시코 교회 회원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승합차를 타고 사흘 동안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20일에 메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과테말라 성도들은 그달 초에 휴가차 미국으로 온 존과 카르멘 오도날을 만났다.7

대회의 첫날과 둘째 날은 모임과 성전 준비로 일정이 꽉 차 있었다. 의식 일정은 대회 셋째 날인 10월 23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첫 엔다우먼트 의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의식을 마치는 데에만 여섯 시간이 걸렸다. 클레멘시아는 엔다우먼트를 받았고, 다음 날에는 자신이 어릴 때 돌아가셨던 외할머니를 위한 의식을 받았다. 그날 클레멘시아와 그녀에게 침례를 준 선교사 랠프 브라운은 클레멘시아의 외조부모를 인봉하는 의식에 대리인으로도 참여했다.8

대회가 끝난 후 클레멘시아와 그녀의 아들은 오도날 부부와 함께 솔트레이크시티로 갔다. 그들은 템플스퀘어를 방문했고, 클레멘시아와 오도날 부부는 더 많은 엔다우먼트 의식에 참석했다. 또한 존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과테말라시티에 예배당과 선교부 본부를 짓는 일에 대해 논의했다.9

중앙아메리카에서 주님의 일이 확장되고 있었으며, 머지않아서 과테말라와 그 이웃 나라들을 포괄하는 선교부가 신설될 것이었다.


1952년 1월 15일, 존 윗소는 제일회장단에게 유럽의 후기 성도 이민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수천 명의 성도들이 고국을 떠났기에, 제일회장단은 존에게 이민자들의 이동과 안녕을 계속 파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성도들 중 일부는 남미, 아프리카 또는 호주로 이주했지만, 대부분은 종종 선교사와 다른 성도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미국이나 캐나다에 정착했다.

이주하는 교회 회원들이 피난처를 찾았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지만, 존과 다른 지도자들은 이런 성도들의 손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럽의 지부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염려했다. 유럽 대륙에서 교회가 성장하려면 성도들이 자국에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으로 그들이 자국에 남도록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나 그들은 수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말이다.

18개월 전, 존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럽 선교부 지도자 대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었다. 모임 중에 몇몇 선교부 회장들은 유럽 성도들이 이민을 가는 이유가 또 다른 전쟁의 발발에 대한 두려움과 북아메리카의 교회에서 찾을 수 있는 안정과 지원을 갈망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선교부 회장은 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함부르크에서만 공습으로 회원 28명이 사망했죠.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미국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다른 선교부 회장이 말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바다를 헤엄쳐서라도 갈 것입니다.”

존은 전쟁 동안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에 비해 고난을 덜 겪었던 덴마크에서도 성도들이 떠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회장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다.

한 선교부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 성전이 있다면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제안은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존의 지지 하에, 선교부 회장들은 유럽에 성전을 짓는 계획을 승인해 줄 것을 제일회장단에 제안했다. 존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개종시켜 미국으로 데려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대신, 교회는 세계에 성전을 세울 수는 있다.10

존이 이민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할 당시, 제일회장단은 유럽에 성전을 짓는 것에 대해 어떠한 발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존에게 성전 엔다우먼트를 여러 유럽 언어로 번역하는 위원회를 감독하도록 권한을 위임했었다. 당시 의식은 영어와 스페인어로만 받을 수 있었기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성도들은 의식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의식에 참여했다.

위원회는 네덜란드의 피터 플람을 포함한 몇몇 유럽 성도들을 모집하여 번역을 하게 했는데, 이렇게 번역된 의식문은 기존 성전에서 집행될 특별 세션에서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유럽에 성전을 지으면 여러 나라의 성도들에게 여러 언어로 의식을 베풀 수 있을 것이었다.11

존의 보고를 받은 지 몇 달 후, 맥케이 회장은 십이사도 정원회에게 이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럽의 지부들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한 후, 선지자는 얼마 전 영국 선교부 회장이 자신에게 영국에 성전을 짓도록 거듭 간청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맥케이 회장은 십이사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일회장단은 그 요청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고려했으며, 영국에 성전을 짓는다면 그와 동시에 스위스에도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동안 스위스는 중립을 유지하여 정치적 안정을 얻었다. 또한 스위스는 서유럽의 중심지와 가까운 곳이었다.

