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26 시온에 가장 유익하도록


“시온에 가장 유익하도록”,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0) 제26장

제26장: “시온에 가장 유익하도록”

제26장

시온에 가장 유익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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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조지 성전 설계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시작된 검약 운동은 1870년의 봄과 여름 동안 준주 곳곳의 상호부조회로 퍼져 나갔다. 이미 간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시골 마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샌터퀸 상호부조회의 엘리자베스 스티크니 회장과 여성들은 도시의 자매들과 발을 맞추기 위해 마을의 학교 건물에 모여 야유회를 열었다. 여성들은 통곡으로 만든 빵과 콩으로 만든 수프로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며, 천을 짜는 데 사용할 실 스무 타래를 손수 자았다.1

여러 정착촌에 또 한 번 메뚜기 떼가 몰려들어 성도들의 작물에 피해를 입히자 검약은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5월에 열린 솔트레이크시티의 선지자 학교 모임에 참석한 조지 에이 스미스는 제일회장단이 곡물을 비축하도록 거듭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한탄했다. 그는 준주와 중앙 정부에서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메뚜기 떼에 빗대어 말했다.

“우리를 무너뜨려 자기 배를 불리고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를 타도하기 위해 이곳에 군대를 보내고, 우리를 뿔뿔이 흩어 놓고, 우리가 사는 터전을 초토화하려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우리 종교가 틀렸다고 증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컬럼의 법안은 상원에서 검토되고 있었으며, 나라의 입법자들은 성도들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솔트레이크시티의 비평가들이 교회에 대한 여론을 악화하려 한다고 여긴 조지는 선지자 학교의 일원들에게 인내하고 현명하게 처신하며, 남을 언짢게 하는 행동을 삼가라고 당부했다. 또한, 그는 성도들을 이끌기 위해 악한 자들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전했다.2

윌리엄 가드비와 일라이어스 해리슨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조지가 말한 그 악한 자들에는 그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윌리엄과 일라이어스는 시온 교회를 조직한 뒤 그들의 ‘새로운 운동’을 이끌어 갈 “새 인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윌리엄은 조셉 스미스 삼세에게 접근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를 지도자로 영입할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셉은 그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았다.3

그해 봄에 아마사 라이먼이 시온 교회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곧 그가 시온 교회를 이끌게 되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마사는 배도하여 1867년에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해임되었기에, 그가 ‘새로운 운동’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마사의 장남인 프랜시스 라이먼은 부친의 결정을 전해 듣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곧 상심이 너무도 깊어져 논쟁을 벌일 여력조차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몇 시간이나 눈물을 쏟았다.4

브리검은 선지자 학교의 일원들에게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그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브리검은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계속하겠노라고 맹세하며 이렇게 밝혔다. “저는 다스릴 권한을 지니신 예수께서 다스리실 시기가 올 때까지 제 영향력으로 이스라엘을 강화하려 합니다.”

그해 7월, 브리검은 선지자 학교의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다. 형제들의 간증을 들은 후, 그도 구주의 희생에 대한 간증을 전했다. 그런 다음 브리검은 과거에 충실했던 이들이 교회에서 이탈하는 등 성도들이 여러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시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혜택을 얻고자 한다면, 복음의 교훈대로 생활해야 합니다.”

브리검은 형제들에게 주님의 종들이 전하는 권고를 따르도록 촉구하며,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했다.5


그해 여름, 마틴 해리스가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유타에 도착했다. 마틴이 서부로 오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브리검 영은 지난날 교회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바쳤던 그를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브리검은 경험 많은 선교사인 에드워드 스티븐슨에게 마틴을 위해 기금을 모으고, 노인인 그가 커틀랜드에서부터의 먼 여정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렇게 지시했다. “제가 가진 돈이 모조리 들더라도 그분을 이곳으로 모셔 오십시오.”6

