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으뜸된 선견자
2003년 10월


으뜸된 선견자

요셉 스미스가 신성한 세 가지 계시 중 단 한 가지만을 받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그를 예언자로서 인정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1820년부터, 요셉 스미스는 반복되는 기소로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으나 결국 무고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식의 기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언대로 어리석은 자들은 그를 조롱하고, 지옥은 그에게 분노하며, 그의 이름은 “좋게도 전하여지고 나쁘게도 전하여”(요셉 스미스서 2:33)졌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같은 소요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다니면서 계시의 혜택을 누리기보다 교회 밖에서 비난을 일삼게 하더니 필경에는 “으뜸된 선견자”인 예언자의 사명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했습니다.(니파이이서 3:6~7 참조)

암몬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선견자는 고대 기록을 번역할 권세를 갖고 있으며, “선견자는 예언자보다 뛰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암몬은 “선견자는 … 예언자”(모사이야서 8:11~16 참조)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견자의 부름을 받은 요셉은 “자기 동포에게 크나큰 유익”(모사이야서 8:18)이 되었습니다.

“으뜸된” 번역자는 만질 수 있고, 검증이 가능한 몰몬경을 “하나님의 은사와 권능으로”(교리와 성약 135:3)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볼 때 몰몬경은 오랫동안 굳게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정경과 같은 것입니다.

표제지에 기록된 대로 몰몬경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확신시켜 주는 데 있습니다.(니파이서 25:19 참조) 이 중요한 사실을 불신하고 확신하지 못했던 시절에 “확신을 줄 수 있는” 효과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 약속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몰몬경은 “지붕 위에서 읽혀질”(니파이이서 27:11) 것입니다. 몰몬경은 소홀한 대접을 받더라도 “세상이 있는 한”(니파이이서 25:22)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도록 변함없이 권유할 것입니다.

“땅 끝에 있는 자도 [요셉의] 이름을 물을 것”(교리와 성약 122:1)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위안을 주는 예언은 요셉의 원수들을 “당황하게 만들 것이며”, 예언자의 백성들이 배반자들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결코 [그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니파이이서 3:14; 교리와 성약 122:3 참조)

어제 파우스트 부대관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요셉은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온전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르친 계시에는 오류가 없습니다.”(Andrew F. Ehat and Lyndon W. Cook, The Words of Joseph Smith, 1980, 369쪽)

역설적이지만, 어린 요셉 스미스는 숲속에 들어가서 다만 어느 교회에 속해야 할지 알고자 했을 뿐 선견자, 계시자, 번역자, 예언자로 부름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교리와 성약 21:1 참조) 그러나 숲 속에서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예상치 않은 축복이 쏟아졌습니다. 그 결과로 생긴 계시들과 번역들은 단순한 추측, 그 날 생각해 낸 진리, 또는 경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받은 계시들과 번역들의 엄청난 양은 “으뜸된 선견자”라는 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셉이 받아 현재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것들의 양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많은 계시들 가운데 “놀라운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양한 계시들과 번역들을 통해, 1830년대의 천체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 즉 “무수한 세계”가 있는 코스모스가 설명되었습니다. 또 이 설명은 “거기 사는 주민은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 딸”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모세서 1:33; 교리와 성약 76:24)

옛적에,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아브라함의 후손의 수는 바다의 모래알 즉 어마어마한 약속에 비유되었습니다.(창세기 22:17 참조) 회복의 계시들과 번역들을 통해서 광대한 우주의 존재 가능성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우주에 존재하는 별의 수가 “대략 70×1021개” 정도가 되는 것으로 최근에 추정하였으며, 이 수가 지상의 모든 바닷가와 사막의 모래 알보다 더 많은 수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Allison M. Heinrichs, “The Stellar Census: 70 Sextillion,” Los Angeles Times, 26 July 2003, Carl Sagan, Cosmos [1980], 196쪽 참조)

계시들과 번역들은 하나님의 주된 목적 곧 “인간에게 불사 불멸과 영생을 가져다주는”(모세서 1:39 참조) 사업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들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계획들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명되었으며, 하나님은 그 계획에 따라 40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고(신명기 8:2)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제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향으로 돌아갈 것을 준비하기 위해 종종 우리의 신앙과 인내가 시험받는다는 것을 이해합니다.(모사이야서 23:21)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선과 악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악의 도시인 소돔과 선의 상징인 성전 중에서 어느쪽을 향해 천막을 칠 것인가를 항상 결정해야만 합니다.(창세기 13:13; 모사이야서 2:6 참조)

하 나님은 우주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재미 삼아 우리를 미혹케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의 관심과 목적의 핵심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주인없는 우주에” 즉 “무의식의 우주에”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과 사뭇 다릅니다.(Bertrand Russel, “A Free Man’s Worship,” in Mysticism and Logic and Other Essays [1917], 50), (Albert Camus, The Myth of Sisyphus and Other Essays, trans. Justin O’Brien [1955], 123쪽)

마찬가지로 계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의 자녀로 살아온 오랜 역사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경전이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영원성에 대한 또 하나의 통찰인 것입니다.(교리와 성약 93:29 참조) 이처럼 심오한 뜻을 내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무에서” 우연히 창조되었다는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 개개인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요한일서 4:19 참조)고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 세상의 혼란 속에서 다른 인간들의 실체 즉 그들은 진실로 우리의 영적 형제 자매이며 물건이나 경쟁자나 원수가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계시와 번역은 한결같이 “놀라운 것들”이지만, 그 중 이 세 가지 계시와 번역은 특히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염원과 의문에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우주,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질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 줍니다.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포괄적인 선언만큼 인간을 위한 것은 없습니다.

