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11 영광스러운 특권


“영광스러운 특권”,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19) 제11장

제11장: “영광스러운 특권”

제11장

영광스러운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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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어로 번역 중인 몰몬경

앤 일라이자 시크리스트의 두 살배기 아들 모로나이는 하루가 멀다고 아침마다 아빠를 찾았다. 이제 며칠 후면 앤 일라이자의 출산 예정일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로나이는 남편 제이컵이 돌보면 되었다. 하지만 제이컵은 1852년 9월 15일에 마차를 몰고 도시 동쪽에 있는 언덕을 올랐다. 앤 일라이자와 어린 세 자녀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들의 집 문간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이컵은 언덕 정상에 올라서서 가족을 향해 모자를 흔들고는 다시 한번 도시를 내려다본 뒤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1

제이컵은 1852년 8월 대회에서 여러 형제들과 함께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최대한 빨리 길을 떠나라는 지시가 있었고, 그는 유럽의 국가들, 그중에서도 주로 영국으로 떠나는 여든 명의 장로들 무리에 합류했다. 제이컵은 다른 세 명의 선교사와 함께 독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3년간 봉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2

지금까지 앤 일라이자는 남편이 없는 상황을 최대한 잘 감당하고 있었다. 그녀와 제이컵은 미국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제이컵은 앤 일라이자와 교제하는 동안 다른 주에서 일했으며,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길고 애정 어린 편지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1842년에 결혼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따라 서부로 이주했다. 두 사람은 모두 회복된 복음에 대한 강한 간증이 있었다. 앤 일라이자는 남편의 선교사 부름에 대해 불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없는 동안 시간은 더디게 흘러 갔고, 그녀는 묵직한 슬픔을 느꼈다.3

앤 일라이자는 남편이 떠난 지 13일 후에 머리칼이 검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이튿날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아기의 무게를 재 보니 4.7킬로그램이었어요. 이름은 아직 안 지었어요. 생각하는 이름이 있으면 편지로 알려 주세요.”4

그러나 얼마가 지나야 제이컵이 이 소식을 알게 될지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솔트레이크밸리에서는 연중 대부분 우편물이 드문드문 배달되었다. 그러다 겨울에 평원 위로 눈이 내려서 사실상 수송로가 막혀 버리면 우편물은 그대로 뚝 끊겼다. 봄이 되기 전에는 남편의 답장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이컵이 동쪽으로 가는 도중에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을 살펴보니 제이컵은 아직 앤 일라이자의 편지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꿈에서 가족을 보았다고 했다. 세 아이는 바닥에서 함께 놀고 있었고, 앤 일라이자는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침상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

제이컵은 만일 아들을 낳았다면 이름을 니파이로 해 달라고 했다.

기다리던 답이 온 것이다. 앤 일라이자는 아기의 이름을 히버 니파이 시크리스트로 지었다.5


1852년 여름, 스무 살 청년 요한 도리우스는 덴마크 북부의 벤쉬셀 지역에 도착했다.6 코펜하겐에서 수습 제화공으로 일하던 요한은 조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작업 도구들을 내려놓았다. 그는 첫 번째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덴마크에 들어온 직후에 아버지 니콜라이와 여동생 아우구스타와 함께 침례를 받았다. 그의 형인 칼은 그 후로 일 년 남짓이 지나서 교회에 들어왔다.7

피터 한센과 에라스터스 스노우가 선교부를 연 뒤 교회는 덴마크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들은 덴마크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덴마크어로 몰몬경을 출판했는데, 덴마크어는 영어에 이어 두 번째로 몰몬경을 번역한 언어가 되었다. 그들은 Skandinaviens Stjerne(『스칸디나비안스 스티에네』)라는 월간지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덴마크에는 오백여 명의 회원들이 열두 개의 지부로 조직되어 있었다.8

그러나 요한의 어머니인 아네 소피는 평판 사나운 이 신생 교회를 경멸했으며, 남편이 이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와 이혼했다. 아네 소피와 니콜라이가 이혼할 무렵, 요한은 다른 새로운 개종자들과 함께 덴마크 선교부에서 봉사하도록 부름받았고, 아우구스타는 시온으로 집합하려는 스칸디나비아의 첫 번째 성도 무리와 함께 덴마크를 떠났다.9

요한은 바스톨름이라는 시골 마을의 성도들을 만나기 위해 벤쉬셀의 남쪽으로 갔다.10 그들은 현지 교회 회원의 집에서 모임을 했다. 요한은 회중에게 말씀을 전하며 기쁨과 영감을 느꼈다.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던 그는 모임에 온 대부분의 사람을 알았다.