마틴이 도착하자 솔트레이크시티가 온통 술렁였다. 물론 그는 과거에 교회의 회원이었던 이들 중 처음으로 유타에 온 인물은 아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초대 회장인 토머스 마쉬도 1838년에 교회를 떠난 것을 깊이 후회하며 13년 전에 다시 침례를 받고 서부로 왔었다. 그러나 마틴은 몰몬경의 증인이라는 위치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이제 여든일곱이 된 그는 새로운 경륜의 시대 초기에 일어난 몇몇 기적을 직접 경험한 마지막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7

마틴은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한 뒤 곧 브리검 영을 찾아갔고, 선지자는 그에게 9월 4일에 태버내클에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약속한 날, 마틴은 30분 동안 연단에 서서 종교 부흥이 일던 1810년대 후반에 진리를 찾던 자신의 이야기를 나직한 음성으로 전했다.8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영은 제게 어떤 교회에도 속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어느 교회에도 하나님의 권세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은 제가 어느 종파의 교회에서 침례를 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그냥 제가 혼자 임의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교회를 조직할 때까지 어느 교회에도 가지 않았습니다.”9

그 후로 몇 주 동안 마틴은 아내와 자녀를 비롯해 준주에 살고 있는 가족들과 재회했다. 그의 형 에머는 유타 북쪽에 있는 캐시밸리에서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동생인 네오미 벤트는 남편과 사별하고 유타밸리에서 살고 있었다. 9월 17일, 마틴과 네오미 남매는 엔다우먼트 하우스로 갔다. 그곳에서 마틴은 에드워드 스티븐슨에게 재침례를 받고, 올슨 프랫과 존 테일러, 윌포드 우드럽, 조셉 에프 스미스에게 교회의 회원으로서 재확인을 받았다. 그런 뒤 남매는 그들의 조상 몇을 위한 침례와 확인을 받았다.10

마틴은 다음 달에 열린 교회의 10월 연차 대회에서 몰몬경은 참되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책이라는 간증을 전했다. 뒤이어 연단으로 나간 조지 에이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마틴 해리스 형제님의 간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몰몬경 자체가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몰몬경이 참되다는 교리를 알게 되리라는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몬경의 증인이 되었습니다.”11


1870년 11월이 끝나갈 무렵, 수지 영은 마차를 타고 유타 남부에 있는 성도들의 정착지 세인트조지로 향하고 있었다. 수지는 남쪽으로 가는 여정 동안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마차에는 수지의 어머니인 루시와 여동생 메이블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라이언 하우스에서 여러 해 동안 북적이는 생활을 마치고 세인트조지에 있는 자신들만의 집으로 이사를 가는 길이었다. 수지의 아버지인 브리검 영도 잠시 유타 남부로 올 예정이었다. 이제 곧 일흔 줄에 들어설 브리검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기후가 더 온화한 세인트조지에서 겨울을 나는 게 나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12

수지가 그렇게 노래를 부른 것은 마차 안의 분위기를 띄워 보려는 마음도 있었다. 교회의 가을 대회를 며칠 앞둔 10월 3일, 수지는 열여덟 살 된 언니 도라와 함께 어머니의 생일잔치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갔다. 도라의 약혼자인 몰리 던포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은 당시 솔트레이크밸리에 살고 있던 몇몇 개신교 목사 중 한 사람을 찾아갔다. 도라와 몰리는 수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사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수지는 언니가 벌인 도피 행각이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일은 수지의 부모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도라는 몰리와 2년째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몰리는 충실한 후기 성도 상인 가정에서 자란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코올 의존증이 있었고, 브리검과 루시는 몰리가 도라에게 맞는 배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이 딸들을 세인트조지로 데려가고 싶었던 이유에는 도라와 몰리를 480여 킬로미터 거리만큼 떼어 놓으려는 것도 있었다.13

그러나 이제 도라는 결혼을 했으므로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수지는 이 일로 어머니의 상심이 얼마나 큰지를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수지는 어머니가 기운을 차리도록 최선을 다했으나 그 무엇도 실질적인 도움은 안 되는 듯 보였다.14

