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24 엄청난 과업


“엄청난 과업”,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0) 제24장

제24장: “엄청난 과업”

제24장

엄청난 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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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부조회 회관

“유타준주의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상점이 필요한 곳마다 협동조합 상점이 생겨났다.” 조지 큐 캐넌이 1869년 5월 19일 자 Deseret Evening News『데저렛 이브닝 뉴스』 사설에 쓴 내용이었다. “이 준주의 모든 여성이 이런 상점에 관여하게 하자. 그러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 그들 사이에서 거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1

솔트레이크시티 제15와드의 상호부조회 회장인 세라 킴볼은 여성과 협동조합 운동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다룬 이 사설의 관점에 큰 감명을 받았다. 협동은 성도들이 자급자족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요소였다. 여성들은 협동조합에서 판매하는 많은 상품을 만들었으며, 또 상점에서 자주 물건들을 구매했다.

브리검 영은 아무리 일상적인 일일지라도 시온 건설을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주님의 성스러운 사업의 일부라고 가르쳤다. 최근에 그는 성도들에게 협동조합의 상점 및 그 건물에 “주님께 거룩함”이라는 문구가 적힌 상점에서만 물건을 살 것을 촉구했다. 여성들은 이러한 상점들을 지원함으로써 외부의 상인이 아니라 성도들의 유익에 일조했다.2

세라와 그녀가 속한 상호부조회는 전부터 협동이라는 이상을 장려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지난해에 그들은 자신들의 와드에 상호부조회 회관 건립을 시작했다. 새로운 회관은 최초의 상호부조회가 조직된 나부의 조셉 스미스 상점을 본뜬 2층짜리 건물이었다. 2층에는 예배 및 예술과 과학을 목적으로 사용될 작업실이 마련될 계획이었고, 1층에는 양모 원단, 실꾸리, 융단 깔개, 말린 과일, 모카신 등 상호부조회 회원들이 만든 상품들을 팔고 거래하는 협동조합 상점이 운영될 것이었다.3 또한 이곳은 다른 소규모 협동조합 상점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의 가장 큰 조합인 ‘시온의 협동조합 상업 협회’(Zion’s Cooperative Mercantile Institution, Z.C.M.I.)의 소매상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상호부조회 회관이 완공되면 이는 교회에서 그런 기능을 담당하는 최초의 건물이 될 것이었다. 상호부조회 모임은 보통 가정이나 와드 건물에서 했다. 하지만 나부에서 조직된 첫 상호부조회의 창립 일원이었던 세라는 제15와드 여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재능을 계발하고 강화할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원했다.4

지난해 세라는 회관 건립을 추진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건물 건립을 위해 한 남성이 도시의 구획 하나를 기증하겠다고 했지만, 세라를 비롯한 상호부조회 여성들은 땅값으로 백 달러를 지불하겠다고 고집했다.5 이후에 와드에서 새 건물을 기공한 뒤, 세라는 나무망치와 은 모종삽을 들고 석공을 도와 초석을 놓았다.

그녀는 초석 위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이 건물은 상호부조회가 신체적, 사회적, 도덕적, 지적, 영적, 재정적 향상을 위해,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한 분야에 기여하기 위해 그들의 노동력과 자원, 감각, 재능을 더욱 온전히 결집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합니다.”6

이 여성들은 그로부터 6개월 동안 건축업자들을 고용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이제 건물은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 회관에 창문 블라인드를 설치하고 양탄자를 깔기 위해 협동 정신으로 돈을 모금하고 자원을 모았다. 제15와드는 교회 내에서 부유한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이 와드 상호부조회가 어떻게 그 일을 그렇게 잘 해냈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한 세라의 대답은 간단했다. “합심해서 일하고 우리가 받은 물자들을 계속 가동한 덕분이에요.”7

『데저렛 이브닝 뉴스』에 사설이 실린 다음 날, 세라는 그 내용을 상호부조회 회원들에게 알렸다. 그 사설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개혁이라는 대의에 여성이 조력할 때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여성에게 책임을 맡기면, 그들은 위대한 일들을 해낼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 낼 것이다.”

