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들의 가르침
제21장


“제21장: 감정을 다스리십시오”, 『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토마스 에스 몬슨』(2020)

“제21장”, 『가르침: 토마스 에스 몬슨』

제21장

감정을 다스리십시오

“그 누구도 우리를 화나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영을 동반할 수 있도록 합당하고 싶다면 화를 내는 것을 삼가야만 합니다.”

토마스 에스 몬슨의 생애에서

몬슨 회장은 다른 사람들의 불친절한 말이나 화난 말에 조용하고 부드럽게 응답했는데, 그런 대응은 보통 가장 긴장된 상황도 진정시켰다. 그는 보이스카우트에 입단하고 처음으로 일박 야영을 했을 때 화난 말 대신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의 효과를 알게 된 한 가지 경험을 했다. 몬슨 회장과 회견을 했던 기자는 그 일화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톰과 그의 동료 대원들의 야영에 스카우트 단장 칼이 합류했다. 같은 와드 회원인 칼은 한쪽 다리에 의족을 착용하고 있었다. …

스카우트 대원들이 오두막집에서 잠자리를 준비할 때, 톰과 다른 대원들은 칼이 의족을 벗어서 침낭 옆에 놓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밤중에 그 소년들 중 한 명이 침낭에서 나와 칼의 의족을 슬쩍 훔쳐 자신의 침상에 숨겼다.

칼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의족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칼은 언성을 높여 자신의 의족을 당장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잠시 오두막 밖으로 나갈 일이 있다고만 말했다. 스카우트 대원들은 단장이 한쪽 다리로 껑충거리며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몬슨 회장은 ‘모든 소년이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 칼이 돌아왔을 때는 의족이 전날 밤 그가 놓아 둔 곳에 있었다. 칼은 ‘아까는 못 봤는데 여기 있어 다행이야.’라고 말했다.

몬슨 회장은 한 소년이 장난친 것임을 칼이 잘 알면서도 부드럽게 대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분이 그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더 나은 소년이 되었습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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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를 고치시는 그리스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누가복음 22:50~51)

토마스 에스 몬슨의 가르침

1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는 있다.

저는 최근에 뉴스를 보면서 보도에 등장하는 비극 모두가 한 가지 감정, 바로 분노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많은 주요 내용들이 본질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 저는 시편의 저자가 남긴 다음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시편 37:8] …

…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분노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는 있다.”[Lawrence Douglas Wilder, quoted in “Early Hardships Shaped Candidates,” Deseret News, Dec. 1, 1991, A2]2

얼마 전에 저는 루이스 디킨스 리치가 쓴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윌콕스 부인이라는 적이 있었다. 할머니와 윌콕스 부인은 결혼한 후 작은 마을의 중심가에 서로 이웃한 집에 각각 신혼 살림을 차렸다. 그들은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무엇이 그 전쟁을 시작하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삼십 년이 지난 후, 내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그들조차 무엇 때문에 시작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정중한 논쟁과는 거리가 먼 전면전이었다. …

우리가 어렸을 때 할머니를 방문할 때면, 윌콕스 부인의 손자 손녀들을 놀려주는 것이 재미의 일부였다. 어느 날 우리는 윌콕스 부인의 빗물받이 통 속에 뱀을 집어넣었다. 할머니는 말로는 꾸지람을 하셨지만, 은근히 좋아하시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방적인 전투였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윌콕스 부인에게도 손자 손녀들이 있었다. 따라서 할머니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바람이 많이 불 때 빨래를 너는 날이면 불가사의하게 빨래줄이 끊어져 빨래가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간지인 보스턴 신문의 가사 페이지가 아니었다면 할머니가 그 오랜 고난을 어떻게 참아 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 가사 페이지는 정말 좋은 것이었다. 흔히 나오는 요리 정보나 빨래 요령 외에도, 독자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된 섹션도 있었다. 그 취지는 문제가 있거나 가슴에 쌓인 울분을 발산하고 싶을 때, 알부투스 같은 필명으로 신문에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이다. 알부투스는 할머니의 필명이었다. 그러면 같은 문제를 가진 다른 사람이 … 답장을 보내 자신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공유했다. 흔히 문제는 해결되었고 할머니는 수년간 신문의 그 칼럼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녀나 통조림, 새로운 식탁과 의자 등에 대해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할머니와 바다 갈매기란 필명의 여성은 그렇게 25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바다 갈매기는 할머니의 진정한 친구였다.

내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윌콕스 부인이 돌아가셨다. 작은 마을에서는, 아무리 원수 같은 옆집 이웃이라도, 그 집으로 달려가 유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예의다. 할머니는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무명 앞치마를 말쑥하게 두르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윌콕스 부인의 집으로 갔다. 윌콕스 부인의 딸들은 장례를 위해 이미 말끔하게 치워 놓은 거실을 청소해 달라고 부탁했다. 거실 탁자에는 커다란 스크랩북이 놓여 있었다. 그 스크랩북에는 오랫동안 할머니가 바다 갈매기에게 보낸 편지와 바다 갈매기가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서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가장 고약한 적이 바로 가장 훌륭한 친구였던 것이다. 할머니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당시에는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우시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할머니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낭비해 버린 시간들 때문에 우셨던 것이다.”[adapted from “Grandma and the Sea Gull,” Together, Nov. 1957, 13–14]3