솔트레이크시티와 세인트조지 사이에는 철도가 없었으므로, 이들이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는 데는 2주가 걸렸다.15 세인트조지는 바위투성이 붉은 절벽들이 둘러싼, 큰 강이 흐르는 산간 지대에 세워진 마을이었다. 약 10년 전에 이 지역을 둘러보던 브리검은 그 계곡을 내려다보며 이곳에 집과 교회가 있는 도시가 세워지리라 예언한 적이 있었다. 얼마 뒤에 그는 사도 에라스터스 스노우와 300여 가정에 임무를 주어 이 지역으로 가서 목화를 재배하게 했다. 목화는 남부 유타의 다른 정착촌들에서 그럭저럭 괜찮게 재배되던 작물이었다.

그 이후로 세인트조지의 성도들은 브리검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세인트조지는 연중 대부분은 무더위가 이어지고 눈도 거의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근처에 두 개의 강이 흘렀는데, 성도들은 거기에 댐을 만들어 사막의 관목들 사이에서 겨우 곡식과 유실수를 길러 낼 만큼의 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내리는 폭우는 정착민들이 만든 댐을 흔적도 없이 휩쓸어 갔다. 또한, 수목이 드문 탓에 성도들은 목재 대신 석재나 진흙 벽돌로 건물을 지었다. 이 산간에 정착하러 왔던 많은 사람이 도착하기 무섭게 떠나갔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보금자리를 마련하도록 도와주시리라 믿으며 신앙에 매달렸다.16

그 후 정착민들은 널찍하게 도로를 닦고 번듯한 집 여러 채와 관청을 지었으며 근방에 면직 공장도 세웠다. 또한, 그들은 함께 모이고 예배할 목적으로 마을 중심부에 사암을 이용해서 품위 있는 회당을 지었다.17

수지와 가족들은 세인트조지에 도착한 후 도시의 안락한 집에 정착하여 새로운 이웃들을 만났다. 그러는 동안, 수지의 아버지인 브리검 영은 정착촌 안팎의 모든 성도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솔트레이크시티에 성전이 완공되려면 몇 해를 더 기다려야 했는데, 성전의 일부 의식만 집행하는 엔다우먼트 하우스는 장기적인 필요에 대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약을 맺고 산 자와 죽은 자에게 필요한 모든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성전이 성도들을 위해 운영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18

1871년 1월, 브리검은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갈 여정을 계획하기에 앞서 현지 교회 지도자들의 평의회에 참석했다. 평의회는 그 지역의 교회를 감리하는 에라스터스 스노우의 집에서 열렸다. 모임이 끝나 갈 무렵, 브리검은 세인트조지에 성전을 짓는 계획에 대한 형제들의 의견을 물었다.

방 안에 있던 형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에라스터스는 이렇게 외쳤다. “영광입니다! 할렐루야!”19


브리검은 솔트레이크시티에 돌아온 뒤 새로운 성전에 대한 계획을 적어 에라스터스에게 보냈다. 세인트조지에 지을 성전은 솔트레이크시티에 짓고 있는 성전보다 더 작고 장식 면에서 더 간소할 것이었다. 성전은 돌을 이용해 짓고 안팎에 석회를 바르며, 나부 성전처럼 지붕 한쪽 끝에 탑을 올리고 지하에 침례반을 넣기로 계획되었다.

브리검은 에라스터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 일이 추진될 수 있도록 남쪽의 성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성전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가을이 되어 세인트조지로 돌아갈 날이 되기를 고대했다.20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도 준주의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브리검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아마사 라이먼은 시온 교회를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강신술사인 영매가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 와카라 족장 등 세상을 떠난 성도들의 말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교령회에도 참석했다. 사람들은 이런 모임에서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탁자가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21

이러한 교령회를 계기로 몇몇 성도들이 ‘새로운 운동’에 합류하기에 이르렀지만, 성도들 대부분은 그런 모임을 경계했고 시온 교회는 곧 곤경에 처했다. 브리검이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가던 1871년 2월 무렵, ‘새로운 운동’은 이제 더는 종교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지역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근절하겠다는 공동의 목표로 모인 이들의 집단에 가까워져 있었다.