모임이 끝나 가던 정오 무렵, 농기구와 몽둥이를 든 농장의 인부들이 성도들이 모인 집으로 들어와 문간 주변에 몸을 숨겼다. 그해 초에 덴마크 성도들은 폭도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며 입법부에 탄원했지만, 그 어떤 조처도 취해지지 않고 있었다. 스웨덴 인근의 새로운 개종자들도 비슷한 반대에 부딪힌 일이 있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오려는 사람 중 일부는 남들 눈에 띄는 강 대신 가죽을 무두질할 때 쓰는 커다란 통에서 침례를 받으려 하기도 했다.11

모임이 끝나자 요한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쪽으로 다가갔다. 폭도들은 서로 바짝 붙어 섰고, 요한은 뭔가가 다리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통증을 무시한 채 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인부들이 뒤에서 그를 잡아채고 사정없이 그의 등을 가격했다. 인부들은 요한의 살갗이 터져 피가 날 때까지 몽둥이와 날카로운 장비들을 휘둘렀다. 요한은 온몸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요한은 어찌어찌 그곳을 빠져나와 근처에 있던 피터 옌센이라는 교회 회원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그의 친구들은 찢긴 옷을 벗기고 상처를 닦아 낸 후 요한을 침상에 눕혔다. 한 형제가 그에게 기름 축복을 했으며, 어느 나이 지긋한 부인이 방에 서서 요한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한 시간 반 후, 술에 취한 남자들이 부서질 듯 문을 두드렸다. 방에 있던 연로한 부인은 얼른 무릎을 꿇고 기도로 도움을 구했다. 그녀는 요한에게 말했다. “장로님을 치려면 저부터 쳐야 할 겁니다.”

잠시 후, 술 취한 남자들이 우르르 방으로 들어왔다. 부인은 그 괴한들을 막아 보려 했지만, 사내들은 그녀를 벽으로 밀쳐 냈다. 그들은 침상을 둘러싸고서 멍들고 찢긴 요한의 몸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요한은 간신히 의식을 붙들고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하나님을 생각했다. 폭도들은 요한의 팔을 붙들고 침상에서 그를 끌어내 어두컴컴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12


옌센의 집 근처를 지나던 소렌 투라는 폭도들이 근처 강으로 요한을 끌고 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 중에는 괴성을 지르며 거친 욕설을 내뱉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몇몇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소렌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폭도들 사이를 밀치고 나갔다. 그들이 숨을 내쉴 때마다 브랜디 냄새가 진동했다. 소렌은 요한을 힐끗 쳐다보았다. 잠옷 차림의 그 젊은이는 왜소하고 허약해 보였다.

폭도들은 한눈에 소렌을 알아보았다. 덴마크 기병대 출신인 소렌은 바스톨름에서 건장한 운동선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폭도들은 소렌도 자기네와 함께하고 싶으리라 짐작하고는 “몰몬 설교자”를 붙잡았다면서 이제 그를 강물에 던질 차례라고 했다. “우린 이 몰몬 사제한테 침례주는 법을 가르쳐 줄 생각이오.”

