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거룩한 곳에 섬
2002년 4월


거룩한 곳에 섬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여러분이 혼자 있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든 좋은 환경을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이 날은 엄마 아빠가 카드스톤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봉사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청녀 여러분과 같은 십대였습니다. 저희와 함께 사시던 할머님이 외출 중이셨기 때문에, 저는 혼자서 집을 봐야 했습니다. 집을 나서며, 아빠는 저를 안고 “새론, 함께 잘 지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나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을 모르시나?” 바로 그때 저는 아빠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혼자 있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든, 좋은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곳은 혼자 있든 여러 사람 가운데 있든 성신이 함께 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할 때,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것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거룩한 곳이란 우리가 안전과 사랑과 위안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떠나온 하늘의 집이 그랬습니다. 거룩한 곳에 서고 함께 잘 지낸다면 우리가 떠나온 집, 때로는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집에서 가졌던 느낌과 기억들을 되살려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조직되고 2년 반이 지났을 때, 주님께서는 요셉 스미스에게 사악함 때문에 오게 될 전쟁과 기근과 역병에 대해 경고해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의 날이 이르기까지 거룩한 곳에 서서 움직이지 말라.”(교리와 성약 87:8)

거룩한 곳에서 우리는 거의 압도적인 세상의 소요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우리의 동반자가 되고 우리를 도와 줄 것입니다.(교리와 성약 84:88 참조) 위대한 예언자 모로나이는 사악함과 그들 앞에 놓인 무엇이라도 죽이려 하는 레이맨인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모로나이를 제외한 모든 니파이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거의 20년을 혼자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 외로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몬경 마지막 몇 장에 나오는 그의 아름다운 간증과 조언은 천사들과 성신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성신은 외로움이나 고립이나 배척 당하는 통렬한 아픈 느낌을 없애고 우리 마음을 평안으로 채워 줄 수 있습니다. 그분은 보혜사라고 불립니다. 그분은 참으로 보혜사이십니다.

우리가 가장 큰 외로움을 느끼는 때는 의롭지 못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 심지어 그러한 친구들 가운데에서, 홀로 서야 할 때입니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우러 간다 하더라도 안전하지 못한 곳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곳에 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결코 거하지 않는 장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장소를 피하십시오. 저지시켜야 할 호기심을 자극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리하면 확실치 않거나 불안한 느낌이 들 때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헤더는 학교에서 “인기 있는” 학생들과 함께 갖는 파티에 초대되었던 때의 상황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온통 집 안을 뒤흔드는 커다란 음악 소리가 그녀의 영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때 친구들은 어두운 방 안으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헤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티에서 저는 그들과 저의 표준 사이에서 곧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이들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 하더라도, 들리는 말소리나 영화 장면들이 제 생각을 더럽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곳은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데리러 오시기를 기다리며 창문을 통해 어두운 밤을 내다보는 데, 그 언덕 위에 성전이 등대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 빛은 주님께서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제게 확신시켜 주는 것 같았습니다.(허락을 받아 인용하되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음)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도와 주는 것이지만, 이것은 실천을 통해서 얻게 되는 후천적 덕성입니다. 영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에 순종하는 일을 실천하십시오. 도덕적으로 깨끗하도록 하십시오. 성스러운 것을 경건하게 대하도록 하십시오. 주님은 그분에게 나아오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분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60:7 참조)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과 용서와 평화로 감싸게 하십시오.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여러분은 주님의 영이 가득한 자신만의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옷이 얼마나 짧아도 되는지, 꽉 껴도 되는지, 노출되어도 되는지, 내비쳐도 되는지 묻는 대신에, 여러분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을 책임이 있습니다. “성신이 나와 함께 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축복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보이고 행동해야 하는가?”

정반대의 것들이 끊임없이 막아서며, 훨씬 매혹적이고 재미있고 인기있어 보이는 것에 대한 욕망을 다스려 선과 아름다움을 원하도록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침례를 받을 때, 여러분은 계명을 지키겠다는 성약을 맺었습니다. 그러한 침례 성약과 주님의 영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하도록 하겠다는 축복은 합당하게 성찬을 취할 때마다 새로워집니다. 합당하게 성찬을 취할 때 여러분은 유혹에 당면하여 강화될 것입니다.