4월에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발행하던 신문의 이름을 Mormon Tribune(『몰몬 트리뷴』)에서 Salt Lake Tribune(『솔트레이크 트리뷴』)으로 변경했다. 7월에 그들은 설교를 하고 교령회와 강연회를 열며 자유당의 정치적 모임을 할 수 있는 넓은 집회소인 Liberal Institute[리버럴 인스티튜트]를 헌납했다. ‘새로운 운동’은 브리검의 옛 친구인 티 비 에이치와 패니 스텐하우스를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을 거뒀다. 그들 부부는 지난 몇 달 동안 교회를 떠날 듯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었다.22

그러나 ‘새로운 운동’보다 더 교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유타 대법원의 신임 수석 재판관으로 임명된 제임스 맥킨이었다. 맥킨 판사는 유타에서 자신이 신정 정치로 여기는 것들을 근절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가 임명될 무렵, 컬럼의 중혼 금지 법안은 상원을 통과하지 못했고,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중혼 금지법을 강행할 목적으로 맥킨을 유타로 파견했다.23

맥킨 판사는 유타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선언했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은 원하는 종교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 법을 어겨서는 안 되며 종교를 그 구실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24

1871년 가을, 브리검이 세인트조지로 돌아갈 날을 한 달가량 앞두었을 때였다. 브리검은 유타를 담당하는 연방 검사이자 컬럼 법안의 입안자 중 한 사람인 로버트 배스킨이 그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여러 범죄 혐의로 기소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교회의 회원이었던 빌 히크먼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14년 전의 유타 전쟁 때 자신이 저질렀던 살해 사건에 브리검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연루시키는 데 동의하기까지 했다.25

빌 히크먼은 현재 다른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있었으며, 그는 증언을 하는 대가로 관대한 처분을 받기로 법정과 합의했다. 빌 히크먼은 무법자인 데다 무엇보다 여러 덕망 있는 사람들이 그 사건의 실상을 알고 브리검의 연루를 부정했으므로 공정한 법정에서라면 절대 그의 발언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카테지 감옥에서 조셉 스미스와 함께 있었던 존 테일러는 브리검에게 법정에 목숨을 맡기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브리검은 자신의 운명은 조셉의 운명과 다르리라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26

브리검은 10월 2일에 처음으로 기소되었고, 연방 보안관은 둘 이상의 아내와 생활한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했다. 대니얼 웰스와 조지 큐 캐넌도 유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이 체포되자 숱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준주 바깥의 신문들은 솔트레이크시티에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며, 성도들이 총기를 대량으로 비축하고 산기슭에 대포를 배치했다고 보도했다.27 사실 솔트레이크시티의 거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법 집행관들에게 협조했고, 변호사들은 다음 주에 법정에 설 브리검이 기소 내용에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에 돌입했다.28

공판이 열리던 날, 법정은 모여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법원 밖 거리에도 수천 명의 인파가 서 있었다. 브리검은 판사보다 15분 먼저 도착하여 참을성 있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브리검의 침착한 모습은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의 마음마저 누그러뜨렸다.29

맥킨 판사가 도착한 뒤, 브리검의 변호사들은 관리들이 대배심을 꾸리는 과정에서 교회의 회원들을 배제함으로써 올바른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공판을 중단시키려 했다. 맥킨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변호사들은 기소 자체의 오점을 찾아 기소를 전면 무효화하려 했다. 판사는 이번에도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30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맥킨은 자신이 보기에 이 재판은 브리검의 유무죄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성도들의 계시와 연방법 사이에 일어난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는 자리라며 이렇게 말했다. “법정에서는 이 재판을 국민 대 브리검의 싸움이라 하지만, 이 재판의 진짜 제목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연방의 권위 대 일부다처제 신정 정치의 싸움입니다.” 그는 공정한 재판관이 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선지자 브리검은 이미 유죄였다.31