맥케이 회장이 말을 마치자, 존이 이렇게 말했다. “영국 회원들과 그 외 언어를 사용하는 선교부 지역의 회원들은 유럽에 성전이 세워지는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는 제일회장단의 계획에 전적인 지지를 표명했으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교회가 성전 건축에 착수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12


한편, 대서양 건너 베를린은 냉전의 중심에 있었다. 1949년에 독일은 두 나라로 갈라졌다. 소련이 점령한 동부 지역은 독일민주공화국 또는 동독이라고 하는 새로운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나머지 지역은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이 되었다. 베를린은 동독에 있었지만, 독일이 분할될 당시 베를린의 서쪽은 프랑스, 영국,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제 베를린도 공산주의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에 따라 동쪽과 서쪽으로 분할되었다.13

보통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오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봄, 연합군 지역에 있는 동독 선교부 본부로 가던 스물한 살의 헨리 부르크하트는 국경 관리들의 제지를 받았다. 동독 출신의 선교사인 헨리는 베를린의 남서쪽에 있는 주인 튀링겐에서 지방부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도 여러 번 서베를린에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관리들은 그가 십일조 목록을 포함한 지방부의 연례 보고서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재정 기록을 본 그들은 깜짝 놀랐다. 동독 경제가 불황이었고, 동독 지도자들은 국민들이 서독으로 돈을 보내거나 반출하는 것을 금지한 상태였다.

동독의 선교부 지도자로서 새로운 규제를 신중히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헨리는 십일조를 항상 동독 은행에 예치했다. 그러나 그 보고서를 나라 밖으로 가지고 가려는 그의 시도는 경찰관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들은 즉시 그를 구금했다.

사흘 동안 감금한 후에야 경찰관들은 헨리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그가 선교부 사무실에 보고서를 전달하는 것을 금지한 후에야 그를 풀어 주었다.14

약 한 달 후, 헨리는 교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서베를린으로 갔다. 엄밀히 말해 동독 시민들은 법적으로는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릴 자유가 있었지만, 정부는 외국의 종교를 포함하여 국민들에게 미치는 외부의 영향을 경계했다. 동독이 독일인이 아닌 종교 지도자들을 국경 밖으로 추방했기 때문에 동독 선교부의 북미 선교사들은 서베를린에서만 활동했다. 따라서 동독의 다른 모든 선교 사업은 헨리와 같은 동독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대회가 끝난 후, 선교부 회장인 아서 글로스는 헨리에게 동독 교회의 공식 기록 보관인이 되고 선교부 본부와 동독 지부들 사이를 연결하는 연락 담당자로 봉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헨리는 자신이 이 새로운 임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대회가 끝난 후 곧바로 튀링겐 지방부 회장에서 해임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선교부 사무실을 통해 자신이 베를린의 지방부 회장, 어쩌면 선교부 회장단의 보좌로 부름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주님의 뜻이야.’15

두 달 후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이 교회 회장이 된 후 첫 해외 순방으로 유럽에 왔을 때도, 헨리는 여전히 튀링겐에서 지방부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선지자와 그의 아내 에마 레이 맥케이는 6주 동안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스위스, 프랑스, 독일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독을 통과해서 베를린으로 가는 것은 위험할 것이라고 우려한 한 전임 선교부 회장은 그에게 베를린에 오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어쨌든 그는 베를린을 방문했다. 베를린은 분단된 독일의 양쪽 성도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16

맥케이 회장은 1952년 6월 27일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방문 중에 그와 글로스 회장은 헨리에게 만나자고 요청했다. 맥케이 회장은 헨리와 접견을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런 후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선교부 회장단의 보좌로 기꺼이 봉사하시겠습니까?”17

자신이 새로운 책임을 맡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헨리지만, 그 요청은 그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는 선교부 회장과 동독 성도들 사이를 연결하는 연락 담당자일 뿐만 아니라 선교부 회장단의 유일한 동독인 보좌가 되는 것이었다. 정부가 외국 종교 지도자들의 합법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는 사실상 동독에 있는 60개 이상의 지부를 관할하는 교회의 감리 역원이 될 터였다. 만약 동독 관리들과 교회 사이에 무슨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들은 그를 찾아올 것이었다.