세라는 여성들을 위한 새날이 밝아 오고 있다고 여겼다. 그녀는 상호부조회 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여성, 그리고 그들의 능력과 의무가 지금처럼 많이 언급된 적은 없었습니다.”8


제15와드 상호부조회에서 회관을 건립한 시기에, 강력한 힘을 내는 증기 기관차가 대륙을 가로지르며 승객과 화물을 빠르게 실어 날랐다. 제일회장단은 유타로 유입되는 세속적인 영향력을 경계하는 한편, 그 새로운 대륙횡단철도 덕택에 장로들을 선교 임지로 보내고 사람들을 시온으로 모으는 일이 더 수월해지고 경비도 더 저렴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륙횡단철도 선로 공사가 완료되고 나서 일주일 후에 브리검 영은 솔트레이크시티를 오그던과 연결하는 교회 소유의 철도 기공식을 가졌다.9

그 시기에 조셉 에프 스미스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소재한 교회 역사가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에 서른 살이 된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에서 많은 책임을 맡고 있었다. 3년 전에 하와이에서 귀환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사도로 부름받고 제일회장단의 보좌로 성별되었다.10

1869년 봄이 지나가고 여름으로 접어드는 지금, 조셉 에프 스미스는 새로운 도전에 맞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사촌인 알렉산더 스미스와 데이비드 스미스가 유타로 오고 있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아들들인 그들은 일리노이에 살고 있었으며,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이었다. 알렉산더와 데이비드는 자신들의 형인 조셉 스미스 삼세를 아버지의 과업을 이어 갈 정당한 계승자이자 선지자로 지지했다.

조셉 삼세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더와 데이비드도 자신들의 아버지가 복수결혼을 가르치거나 시행한 적이 없다고 믿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별세한 후 브리검 영이 그 원리를 도입한 것이라 주장했다.11

조셉 에프 스미스는 이따금 사촌들과 편지를 주고받긴 했지만, 서로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3년 전인 1866년에 그는 알렉산더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알렉산더는 캘리포니아로 선교 사업을 가던 도중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설교를 하려고 들렀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아버지와 복수결혼에 관한 자신의 주장이 성도들에게 반박당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아버지와 하이럼 스미스가 나부의 교회 신문인 『타임즈 앤드 시즌스』에 공표한 성명서를 준비해 왔었다. 그 성명서는 복수결혼을 규탄하고 성도들이 그런 행위에 가담하는 것을 부인하는 듯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12

1866년 당시 조셉 에프 스미스는 사촌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싶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다 뜻밖에도 그는 선지자 조셉과 복수결혼의 관련성을 증명하는 작은 문서를 찾게 되었다. 그는 조셉 스미스가 몇몇 충실한 성도들에게 그 원리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들 중에는 브리검 영과 현재 유타 준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복수결혼 실행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기록해 두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결혼에 관한 주님의 계시도 있었는데, 그것은 1843년에 조셉 스미스가 기록하고 1852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것이었다. 그 계시에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신권 권세로 영원히 함께 인봉될 수 있는지가 설명되어 있었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아브라함을 수많은 후손으로 축복하시겠다는 당신의 성약이 성취되도록 하시기 위해 이따금 복수결혼을 명하신다는 설명도 있었다.13

그 계시는 조셉 스미스가 복수결혼을 가르치고 시행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조셉 에프 스미스는 선지자 조셉이 복수결혼을 했다는 추가적인 증거 문서를 찾아내지 못했었다.14 당시 조셉은 사촌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록들만 놓고 보자면 너에게 유리하지.”15

알렉산더가 데이비드와 함께 유타에 다시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 조셉 에프 스미스는 조셉 스미스가 복수결혼을 했다는 증거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16 복수결혼은 조셉 에프 스미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옹호하기로 결심했다. 몇 년 전에 그는 첫 번째 부인이었던 르비라와 이혼을 했다. 그들이 이혼한 데에는 그가 두 번째 아내인 줄리나 램슨과 결혼하면서 원래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갈등이 악화된 것이 부분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그 이후에도 조셉 에프 스미스는 세라 엘렌 리차즈를 세 번째 아내로 맞았다.17 그에게 복수결혼에 대한 공격은 자기 가족의 토대를 이루는 성약 관계를 위협하는 일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조셉 에프 스미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나부에서 심각한 위험들에 맞서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지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따금 비평가들로부터 자신들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승인된 복수결혼의 시행 자체는 규탄하지 않으면서도 그릇된 시행 방식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나부에서 이루어지던 복수결혼에 관한 소문에 대응했다. 그렇게 그들이 주의를 기울인 탓에 선지자 조셉과 하이럼이 복수결혼 시행과 관련 있었다는 기록상의 증거가 거의 전무해진 것이었다.18