소렌이 말했다. “그 사람을 놔주시오. 그 친구는 이제 내 소관이요. 당신들 같은 겁쟁이들이 나를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시오.” 폭도 중 어느 누구도 힘이나 덩치 면에서 소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요한을 내동댕이치고 몇 대 더 후려친 뒤 황급히 도망쳤다.13

소렌은 요한을 옌센의 집으로 데려다주었고, 이튿날 다시 와서 그가 괜찮은지 상태를 살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하고자 소렌을 보내신 것이라고 믿었다. 요한은 간증했다. “이 일은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었던 일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도록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소렌의 마음을 움직였다. 소렌은 이 젊은이와 함께 그의 선교 사업과 회복된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매일같이 찾아왔다.14


요한이 만신창이가 된 몸을 회복해 가는 동안, 열네 살 소녀인 그의 여동생 아우구스타는 서부로 이주하는 백 명가량의 성도들로 이뤄진 우마차 행렬에 섞여 로키산맥을 넘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오 년간 솔트레이크밸리로 이주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과 우마차에 닳고 닳으며 만들어진 모랫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이렇게 뚜렷하게 드러난 길을 가면서도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못내 불안했다. 평원에 가을이 찾아오자, 거의 견딜 수 없을 만큼 기온이 뚝 떨어지고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로 얼어붙을 듯한 찬바람이 불었다.

설상가상으로 소들은 지쳐 갔고, 마지막 남은 밀가루마저 동이 났다. 성도들은 이제 말 탄 전령을 앞세워 식량을 더 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구호물자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길이 없는 성도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솔트레이크시티까지는 250킬로미터가량을 더 가야 했고, 이 여정에서 가장 험난한 고비도 아직 남아 있었다.15

아우구스타는 친구들과 함께 종종 우마차 행렬을 한참 앞질러 가서 나머지 사람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곤 했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집을 생각했다. 이 부대에 속한 스물여덟 명의 덴마크 성도들은 에라스터스 스노우와 함께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에라스터스 스노우는 먼저 솔트레이크시티에 가 있었고, 아우구스타와 나머지 일행은 다른 우마차 행렬과 함께 뒤따르는 중이었다. 아우구스타를 포함하여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이주민들은 대부분 영어를 거의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어를 쓰는 성도들과 함께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불렀다.16

솔트레이크시티로 가는 지금까지의 여정은 아우구스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힘겨웠다. 아우구스타는 미국 성도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들으며 자신이 새로운 터전에 대해 매우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고 온 집이 사무치게 그립기도 했다. 아우구스타는 오빠인 칼과 요한 외에도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동생들의 이름은 카롤리네, 레베케, 니콜레나였다. 아우구스타는 언젠가 온 가족이 시온에서 함께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특히 부모님이 이혼한 상황에서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나 있을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17

우마차 행렬이 산등성이를 오르고, 깎아지른 듯한 협곡을 내려가고, 다시 산속 좁다란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가는 동안 아우구스타는 먹은 것이 거의 없었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6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에코캐니언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음식을 구하기 위해 말을 타고 앞질러 갔던 형제가 되돌아오는 모습이 부대의 여성들 눈에 들어왔다. 그 형제의 바로 뒤로는 빵과 밀가루, 크래커 등을 실은 우마차가 뒤따르고 있었다. 성도들은 안도했고, 부대의 부장들은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18

이 우마차 행렬은 며칠 후에 솔트레이크밸리에 당도했다. 에라스터스 스노우는 솔트레이크시티로 들어오는 덴마크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건포도 빵과 쌀밥으로 저녁을 대접했다. 몇 달 동안 풍미 없는 빵과 들소 고기 외에는 거의 먹은 것이 없던 아우구스타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생전 처음 먹어 본다고 생각했다.19


1852년 11월 8일 화요일, 조지 큐 캐넌은 자신의 자그마한 갈색 일지를 펴고 이렇게 적었다. “번역을 적느라 몹시 바쁘다.” 그는 온종일 조너선과 키티 나펠라의 집 탁자에 몸을 수그리고 앉아서 하와이어로 몰몬경을 번역했다. 이제 그는 하루 동안 자신이 한 일을 돌아보며 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했다.