이 부름으로 인해 헨리는 걱정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교회의 회원으로 살아 왔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일 뿐이었다. 또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염려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주님의 선지자가 방금 자신에게 부름을 주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2주도 채 되지 않아서, 헨리는 라이프치히로 이사하고 작은 선교부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부름을 수행하며 계속 바쁘게 지냈으며, 지방 정부 및 신권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새로운 책임은 큰 부담이 되었고, 그는 곧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것일까?” 헨리는 그렇게 자문했다.18


독일에서 성도 및 선교사들과 일주일을 보낸 후 맥케이 회장 부부는 이번 순방에서 이미 방문했던 스위스로 다시 갔다. 성도들 대부분은 모르는 일이었으나, 선지자는 영국과 스위스에 성전을 지을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 유럽에 온 것이었다. 영국에서 그는 런던의 바로 남쪽에 있는 서리주 뉴채플에 있는 부지를 선택했다. 그런 다음에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으로 가서 그곳에서 성전 부지를 선택했다. 하지만 뒤이어 네덜란드로 간 이후에 그는 자신이 선정한 스위스 성전 부지를 다른 누군가가 매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성전 부지 찾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19

7월 3일, 맥케이 부부는 취리히 공항에서 스위스-오스트리아 선교부 지도자인 새뮤얼과 르노라 브링허스트를 만났다. 그들은 차를 몰고 베른으로 가서 매물로 나온 부지 몇 곳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베른 외곽의 졸리코펜이라는 마을의 기차역에 멈추었다. 맥케이 회장은 왼편을 바라보며 숲 근처의 언덕 꼭대기를 가리켰다. 그는 그 땅을 구입할 수 있을지 궁금해했고, 새뮤얼은 그 땅은 매물로 나온 땅이 아니라고 대답했다.20

이튿날 아침 맥케이 회장은 계속해서 부지를 물색했다. 그는 베른 지부 집회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넓은 땅을 발견했다. 그곳은 성전을 짓기에 좋은 장소였으므로 그는 새뮤얼에게 즉시 그 땅을 구입하도록 승인했다. 부지 선정을 마친 선지자는 다음 날 베른을 떠나 마지막 순방 지역으로 이동했다. 7월 말,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바젤과 파리에서 많은 회중에게 말씀을 전했다.21

맥케이 회장이 돌아온 직후, 제일회장단은 스위스 성전 건축 계획을 발표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성도들은 뛸듯이 기뻐했다. 교회의 프랑스 정기 간행물인 『별』[L’Étoile]에 실린 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이는 교회가 유럽에 남아 유럽 선교부의 지부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명한다.”22

그런데 베른에서 문제가 생겼다. 새뮤얼이 성전 부지 매입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다. 그 땅은 30명의 상속자들이 관리하는 토지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매각에 반대했다. 11월 중순에 새뮤얼은 맥케이 회장에게 그 땅을 이제 구입할 수 없게 되었다는 편지를 썼다.

선지자는 이튿날 새뮤얼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물었다. “브링허스트 회장님, 우리를 반대하는 사악한 세력이 있습니까?”

새뮤얼은 그 답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들은 단지 마음이 바뀌었다고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뮤얼은 다른 두 땅에 대해 설명했다. 그중 하나는 맥케이 회장이 방문했을 당시에 가리켰던 졸리코펜 인근의 땅이었다. 새뮤얼은 그곳이 소음이 적고 교통량이 많지 않으면서도 전차 정거장에서 도보로 4분밖에 걸리지 않는 이상적인 장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땅은 얼마 전 매물로 나온 상태였다.

대화를 하는 동안 새뮤얼은 자신이 받은 영적 느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와 르노라는 두 땅 중 어느 곳을 맥케이 회장에게 추천할 것인지에 대해 기도했었다. 그 주 초에 그들은 마지막으로 졸리코펜 근처의 땅을 방문했다. 그곳을 걸으며 그들은 주님께서 그곳에 성전을 짓기를 원하신다는 평화로운 느낌을 받았다.

“여기가 확실해요.” 새뮤얼이 르노라에게 말했다.

그녀도 동의했다. “제 느낌도 그래요.”23

새뮤얼과 이야기를 나눈 맥케이 회장은 보좌들과 상의했고, 보좌들은 그 땅을 매입하도록 추천했다. 맥케이 회장은 새뮤얼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그 땅의 매입을 승인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거래가 완료된 후, 맥케이 회장은 선교부 회장인 새뮤얼에게 수고에 대한 감사 편지를 보냈다.