조셉 에프 스미스는 역사 기록상의 이러한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초기에 복수결혼을 했던 사람들이 서명한 진술서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이야기를 나눈 여성들 중에는 이생과 다음 생을 위해 조셉 스미스에게 인봉됐던 이들도 있었고, 영원만을 위해 인봉된 이들도 있었다. 조셉 에프 스미스는 또한 작은어머니 에머가 복수결혼 시행과 관련해서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의 큰누나 러비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서부로 떠난 후 한동안 에머와 함께 살았었다. 러비나는 에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증언했는데, 그 내용은 에머가 남편의 여러 아내 중 몇몇이 남편과 인봉되는 것에 동의했으며 그 인봉 자리에도 직접 참석했었다는 것이었다.

그해 초여름, 조셉 에프 스미스는 몇 주에 걸쳐 진술서들을 계속 모으면서 자신의 사촌들이 도착하기만을 매일 기다렸다.19


1869년 7월 22일, 세라 킴볼은 갓 완공된 제15와드 상호부조회 회관에서 첫 모임의 개회를 선언했다. 세라는 그곳에 모인 여성들을 향해 “이 건물은 모두의 유익을 위해 지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20

그로부터 2주 후인 8월 5일, 제일회장단은 그 건물을 헌납했다. 헌납식에서 합창단은 엘리자 스노우가 가사를 붙인 새로운 찬송가를 불렀다. 시온을 보호하는 데 상호부조회 회관이 하게 될 역할을 노래하는 이 찬송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 이 회관에서 하나님과 같이

강하고 성숙된 화합 이루리니

아버지, 당신의 지혜로 인도하사

곳곳이 다 채워지게 하소서

사랑과 노동의 안식처로

이 집을 당신께 헌납하오니

시온의 복리 영원히

이 집의 원동력 되길 바라옵나이다.21

제일회장단은 이 건물에 경제적 협력 및 지역 내 생산이라는 이상이 반영되었다는 것에 흡족해했다. 브리검은 헌납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시온을 위해 여성과 남성이 협력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지상에 대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엄청난 과업이 있으며, 우리가 조달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재능과 지원이 요구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는 “여성들의 도움은 남성들의 도움 못지않게 필수적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상호부조회는 가난한 사람의 유익과 부자의 유익 모두를 위해 존재합니다. 상호부조회는 모든 상황에서의 유익을 위해, 또한 후기 성도 지역 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존재합니다.”22

8월말에 열린 모임에서 세라도 협동의 가치에 대한 간증을 전했다. 그녀는 협동이 시온을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방식 중 하나라고 가르쳤다. 세라가 생각하기에 지역 내 생산은 성도들의 복지에서 매우 중요했다.

세라는 이렇게 주장했다. “단 한 차례의 모임에서도 이 주제가 망각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23


알렉산더 스미스와 데이비드 스미스는 그해 여름에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착 후 첫날 밤은 조셉 에프 스미스의 형이자 교회의 감리 축복사인 존, 그리고 그의 아내 헬렌과 함께 보냈다. 이틀 후에 두 사람은 태버내클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 허락을 받고자 브리검 영의 집무실에 들렀다. 태버내클은 이따금 타 종교 단체들이 집회를 열기 위해 이용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요청을 깊이 숙고한 끝에 브리검을 비롯한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두 사람의 동기를 경계했고 승인을 거부했다.24

역사가 사무실에서 조셉 스미스가 복수결혼을 가르치고 시행했다는 증거를 계속 수집하던 조셉 에프 스미스는 자신과 교회가 나부에서의 복수결혼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의 범위를 크게 확대해 나갔다. 더 많은 진술서를 모으는 것 외에도 그는 선지자 조셉의 서기이자 친구이며 심복이었던 윌리엄 클레이튼의 일지를 샅샅이 조사했다. 윌리엄의 일지는 초기의 복수결혼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는, 나부에서 온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였다. 이는 선지자 조셉이 복수결혼에 참여했다는 증거가 되었다.25