우리 딸이 성찬식 시간에 세 명의 어린 아들들을 조용하게 하려고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앉은 줄로 거룩한 상징물인 빵이 전달될 때, 세 살짜리 제이크가 제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할머니, 우린 간식을 가져왔으니까, 저 빵이 필요 없다고 말씀해 주세요.” 세 살짜리 아이에게 그것은 그저 빵 조각에 불과했으며 그는 자신이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갈구하도록 교육시키는 것은 행복에 있어 필수적인 일입니다. 아름다운 일몰과 별이 가득한 하늘, 이슬에 젖은 장미, 새끼 고양이, 이 모든 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것들이 거룩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혼자 있든, 군중 속에 있든, 타인들과 함께 하든, 친구들과 함께 하든 여러분이 어느 곳에 있든 거룩한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은 위험하고 무시무시했습니다. 수풀이나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도둑들은 여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친절하고 용기 있는 한 사마리아인이 그 위험한 곳을 거룩한 곳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평범한 곳에 거룩함을 가져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피로에 지친 어머니가 쉴 수 있도록 어린아이들과 놀아 준다면, 오빠의 차례이지만 오빠를 위해 설거지를 해준다면, 연로한 사람들을 위해 집안을 치워 준다면, 이러한 것들이 비이기심과 희생과 거룩함의 느낌들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도록 영이 속삭일 때가 있습니다. 청남, 청녀들이 그들의 언어로 부르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찬송가, 50장)를 듣기 전까지 시베리아에 있는 옴스크라는 러시아 마을은 제게 그저 춥고 삭막한 곳처럼 보였습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갑자기 온 세상이, 적어도 우리의 세상이,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기쁨이 넘치는 거룩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정규적으로 드리는 사려 깊은 기도와 경전 공부를 통해 여러분은 지식과 인도와 안전의 보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학교에 가거나 옷을 사거나 인터넷을 이용할 때도 여러분의 마음이 거룩한 곳에 굳건하고 흔들림 없이 서도록 해줄 것입니다. 제임즈 이 파우스트 부대관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결하거나 통제되지 않은 생각을 정화하는 좋은 방법은 경전을 읽는 것입니다.”(리아호나, 2000년 7월호, 53쪽)

거룩함은 조용하고 평온하여,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쉽게 간과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건에 관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던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다른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헨델의 “메시야”를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각기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구세주이신 같은 메시야를 찬양했습니다. 저는 여러 차례 이 오라토리오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한 연습 시간에 영은 제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간증을 노래하고 있다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사야 53:4) 저는 그분이 저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 3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작은 속삭임처럼 들렸고 저는 그 순간 홀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분의 사랑을 느꼈고 그분께서 십대의 마음속에 있는 저의 질고와 슬픔을 거두어 주셨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순종한다면 주님은 남은 여생을 저와 함께 걸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그러한 축복과 위안과 완전한 사랑을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세상적인 멋이나 인기의 희생이 요구될지도 모릅니다. 겸손과 용서 혹은 완전한 회개가 요구될지도 모릅니다.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이 요구됩니다.(시편 24:4 참조) 모의를 꾀하는 사람들과(교리와 성약 89:4 참조) 미디아의 천박한 꾀임과 사악함, 의도에 상관없이 거룩한 곳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진리와 의를 위해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모든 일들을 다하십시오. 힝클리 대관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높은 곳에 서며 또 선하고 고귀한 성품의 빛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퍼져 나갈 수 있[게 하십시오.]”(“새로운 시작,” 리아호나, 2000년 7월호, 107쪽) 사랑하는 청녀 여러분, 주님께 여러분과 함께 걷도록 간구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생애 동안,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동반자가 되도록 하여, 여러분이 고대하는 그 집, 무엇보다도 거룩한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도록 하십시오.

마치기 위해 여러분과 저를 위한 기도로 찬송가의 가사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거룩함도 더욱

노력함도 더욱

인내심도 더욱

죄의 비통과

주님 생각 더욱

신앙도 더욱

기쁨 소망 더욱

허락합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