“이전 장소에 대해서는 5개월간 협상을 했으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 땅은 매물로 나온 지 일주일 만에 거래가 종결되었습니다!” 선지자는 놀라워했다. “주님의 손길이 이 일을 이끌어 준 것이 분명합니다.”24


이 무렵 존 윗소는 노르웨이에서의 출생부터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최근에 한 봉사까지를 정리한 회고록 『태양이 비치는 땅에서』[In a Sunlit Land]를 출판했다. 그는 원래 가족들을 위해 이 책을 썼지만, 친구들의 강권으로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마지못해 책을 출간하기로 했다. 그는 이 책을 자신의 후손과 교회의 “용감한 청소년들”에게 헌정했다.25

이제 80세가 된 존은 자신의 나이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눈에 생긴 작은 출혈로 시력이 손상된 그는 돋보기로만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바쁜 일정을 이어갔으나 심한 허리 통증이 시작되어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주치의와 만나기 시작했는데, 의사는 그의 증세를 암으로 진단했다.

의사들은 존의 나이 때문에 수술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존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아내 리아에게 점점 더 많이 의존하기 시작했다. 존은 딸 유도라의 남편인 사위 지 호머 더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풍성한 삶을 살았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기꺼이 살며 봉사할 거라네.”26

존은 이제 어머니 아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보다 열 살이나 더 많았다. 그가 긴 생애 동안 어떤 성과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노르웨이에서 교회에 가입하고, 그에게 교육을 받도록 격려하고, 신앙을 키워 준 어머니의 선택 덕분이었다. 아나 역시 속도를 늦추는 법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죽기 몇 년 전, 그녀는 시온에 정착한 다른 이민자들에게 자주 조언을 해 주었다.

존은 새로 도착한 한 개종자가 어머니를 찾아와 유타의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 심하게 불평했던 일을 아직도 기억했다. 아나는 즉시 그에게 “우리는 시온을 무너뜨리러 온 게 아니라 세우러 왔습니다”라고 상기시켰다. 그 개종자는 아나의 말을 마음에 새겼고, 그 말은 그의 삶을 바꾸었다.

존은 일생의 많은 시간을 리아와 함께 교회를 세우는 데 보냈다. 유럽에서 교회를 강화하고 지도자들을 훈련시켰던 그들의 노력은 유럽 성도들이 제2차 세계 대전을 견디고 그 격동의 여파를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제 그 성도들의 신앙과 근면은 두 개의 성전 건축으로 보상을 받게 될 것이었다.27

새로운 성전은 교회가 유럽에 굳게 세워지게 해 줄 것이며, 존이 사랑했던 또 다른 일인 계보 사업을 진척시킬 것이었다. 사실, 전쟁이 끝난 후 교회는 유럽의 기록 보관소와 교구들에 보관된 출생 및 사망 기록을 촬영하는 야심 찬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 수백만 개의 새로운 이름을 위해 성전 사업을 할 수 있었다.28

선교 사업에서 돌아온 이후 존과 리아는 또한 저술을 통해 교회를 굳건하게 했다. 그들은 함께 『지혜의 말씀: 현대적 해석』[The Word of Wisdom: A Modern Interpretation]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독자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계시에 대한 신앙과 영양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1935년부터 존은 『임프루브먼트 이라』의 편집자가 되어 독자들이 제출한 복음 관련 질문에 답하는 “증거와 일치”라는 칼럼을 정기적으로 썼다. 그는 나중에 그 칼럼들을 모아 몇 권의 책으로 출간했고, 그 책들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29

존의 건강은 해가 거듭될수록 악화되었다. 리아는 50년 넘게 함께한 남편이 곧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지만, 그의 병을 초연히 감당해 냈다. 그녀와 존은 사랑하는 동반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남편이 쇠약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아들 마셀이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회복된 복음에 대한 간증에서 힘을 얻었다.

그녀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가족 관계와 기쁨이 지속되는 내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이겨내는지 모르겠어.”

11월 19일, 존은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첫 외증손녀 케리 윗소 코플린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 무렵에 그는 병상에 누워 지냈지만 윗소 가족의 새로운 세대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되어 감사함을 느꼈다. 며칠 후, 주치의는 그에게 신장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고 알렸다.