조셉 에프 스미스는 역사가 사무실에 있거나 가족과 보내는 시간 외에는 엔다우먼트 하우스에서 의식을 집행하며 지냈다. 8월 초에 그와 조지 큐 캐넌은 그들의 친구인 조너선 나펠라에게 엔다우먼트를 집행했다. 조너선은 그 의식을 받고, 교회 본부를 방문하고, 브리검 영과 다른 성도들을 만나기 위해 7월 하순에 하와이에서 솔트레이크시티로 왔었다.26

한편, 솔트레이크시티에 계속 남아 있던 알렉산더 스미스와 데이비드 스미스는 설교를 할 때마다 군중의 관심을 끌었다. 교회의 협동조합 운동을 반대하던 부유한 상인들은 그 두 형제에게 큰 규모의 개신교 교회 건물을 빌려주었다. 그들의 의도는 브리검의 지도력과 교회를 비난하는 두 형제의 강연을 통해 브리검 영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알렉산더는 3년 전에 했었던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와 복수결혼의 연관성을 부인하기 위해 『타임즈 앤드 시즌스』에 실린 글을 주로 사용했었다.

같은 시기에 조셉 에프 스미스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도시 도처에 있는 여러 와드 건물들을 다니며 나부에서 있었던 복수결혼에 관한 설교를 했다.27 8월 8일, 조셉 에프 스미스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회중에게 말씀했다. 그는 초기의 복수결혼에 관하여 자신이 수집한 일부 증거들을 제시하며 복수결혼 시행 문제와 관련하여 『타임즈 앤드 시즌스』에 실린 자신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성명서들을 언급했다.

“저는 그저 다음과 같은 사실들만을 알 뿐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런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신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들 가운데 있었고, 이 교리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셉 에프 스미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행한 일은 그들의 목숨을 지키고 복수결혼을 시행하는 다른 남성과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 두 형제는 이곳에서와는 달리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부에서는 악마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으며, 도처에 반역자들이 있었습니다.”28


9월에 일라이어스 해리슨이라고 하는 한 후기 성도 편집장은 Utah Magazine(『유타 매거진』)에 알렉산더 스미스와 데이비드 스미스의 전도를 조롱하는 칼럼을 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교회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하나인 윌리엄 가드비에게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 정기 간행물을 출판하고 있었다. 일라이어스는 복원 교회를 가차없이 비하하며, 알렉산더와 데이비드가 그들 아버지의 성역에 대해 “몹시 무지”하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 그리고 『타임즈 앤드 시즌스』에 실린 특정한 주장을 근거로 자신들의 아버지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데 각별한 열의를 쏟는다.” 일라이어스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데이비드와 알렉산더는 조셉 스미스가 일부다처제를 부인했음을 증명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가 그것을 시행했음을 증명할 수 있으니 말이다.”29

일라이어스는 자주 교회를 옹호하는 칼럼을 썼으나, 그것은 단지 『유타 매거진』을 출판하는 본 의도를 숨기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협동조합 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일라이어스와 윌리엄 가드비는 지역 경제를 강화하는 데 자신의 이윤을 쓰지 않는 상인들을 피하고 성도들을 지원하라는 제일회장단의 권고를 은밀히 반대해 왔다.30 윌리엄은 매우 교묘하게 제일회장단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였으며, 솔트레이크시티 시의원이자 제13와드 감독단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윌리엄은 브리검 영의 사위로 그와 절친한 관계였다.31

일라이어스와 마찬가지로 윌리엄도 선지자 브리검 영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성도들의 삶에 지나치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여겼다. 협동조합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윌리엄과 같은 상인들은 지역 시장을 쥐락펴락하며 물가를 높여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교회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며 가난한 성도들과 지역의 협동조합 상점들이 이득을 얻도록 낮은 물가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시장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윌리엄은 브리검이 협동조합의 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것에 화가 났다. 윌리엄과 일라이어스는 자신들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기 위해 『유타 매거진』을 더욱더 많이 이용하기 시작했다.32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그들의 욕망은 그로부터 1년 전에 있었던 뉴욕 출장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두 사람은 심령론자들의 교령회를 통해 망자와의 대화를 시도했다.(교령회[séances]: 영매를 통해 죽은 사람들의 영혼과 교통하려는 모임—옮긴이) 심령론은 미국 남북 전쟁의 여파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쟁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죽은 이들과 대화하고자 갈망했다. 그러나 이것은 악마로부터 가짜 계시를 받는 짓이라며 오래전부터 교회 지도자들이 규탄해 온 행위였다.