요셉 스미스가 신성한 세 가지 계시 중 단 한 가지만을 받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그를 예언자로서 인정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해도, 그 깊은 뜻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교리와 성약 84:38 참조)

바울이 “불신앙으로 흔들리지 않았던”(로마서 4:20참조) 아브라함을 칭찬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복의 교리를 상고한 후에 그처럼 대담하고 희망찬 진리를 접한다면 감당키 어렵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놀라운 계시들과 번역들을 상고할 때, “하나님을 믿으라 …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만사를 아시는 분이심을 믿으라.”(모사이야서 4:9)라고 말한 베냐민 왕의 권고에 주의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필멸의 인간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맡기셨지만, 하나님이 아주 오래 전에 그분의 아들의 속죄를 통해 그분의 모든 자녀들을 구원하시고 부활할 수 있게 하셨던 것에 진실로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근심에 사로잡혀 이런 저런 권유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품고있는 뜻과 생각이 전혀 다른 구세주에게 이방인과 같은 존재입니다.(모사이야서 5:13 참조)

하나님의 계획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우주에는 놀라운 개인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선] 모든 인간을 내려다 보시며 … 사람들이 마음에 품은 뜻이나 생각을 모두”(앨마서 18:32; 이사야 66:18 참조) 아십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심판의 날에 우리는 미 헌법에 있는 것과는 달리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이 계시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인간에게 나타나신 것은 구세주이시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하고 계심을 증명한 것입니다. 거룩한 숲을 시작으로 곧 뒤이어 커틀랜드와 하이람 등 무명의 장소에서 두 분이 반복해서 나타나신 것은 모든 인류에게 두 분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확인해 줄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예수님을 기껏해야 우리에게서 아득히 먼 곳에 계신 분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중요성을 부인하거나 그분을 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회복의 계시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은 3:16)라는 보편적인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무한한 속죄”를 수행하신 예수님은 그 속죄로 인해 무한한 고통을 겪으셨으며, “만물보다 낮아지[셨으니] … 이로써 만물을 아시[게]” 되셨고, 만사를 다 아시는 구세주이십니다.(니파이이서 9:7; 교리와 성약 88:6) 그렇습니다. 지난 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한 흑인 영가의 가사처럼 “내가 겪은 고난 아무도 모르네,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계시들과 번역들이 필요한 사람들은 흔히 쓰이는 표현을 빌리자면, 조용한 절망 속에 사는 사람들, 즉 절망 가운데서도 남의 도움을 결코 구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Henry David Thoreau, Walden [1965], 7쪽 참조)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쾌락과 활동에 탐닉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필경에는 그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할 때까지 자신의 판단 능력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모로나이서 9:20; 에베소서 4:19; 니파이일서 17; 45 참조) 따라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보다 감각적인 것을 찾아 철저하게 즐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무리”입니다.(모사이야서 29:26~27 참조)

마지막 날에 악마가 자기 추종자들을 “돕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앨마서 30:60 참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리는 만무합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승리하실 것이며, “육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악마의 교활한 철학들도 무너지며, “그 무너짐이”(앨마서 30:53; 니파이일서 11:36 참조) 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 정신을 차린” 탕자들의 삶을 통해서 악마의 교리들이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5:17 참조) 허망하게 불의한 삶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고” 이제 구원을 가져다주는 계시들과 번역들에 대해 알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앨마서 32:6 참조)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회복된 복음에 담겨 있는 진리의 말씀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실로 현재의 일과 미래의 일에” 대해 위안을 주는 계시들과 진리를 알려 주는 번역들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회복의 적혈구로 가장 잘 치유될 수 있는 교리의 무지 때문에 고통 받아 피곤한 손을 가진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야곱서 4:3 참조) 만일 숨기면 회개를 막게 되고 “해같이 아름답고 달같이 맑게-”(교리와 성약 105:31 참조) 될 영적인 것들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를 중요치 않은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를 이상한 사람이나 그릇된 길에 빠진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결국 “크고 넓은 건물”이 비좁고 곰팡내 나는 3류 호텔임을 깨닫게 되는 부질 없는 사람들의 경멸의 손가락질을 참아 냅시다.(니파이일서 8:31~33 참조) 욕하는 자들을 욕하지 말고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맙시다.(교리와 성약 31:9 참조) 그보다 온 힘을 다해 날아오는 불화살을 막아줄 영적 보호막인 신앙의 방패를 힘있게 들어올립시다.(니파이일서 15:24 참조)

형제 자매 여러분, 앞서 말씀 드린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찬양해 여호와와 대화한 사람”이라는 말 이외에 “제가 더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야곱서 6:12; “찬양해 여호와와 대화한 사람”, 찬송가 18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