존은 말했다. “그렇게 가는 거지.” 밖은 햇살이 눈 부신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1952년 11월 29일, 그는 집에서 눈을 감았으며, 주치의와 가족들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장례식에서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사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후 그는 『태양이 비치는 땅에서』에 나오는 존의 마지막 말을 인용했다. “내가 이타적으로 살고, 하나님을 섬기고 타인을 도우며, 인간의 선을 증진시키고자 시간과 재능을 근면하게 사용하려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후에 존을 매장하기 위해 차를 타고 장지로 가면서 리아는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를 보았다. 그 광경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리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존은 맹렬한 폭풍 속에서 태어났었지. 그래서 그의 시신을 매장하는 지금 아름다운 흰 눈 이불로 은총을 받는 거야.’30

  1. Pivaral, Journal, 2–3.

  2. Mecham, Oral History Interview, 57–58; “Lamanite Saints Assemble in Mesa,” Deseret News, Oct. 24, 1951, Church section, 14–15; “Lamanites Assemble in Mesa for Temple Session,” Deseret News, Oct. 31, 1951, Church section, 5.

  3. Ralph G. Brown, “Quetzaltenango-Guatemala,” 4; Ralph G. Brown to “Clemencia, Linda and Family,” Apr. 10, 2004, Ralph G. Brown Mission Papers, CHL; Golithon, “Clemencia Pivaral’s Baptism Story,” 1; Christofferson, Mission Journal, Feb. 19, 21, and 28, 1950; Mar. 1, 5, 7, and 12, 1950.

  4. Golithon, “Clemencia Pivaral’s Baptism Story,” 1.

  5. O’Donnal, Pioneer in Guatemala, 66–68; O’Donnal, “Personal History,” 72–73. 주제: Guatemala[과테말라]

  6. Pivaral, Journal, 4–5; see also John A. Widtsoe, La verdad restaurada ([Buenos Aires, Argentina]: Misión Argentina, [1935]).

  7. Pivaral, Journal, 10–18; O’Donnal, “Personal History,” 76; “Guatemalan Saints Attend S. L. Temple,” Deseret News, Nov. 14, 1951, Church section, [12].

  8. “Lamanites Assemble in Mesa for Temple Session,” Deseret News, Oct. 31, 1951, Church section, 5; Spanish Americ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Oct. 21–23, 1951; Arizona Temple, Endowments of the Living, 1927–57, volume 120, 1944–57, no. 3570, image 363, microfilm 962,067, Special Collections, U.S. and Canada Record Collection, FHL; Arizona Temple, Endowments for the Dead, 1927–70, Heir Indexes, 1927–72, Baptisms for the Dead, 1943–79, Oct. 2, 1951, no. 23524, image 2454, microfilm 450,994, Special Collections, U.S. and Canada Record Collection, FHL; Arizona Temple, Sealings for the Dead, Couples, and Children, 1942–70, June 27, 1951, Mercedes de Jesus Orillana and Ponciano Pardo, image 1112, microfilm 456,259, Special Collections, U.S. and Canada Record Collection, FHL; Golithon, “Clemencia Pivaral’s Baptism Story,” 1.

  9. O’Donnal, “Personal History,” 77; “Guatemalan Saints Attend S. L. Temple,” Deseret News, Nov. 14, 1951, Church section, [12].

  10. Emigration Report, Jan. 15, 1952,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30–60, CHL; Minutes of the European Mission Presidents’ Meeting, July 5–6, 1950, 1, 64–68, John A. Widtsoe Papers, CHL; David O. McKay, Diary, Dec. 27, 1951 [CHL]. 주제: 이주; 성전 건축

  11. Minutes of the European Mission Presidents’ Meeting, July 6, 1950, 67; John A. Widtsoe to David O. McKay, Nov. 9, 1950, copy; May 21, 1951, John A. Widtsoe Papers, CHL; Memorandum, Dec. 7, 1950, David O. McKay Papers, CHL; see also Summary of Minutes of the Conference of the Presidents of the European Mission, July 4–10, 1950,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CHL.

  12. David O. McKay, Diary, Nov. 30, 1951; Dec. 18–20, 1951; Jan. 3, 1952; Feb. 13, 1952; Apr. 17, 1952 [CHL]; Romney, Journal, Apr. 17, 1952; Cowan, “Pivotal Swiss Temple,” 133–35. 주제: 성전 건축

  13. Fink, Cold War, 72–76; Large, Berlin, 402–18.

  14. Germany Hamburg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Mar. 31, 1952; Kuehne, Henry Burkhardt, 1; Fassmann, Walter K. Fassmann, 133.

  15. Kuehne, Henry Burkhardt, 10–11, 13;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63; Hall,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in the Former East Germany,” 490, 494–95.

