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또 다른 탕자
2002년 4월


또 다른 탕자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다른 사람보다 덜 존중되거나 덜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증드립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와 우리 안에 있는 불안정함, 염려, 자아상,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하십니다.

구세주께서 전해 주신 가장 잊혀지지 않는 비유들 가운데에는 아버지에게 가서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한 뒤 집을 떠나 경전상의 표현으로 “허랑방탕”하게 그 재산을 탕진한 어리석은 작은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1 돈과 친구들은 항상 그렇듯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사라졌으며,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인해 그 후에 무서운 결산의 날은 늘 그렇듯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내리막길을 거치면서 그는 돼지를 지키는 자가 되었으며, 너무나 배가 고팠고, 재산과 품위를 완전히 잃고 난 그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러한 위안조차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경전은 그가 “스스로 돌이[켰]”다고 희망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종으로는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집으로 갈 길을 찾기로 했습니다. 이 아들을 염려하던 충실한 아버지가 아들을 맞으러 달려나가 수없이 입을 맞추는 애틋한 장면은 거룩한 경전에 있는 모든 이야기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고 애정어린 장면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보호의 팔 속으로 돌아오시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바라시는지를,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그분의 모든 자녀들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작은 아들의 이야기에 심취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큰 아들에 관한 기사를 지나치기 쉬운데, 구세주께서 하신 말씀의 첫 줄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어쩌면 “두 아들을 모두 잃었는데 그들 모두 돌아와야 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와서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웠을 때 큰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밭에서 열심히 충실하게 일했으며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각기 있었던 장소는 달랐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묘사하는 언어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음악과 웃음 소리를 듣습니다.

“한 종을 불러 [그에게 종이 있었다는 것을 유의하십시오.] 이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

“[종이]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이]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나눈 대화를 알고 있습니다. 분명 이 아버지는 집을 뛰쳐 나가 돼지와 함께 뒹굴던 빗나간 아들에 대한 고통스런 마음에 덧붙여, 으레 형들이 그러하듯이 소년 시절의 영웅이었던 이 현명한 형이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보고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에 그 고통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제 말씀을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이 아들은 다른 사람이 집에 왔을 때에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으나 부모님께서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한 것에는 화를 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서 아마도 필요 이상으로 자기 연민을 느끼며, 이 충실한 아들, 놀라울 정도로 충실한 아들은 잠시 동안 더러움이나 절망, 두려움이나 자기 혐오를 자신이 결코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잊었습니다. 그는 목장에 있는 모든 송아지가 이미 그의 것이며, 옷장에 있는 모든 옷과 서랍에 있는 모든 가락지가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점을 잠시 동안 잊었습니다. 충실함은 늘 보상을 받아왔으며 앞으로도 보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그는 잠시 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열심히 일을 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그것을 얻었던 그는 자신이 근접해 있던 완전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지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아직 동정심과 자비, 그리고 동생의 귀향이 경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는 넓은 시야와 성숙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사람은 그의 동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와서 볼 것을 간청했던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잃었다가 찾은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이 동생은 죄수, 곧 죄와 어리석음, 그리고 불결한 생활 속에 사로잡힌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도 어느 정도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자신의 보이지 않는 감옥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질투의 괴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2 그는 아버지로부터 무시당한다는 느낌과 동생에 의해 권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지 않은 모욕의 희생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탄탈루스라도 된 것처럼 물이 목에까지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말라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생각하고, 좋은 운명에 만족을 느꼈던 사람이 단지 또다른 사람 역시 어떤 좋은 운명을 지녔다는 것 때문에 갑자기 매우 큰 불행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로 인해 우리가 받은 축복이 다소 줄어든다고 간교하게 속삭이는 이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미소를 지을 때, 분명 우리에게는 얼굴을 찌푸리신다고 믿게 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여러분과 저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압니다. 그는 모든 거짓의 아비입니다.3 그는 우리의 공동의 적인 루시퍼입니다. 그는 창세 이래로 항상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예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쳐 왔습니다.4

질투는 아무에게도 선뜻 고백할 수 없는 죄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경향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는지는 “질투가 열병이었다면 온 세상이 그 병을 앓았을 것이다.”라는 덴마크의 한 오래된 격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는 그 영향이 너무 멀리 미치기 때문에 그것을 탄식합니다. 그것은 덕성과 재능을 위시하여 어떤 것도 원망할 수 있으며, 모든 선과 기쁨을 위시하여 모든 것에 의해 감정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5 우리가 보기에 다른 사람이 크게 성장하는 것 같이 여겨질 때, 따라서 우리가 보다 작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하게도 종종 그렇게 행동을 합니다.