브리검은 다음 재판 기간인 3월까지는 공판이 잡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약 2주 후에 세인트조지로 떠났다. 그러나 며칠 후에 브리검과 다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번 영장은 조작된 살해 혐의에 대한 것이었다.32


1871년 11월 9일, 며칠 동안 싸늘한 날씨가 이어지며 비가 오기도 했지만 이제 세인트조지의 하늘은 맑고 쾌청하게 개어 있었다. 마을 바로 남쪽에 새로 계획된 도시 구역은 성전 기공식에 참석하려는 성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수지 영도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33

브리검은 그해 가을에 세인트조지로 온 이래로 좀처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은 데다 재판 문제로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에서 그는 행보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보안관이 그를 붙잡아 솔트레이크시티로 강제 송환할까 봐 두려움을 느꼈다. 브리검은 밤이면 에라스터스 스노우의 집에 머물렀고, 무장한 형제들이 보초를 서며 그를 지켰다.34

성전 구역에 간 수지는 연필과 수첩을 들고 기공식에 대해 기록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세인트조지로 오기 전에 브리검의 속기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하게 일을 해내곤 했다. 수지는 자신이 기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수지는 군중 속에 서 있었고, 그런 자리에서라면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서로 가까이에 붙어 선 자신의 부모와 어머니의 손에 매달린 여동생 메이블을 쉽게 볼 수 있었다.35

합창단이 개회 찬송을 부른 뒤, 조지 에이 스미스는 무릎을 꿇고 헌납 기도를 드렸다. 조지는 적의 손에서 선지자를 지켜 주시고 그가 오래도록 성도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했다. 그에 이어서, 수지는 아버지와 다른 지도자들이 성전 구역의 남동쪽 모퉁이에서 첫 삽을 뜨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성도들은 “타는 듯한 하나님의 영”을 불렀고, 브리검은 의자 위로 올라갔다. 그래야 “호산나”를 외치도록 지시하는 그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전해질 테니 말이다. 성도들은 커틀랜드 성전 시절부터 헌납식이나 공공 행사에서 “호산나”를 외침으로써 엄숙한 방식으로 환호성을 보냈다.

성도들은 브리검의 지시에 따라 오른손을 들고 “호산나, 호산나, 하나님과 어린 양께 호산나!”라는 말을 세 차례 외쳤다.36


몇 주 뒤, 맥킨 판사가 공판 기일을 12월 4일로 잡았다는 통지가 브리검에게 전해졌다. 맥킨은 브리검이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처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브리검은 세인트조지를 떠나고 싶지 않았고, 판사는 날짜를 1월 초로 연기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브리검은 변호사들 및 자문단과 함께 앞으로 어떤 과정을 택하는 것이 좋을지를 상의했다. 그는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가면 자신이 체포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브리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안전이 염려되었다. 그는 구금되어 있는 동안 살해되지 않으리라는 확약을 원했다.37

한동안은 나부에서 조셉 스미스가 그러했듯 숨어 지내는 방안도 고려되었다. 살해는 사형 선고가 가능한 죄였으며, 만일 편견이 있는 배심원이 그에게 죄가 있다고 여긴다면 브리검은 처형될 수도 있었다. 12월 중순 무렵, 변호사들은 브리검이 안전하리라고 확신하며 그에게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들과 브리검의 친구들은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렸지만, 그들은 브리검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38

어느 날 밤, 브리검은 꿈에서 두 남자가 성도들의 대규모 모임을 장악하려 하는 것을 보았다. 잠에서 깬 브리검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서 하나님과 형제님들의 도움으로 모임을 열고 싶습니다.”39

브리검은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가는 도중 밤을 보내기 위해 한 작은 정착촌에서 길을 멈추었다. 맥킨 판사가 그를 유죄로 단정했다는 것을 아는 그곳의 성도들은 브리검이 재판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하자 심란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중 한 남자는 브리검의 의중을 알고 흐느껴 울었다. 선지자는 그의 두려움을 이해했지만, 자신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가장 유익하도록 만물을 움직이실 것입니다.”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