조지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내게 이 일은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나는 이 일을 하며 기쁨을 느낀다. 몰몬경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원리들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뜨겁게 벅차오른다.”20

1851년 3월에 조너선 나펠라를 만났을 때만 해도 조지는 나펠라가 하와이에서 이루어질 주님의 사업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미처 알지 못했다. 첫 만남 이후 1852년 1월에 그가 침례를 받아들이기까지는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21 나펠라는 회복된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지역 주민들과 현지 개신교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곧바로 교회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조지는 마우이에서 많은 사람에게 침례를 주고 네 개의 지부를 조직했다.22

조지는 나펠라가 침례받은 직후부터 그의 도움과 격려 속에서 몰몬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조지는 쉴 틈 없이 몰몬경의 구절들을 공부하고 온 힘을 기울여 하와이어로 번역해서 종이에 적어 나갔다. 조지가 그렇게 적은 것을 나펠라에게 읽어 주면, 나펠라는 그가 번역을 다듬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등 교육을 받은 변호사인 나펠라는 조지가 복잡한 모국어를 풀어 가도록 이끌어 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세심하게 복음 원리를 공부했고 진리를 빠르게 이해했다.

처음에는 속도가 더디었지만, 하와이 사람들과 몰몬경의 메시지를 나누고자 하는 소망에 힘입어 그들은 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은 곧 영을 충만히 느꼈고, 번역에 속도가 붙었으며, 복잡한 교리와 생각을 나타내는 문구들까지도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나펠라가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을 알려 주면서 조지는 나날이 하와이어가 유창해졌다.23

11월 11일, 다른 섬에서 봉사하던 동료 선교사들이 조지에게 유타에서 온 편지 세 통과 『데저렛 뉴스』 일곱 부를 가져다주었다. 고향 소식에 목말라 있던 조지는 틈이 생기자 얼른 편지와 신문을 읽어 내렸다. 첫 번째 편지에는 올슨 프랫 사도가 성도들에게 복수결혼에 관한 계시를 읽어 주고 그 원리를 공개적으로 가르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지는 그 소식을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이제 적기가 된 것 같다.”24

두 번째 편지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몰몬경 번역에 관해 알게 되었고, 이 일을 승인했다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 편지에는 조지의 고모부인 존 테일러 사도가 프랑스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최근에 귀환하여 조지도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조지가 선교 사업 전에 교제했던 엘리자베스 호글랜드도 그의 귀환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일회장단의 윌라드 리차즈는 조지가 번역을 마무리한 후 귀환하는 것을 고려해 보길 바랐다.

조지는 자신이 선교사로서 충실히 봉사했음을 알았다. 그는 향수병에 시달리며 말 한마디 못하던 젊은이에서 영향력 있는 설교가이자 선교사로 거듭나 있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편을 택한다 해도 그가 주님께서 주신 부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와이 사람들이 복음의 축복을 듣고 누릴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그 조상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왔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하와이인 자매 형제들과 함께 해의 왕국에서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가 번역을 중단하고 하와이를 떠날 수 있겠는가?25 그는 하와이에 남아서 번역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뒤, 마우이에서 성도들과 아침을 보낸 조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며 기쁨과 더불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행복을 느꼈다. 그는 가슴이 벅찼다.

조지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미력하기만 한 내 혀와 언어로는 주님의 일을 상고할 때 경험하는 그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내 혀와 시간, 재능,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의 존귀와 영광을 위해 사용할지니, 나는 그것들로 내가 처한 곳에서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성품에 대해 내가 아는 바를 전파하리라.”26


그해 가을, 요한 도리우스를 비롯한 덴마크인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파하도록 노르웨이로 보내졌다.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노르웨이도 국교 외의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락된 곳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이 넘도록 후기 성도의 위험성을 노르웨이인들에게 경고하는 여러 책과 신문들로 인해 교회에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27

어느 날 요한과 그의 동반자는 프레드릭스타드라는 도시 인근의 작은 집에서 모임을 열었다. 회중이 “타는 듯한 하나님의 영”을 부른 뒤, 요한은 교회의 기원을 설명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당신을 인류 앞에 드러내셨음을 선포했다. 그가 말씀을 마치자, 한 젊은 여성이 그가 한 말의 진위를 성경으로 증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요한은 그렇게 했고, 그녀는 그의 말에 감명을 받았다.28

이틀 뒤, 요한과 그의 동반자는 하룻밤을 묵기 위해 프레드릭스타드 외곽의 여관에 들었다. 여관 주인이 신분을 묻자, 이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후기 성도 선교사로 소개했다. 여관 주인은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지역 관리들은 이미 그녀에게 후기 성도한테 방을 내주는 것을 엄격히 금한 상황이었다.