이러한 일은, 특별히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가 간절히 바랄 때에도 어떻게 해서 일어납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해 주는 이런 저런 유혹을 우리가 매일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 혹은 어떤 것들은 우리가 지금 이 상태의 자신보다 더 멋있고 더 부유하고, 더 박수를 받거나 더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해 줍니다. 우리는 충분한 재산도 모으지 못하고 재미있는 곳에 충분히 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세상의 척도에 의해 저울질 당하며 또 부족하다는 메시지로 수없이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6 머지 않아 우리가 크고 넓은 건물 안에 있는 작은 칸막이 안에 갇히게 되고 그곳의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일한 것이 헛된 망상이라는 제목의, 결코 그 끝이 없는 매우 어지러운 연속극을 보는 것같이 될 것입니다.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자녀들을 애태우지 않습니다. 그는 무자비하게 그들을 이웃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을 서로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한 아들에 대한 동정심어린 몸짓은 다른 아들에 대한 사랑을 취소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두 아들 모두에 대해 하나님처럼 관대합니다. 두 자녀 모두에게 아버지는 자애를 전합니다. 제 소중한 아내 팻이 제 노래를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팻은 재능있는 음악가로 음악적으로 비범한 일면을 가지고 있으나 저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음표들을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노래하려 할 때 아내가 저를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점을 아내의 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아내의 눈은 사랑이 가득한 눈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계속해서 사람을 비교하고, 지성과 매력, 그리고 성공의 적고 많음의 잣대로 사람들의 등급을 매기는 세상에서는 그와 같이 하지 않는 [신의] 사랑을 믿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 누군가가 칭찬받는 것을 들을 때에는 내 자신이 칭찬받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선행과 친절에 대해 읽을 때에는 내 자신이 그들만큼 선하고 친절한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트로피와 보상과 상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되면 내게는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하고 자문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된다.”8 이러한 감정을 거부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세상에서 온갖 것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러한 경향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분노를 돋우고 그 품위를 손상시키며, 또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끔찍하고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주어졌습니다만,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주어졌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그러한 경향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 두 아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만큼 서두르고 겸손한 가운데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가는 길에서 우리는 자신이 받은 많은 축복을 세어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성취한 것에 박수를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것은 사람의 가슴을 위해 이제껏 처방된 가장 좋은 운동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잃어버려진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는 “스스로 돌이”킬 수 있지만, 항상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독생자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분들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도와 줄 것을, 그분들께서 “나오셔서” 우리를 만나고 받아들이시며, 그분들께서 준비하신 향연에 우리를 데려다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경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다는 약속으로 가득차 있습니다.9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어느 누구도 싸우거나 경쟁할 수 없는 하나의 무대입니다. 니파이는 주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며 또 구원을 값없이 주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주께서] 주의 선하심을 취하지 말라고 명하시더냐?”라고 니파이는 묻습니다. 아닙니다! “만인에게 각각 선하심을 취할 권세가 주어져 있음에, [그분의 손에서] 금지 당한 자”는 없습니다.

그분은 “땅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에게로 오라.” 그리고 값이나 상 없이 젖과 꿀을 사라고 호소하십니다.10 모든 사람이 이런 특권을 가지고 있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롭게 생활하십시오. 자신있게 생활하십시오. 두려움이나 시기하는 마음 없이 생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항상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풍성하심을 확인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축복을 간구할 때에라도 그들에게 축복이 내려지기를 진지하게 간구하면서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재능과 능력이 어느 곳에서 주어지더라도 그것들을 북돋아, 이곳에서의 삶을 하늘에서 이루어질 삶에 보다 가깝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덕성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는 바울의 간결한 다음 말씀을 늘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1 그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또 모든 지체가, 아름답든 연약하든 간에, 흠모할 만하며,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12 한다는 그의 깊은 권고를 느끼게 됩니다. 비견할 수 없이 훌륭한 이 권고는 관대함(generosity)이라는 말이 계보(genealogy)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기억하도록 도움을 주는데, 이 두 단어는 모두 같은 태생 또는 종류, 같은 가족이나 성을 의미하는 라틴어 gen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13 은혜를 입고 있는 사람이 참으로 우리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관대해지기가 더욱 쉽다는 점을 늘 알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다른 사람보다 덜 존중되거나 덜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증드립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와 우리 안에 있는 불안정함, 염려, 자아상,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재능이나 외모로 우리를 재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직업이나 재산으로 우리를 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시며 그 경주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적하기 위한 것이라고 외치십니다. 우리가 충실하다면, 완전하게 맞추어 지어져 준비된 의의 옷,14 곧 “어린 양의 피에 … 희게”15 된 옷이 모든 각 사람을 기다리고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을 얻게 하려는 우리의 노력 가운데 각 사람을 격려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