  16. Kuehne, Henry Burkhardt, 11–12; David O. McKay, Diary, May 28 and June 6, 1952 [CHL]; “Pres. and Mrs. McKay to Tour Missions throughout Europe,” Deseret News, May 28, 1952, Church section, 2; “1500 Berliners Out to Greet President,” Deseret News, July 23, 1952, Church +section, 4. 주제: Germany[독일]

  17. “1500 Berliners Out to Greet President,” Deseret News, July 23, 1952, Church section, 4; Burkhardt, Oral History Interview, 1.

  18. Burkhardt, Oral History Interview, 1–2; Burkhardt, “Henry Johannes Burkhardt,” 26; Kuehne, Henry Burkhardt, 13–15;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358.

  19. David O. McKay to Stephen L Richards, J. Reuben Clark Jr., and the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June 13, 1952; July 5, 1952,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30–60, CHL; David O. McKay, Diary, May 26, 1952 [CHL]; Morning Session, English language, Sept. 11, 1955, 2, Swiss Temple Dedicatory Addresses, CHL.

  20. Bringhurst, Mission President Journal, 6; David O. McKay, Diary, Nov. 18, 1952 [CHL]; David O. McKay to Samuel Bringhurst, Nov. 19, 1952, volume 151, David O. McKay Scrapbooks, CHL.

  21. David O. McKay to Stephen L Richards, J. Reuben Clark Jr., and the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July 5, 1952,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30–60, CHL; David O. McKay, Diary, July 5–22 and 28, 1952 [CHL]; “McKay Finishes Tour, Lauds LDS Missions,” Salt Lake Tribune, July 15, 1952, 12.

  22. “Pres. McKay Interview Covers Many Subjects,” Deseret News, July 30, 1952, Church section, 2; Golden L. Woolf, “Un temple en Europe,” L’Étoile, Oct. 1952, 220.

  23. Samuel Bringhurst to David O. McKay, Nov. 14, 1952, copy; David O. McKay to Samuel Bringhurst, Nov. 19, 1952, volume 151, David O. McKay Scrapbooks, CHL; David O. McKay, Diary, Nov. 18, 1952 [CHL]; Bringhurst, “Acquisition of Property of the Swiss Temple,” 198–99; Bringhurst, Mission President Journal, 6, 8; Morning Session, English language, Sept. 11, 1955, 3, Swiss Temple Dedicatory Addresses, CHL.

  24. David O. McKay to Samuel Bringhurst, Nov. 19, 1952; Nov. 24, 1952, volume 151, David O. McKay Scrapbooks, CHL. 주제: 성전 건축; Switzerland[스위스]

  25. John A. Widtsoe, In a Sunlit Land (Salt Lake City: Milton R. Hunter and G. Homer Durham, 1952); John A. Widtsoe to “the Brethren of the General Authorities of the Church,” Oct. 10, 1952, John A. Widtsoe Papers, CHL.

  26. Durham, “Death of John A. Widtsoe,” 1–5; Leah Dunford Widtsoe to Ann Rees, Dec. 19, 1952, John A. Widtsoe Papers, CHL.

  27. Durham, “Death of John A. Widtsoe,” 1–5; Leah Dunford Widtsoe to Ann Rees, Dec. 19, 1952, John A. Widtsoe Papers, CHL; Saints, volume 2, chapters 3233, and 36; Widtsoe, In the Gospel Net, 119–20.

  28. Parrish, John A. Widtsoe, chapter 23; Allen, Embry, and Mehr, Hearts Turned to the Fathers, 222–29; Genealogical Society of Utah Board of Trustees, Minutes, Oct. 14, 1947; May 17 and Oct. 24, 1950. 주제: Family History and Genealogy[가족 역사 및 계보]

  29. John A. Widtsoe and Leah Dunford Widtsoe, The Word of Wisdom: A Modern Interpretation (Salt Lake City: Deseret Book, 1937); John A. Widtsoe, Evidences and Reconciliations: Aids to Faith in a Modern Day, 3 vols. (Salt Lake City: Bookcraft, 1951).

  30. Durham, “Death of John A. Widtsoe,” 3–10; Leah Dunford Widtsoe to Ann Rees, Dec. 19, 1952, John A. Widtsoe Papers, CHL; Parrish, John A. Widtsoe, 662–63; In Memoriam: John A. Widtsoe, 25, 27. 주제: John and Leah Widtsoe[존과 리아 윗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