선교사들이 주인과 말을 나누는데, 옆에 있던 방에서 경찰관 한 명이 나와 요한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요한은 “프레드릭스타드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그 경찰관은 “당신을 체포하겠소.”라며 이어서 요한의 동반자에게도 여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가 여권을 보여 주지 못하자 경찰관은 그 또한 체포하여 두 사람을 다 방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심문을 기다리게 했다. 놀랍게도, 그 방 안은 남녀 할 것 없이 체포되어 온 노르웨이 성도들로 가득했다. 그들 중에는 덴마크 출신 선교사도 몇 명 있었는데, 그중 한 장로는 2주 동안 구금된 상태였다.29

최근부터 이 지역의 정부 관리들은 선교사들과 교회의 회원들을 잡아들여 그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많은 노르웨이인들은 후기 성도들을 깊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몰몬경에 대한 믿음을 문제 삼으며, 후기 성도들은 종교의 자유에 관한 국법을 통해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미국의 교회 회원들이 복수결혼을 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노르웨이인들은 성도들을 노르웨이 사람들의 전통적인 신앙과 가치를 무너뜨리려는 문젯거리로 여기기도 했다. 관리들은 후기 성도들을 심문하고 수감함으로써 성도들이 기독교인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여 이 새로운 종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30

얼마 후에 요한은 프레드릭스타드로 이송되어 다른 네 명의 선교사와 함께 수감되었다. 그중에는 노르웨이의 교회 지도자인 크리스티안 라르센도 있었다. 간수와 그의 가족은 선교사들을 정중히 대하며 그들이 기도하고, 읽고, 쓰고, 노래하고,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곳을 나갈 수는 없었다.31

몇 주 뒤, 군의 판사와 관리들이 일부 선교사들을 심문했다. 판사는 선교사들을 범죄자처럼 대하며 좀처럼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는 기독교 및 성경과 조화를 이룬다고 설명하려 했지만 그는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관리들은 크리스티안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나라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크리스티안은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왔습니다.”

“석방된다면 덴마크로 돌아가겠는가?”

“나를 이곳에 보낸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그분이 나를 해임하실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전도하고 침례 주는 것을 그만두겠는가?”

“우리의 교리와 믿음이 그리스도의 교리에 위배된다는 것을 당신 또는 당신 나라의 성직자들이 나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면 그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직위가 가장 높은 심문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와 언쟁하는 것은 우리 성직자들의 품위를 손상하는 일이다. 이제 나는 앞으로 너희가 잘못된 교리로 사람의 영혼을 호도하는 것을 금한다.”32

요한과 선교사들은 재판일을 기다리는 동안 요한 안드레아스 옌센이라는 사람과 한 방에 수감되었다. 선장인 옌센은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거리에서 전도하며 회개를 외치기 시작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다는 열정으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인 오스카 일세에게 자신의 종교적인 견해를 전하려고 했지만, 알현을 요청할 때마다 거절당했다. 낙심한 옌센은 왕을 “지체 높으신 죄인”이라고 칭했다가 곧바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선교사들은 곧 옌센에게 회복된 복음을 전했다. 처음에 옌센 선장은 선교사들의 메시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했고, 선교사들도 그를 위해 기도했다. 어느 날, 선교사들이 옌센에게 간증을 전하자 그 방에 있던 이들 모두가 순식간에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옌센이 눈물을 마구 쏟는 가운데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그는 회복된 복음이 참됨을 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옌센의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잠시만 그를 풀어 주도록 요청했지만,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옌센은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로 침례를 받겠다고 선교사들에게 확실히 말했다.33

요한은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 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겸손하게 감사드렸으며, 오늘은 진실로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며, 함께 찬송하고 그분을 찬양했다.”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