윌리엄과 일라이어스는 그런 경고를 무시한 채 교령회에 몰두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조셉 스미스, 히버 킴볼, 사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영들, 심지어 구주와도 이야기를 나눴다고 믿게 되었다. 그 대화가 실제였다고 확신한 윌리엄과 일라이어스는 자신들이 보기에 잘못됐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교회에서 제거하라는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고 여겼다. 유타로 돌아온 두 사람은 교회 지도자들과 정책을 교묘히 비판하는 글과 비교적 긍정적인 내용을 실은 칼럼을 『유타 매거진』에 나란히 게재하기 시작했다.33

일라이어스는 스미스 형제들에 대한 칼럼을 내고 곧이어 브리검 영과 교회 정책을 더욱 공격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협동조합 운동은 유타의 경제를 활성화할 경쟁적 추진력을 성도들에게서 앗아갔다고 주장했다. 일라이어스는 유타의 경제가 너무 취약해서 지역 내 생산으로 유타 경제를 지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또한 그는 성도들이 너무도 이기적이기 때문에 지역 사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결론지었다.34

그런 후 10월 16일, 일라이어스는 성도들에게 유타의 광산 산업을 개발하도록 촉구하는 사설을 잡지에 실었다. 수년간 브리검 영은 교회가 후원하는 몇몇 광산 산업을 승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용한 광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유타에 더 큰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고 계층 분화가 생길 것을 우려했다. 그런 염려 때문에 그는 준주에서 독자적으로 채굴 사업을 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35

일라이어스와 윌리엄이 교회를 겨냥해 면밀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이 곧 분명하게 드러났다. 10월 18일, 올슨 프랫과 윌포드 우드럽, 조지 큐 캐넌은 일라이어스와 윌리엄, 그리고 두 사람을 옹호하는 그들의 친구들을 만났다. 일라이어스는 지극히 냉소적이었고, 일라이어스와 윌리엄 둘 다 제일회장단을 지지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닷새 후, 솔트레이크시티 선지자 학교 모임에서 윌리엄은 자신의 판단력이 더 나은데도 브리검이 전하는 경제적인 조언을 따라 오긴 했지만, 선지자가 상업적인 면에서 성도들의 안내자 역할을 할 권한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라이어스는 브리검의 지도력에 맞서 더 반항적인 발언을 이어 갔다. “그건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되었다고요!” 그는 소리쳤다.36

며칠 후, 솔트레이크시티 고등평의회는 시청에서 일라이어스와 윌리엄을 만났다. 일라이어스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말에 절대 오류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며 비난했다. 윌리엄은 심의를 거부하며 자신과 일라이어스가 더 높은 영적 권세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강신술자 교령회를 암시했다.

“우리는 결단코 신권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는 휘장 뒤편에 존재하는 힘이 있으며, 이는 영향력을 지니고 지시를 준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영향력과 지시는 언제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말을 마치자 브리검이 고등평의회를 향해 발언했다. “제가 이 왕국에서 추구해 온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남성과 여성들이 모든 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 지도자들이 계시에 따라 회원들에게 권고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스스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단언했다. 브리검은 “우리는 구주와 조화를 이루며 일합니다.”라고 말했다. “구주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조화를 이루어 일하시며,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들이신 구주와 협력합니다.”

브리검은 또한 교회 지도자들이 실수할 리 없다는 의견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권을 지닌 사람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실수하지 않는 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를 통해 역사하실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브리검은 윌리엄과 일라이어스가 『유타 매거진』을 통해 교회를 계속 비난하고자 한다면 원하는 대로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 두 사람과 외부의 상인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계속 협동을 전파하고 시행할 것이었다.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할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들을 권고할 권리가 있으며, 그들에게는 제 권고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윌리엄과 일라이어스에게 주어진 해명 기회가 끝나자, 스테이크 회장은 그들이 배도했으므로 교회에서 파문할 것을 제의했다. 고등평의회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며, 일라이어스와 윌리엄의 동료 여섯 명을 제외한 그곳의 모든 사람이 그 결정을 지지했다.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