2

우리가 화가 나 있을 때는 하늘 아버지의 영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분노를 느껴 보았습니다.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분노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 또는 우리에게 던진 어떤 말을 듣고 분노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분노하기도 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할 때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할 때 화가 나기도 합니다. 분노하게 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상상에 의한 상처를 입거나 또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길 때 화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제7대 회장이신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님은 청년 시절에 어떤 사람을 위해 일했던 경험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당시 그랜트 회장님에게 5백 달러짜리 수표와 함께 더 많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랜트 회장님은 또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어떤 일을 했습니다. 열 배나 더 힘들고, 열 배나 더 많은 노동력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회장님에게 150달러짜리 수표를 보냈습니다. 젊은 히버는 몹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모욕감을 느꼈고, 그 다음에는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랜트 회장님은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한 친구에게 그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네를 모욕할 의도로 그랬을까?” 그랜트 회장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제 친구들에게는 제게 대우를 아주 잘 해 주었다고 말했다더군요.”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욕할 의도가 없었는데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리석은 거지.”[see Heber J. Grant, Gospel Standards, comp. G. Homer Durham (1969), 288–89]

사도 바울은 조셉 스미스 역 성경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분을 내고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느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저는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우리가 화가 나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영을 느끼는 것이 가능합니까? 저는 그런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몰몬경 제3니파이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논쟁이 너희 가운데 없게 하고. …

이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다투는 정신을 가진 자는 내게 속한 자가 아니요 논쟁의 아비인 악마에게 속한 자임이라,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서로 노여움으로 다투게 하는도다.

보라, 노여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서로 대적하게 하는 이것은 나의 교리가 아니요, 그러한 일을 없이 하는 이것이 나의 교리이니라.”[제3니파이 11:28~30]

화를 내는 것은 사탄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화나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영을 동반할 수 있도록 합당하고 싶다면 화를 내는 것을 삼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4

3

우리는 화를 삼가고,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며,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과 존중심을 보일 수 있다.

… 우리 모두는 그대로 두면 분노로 이어질 수 있는 감정에 빠질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불쾌감이나 짜증 또는 적대감이 생길 때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한다면 통제력을 잃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다른 사람은 보통 우리 가족, 즉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수년 전에 읽은 연합통신 보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형제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는 죽은 형제와 젊은 시절에 뉴욕주 카니스테오 근처 작은 오두막 단칸방에서 살았는데, 한번은 서로 다툰 후 그 방을 반으로 갈라 분필로 금을 그은 적이 있다. 그 날 이후 62년 동안 두 사람은 그 금을 넘지 않았고 서로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분노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매번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분노를 삼가고, 독설적이고 상처되는 말을 내뱉고 싶은 유혹을 자제하겠다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저는 20세기 초에 십이사도 정원회와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한 찰스 더블유 펜로즈 장로님께서 쓰신 찬송가 가사를 아주 좋아합니다.

감정을 다스려라, 나의 형제여

성나고 충동하는 영혼을 길들이라.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지혜의 음성으로 이끌라.

감정을 다스리라

침착하고 차분한 마음에 힘이 있으니

격정은 이성을 무너뜨리고

밝은 눈을 어둡게 만드네.

[“School Thy Feelings,” Hymns, no. 336] …

…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합당한 아들[과 딸]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가정에서 모범을 보이고, 충실하게 모든 계명을 지키며,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고, 구주께서 하신 다음 말씀을 항상 기억하기를 간구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5

고상한 목표이겠지만 세계 평화는 개개인이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평화의 결과입니다. 저는 인간이 추구하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가정 안에서의 평화와 우리 마음 가운데서의 평화와 우리 삶에서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식에 따른 평화는 사라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방식에 따른 평화만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6

저는 교회 회원들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든,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과 존중을 보일 것을 권고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양성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존중을 나타내 보일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합니다.7

4

우리는 자비를 보이고 기꺼이 용서할 수 있다.

제이 르우벤 클라크 회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저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동안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는 당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라 알려진 십자가에 달린 채 죽음의 고뇌에 시달리면서 그분이 하셨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자비의 법칙과는 정면으로 위배된 채,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의 목숨이 다하려는 바로 그 순간, 함께한 사람들이 들었던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in Conference Report, Oct. 1955, 24]

몰몬경에서, 앨마는 이 사건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속죄가 행하여지지 않고서는 자비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지라, 그러므로 자비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세상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시나니, 이는 하나님이 완전하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자, 또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고자 함이라.”[앨마서 42:15]

이러한 지식에 기초를 두고 우리들은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용서하기를 꺼려 하며 고결한 자비 및 용서의 행위를 보여 주기를 거부하는 경우들을 보게 되는 것일까? 그러한 치료의 유향이 인간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에서 장애 요소는 무엇인가? 강퍅함인가? 교만인가? 아마도 증오심이 아직 누그러지고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난은 상처를 악화시킵니다. 오직 용서만이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from O Pioneers! Hallmark Hall of Fame video adaptation of the novel by Willa Cather (1991)] …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에게도 자비가 베풀어질 것입니다. 영혼을 구하려 힘쓰고 파멸하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천국에서는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회개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 아홉 명보다 더 기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권유하셨습니다.[『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가르침』, 73~74쪽; 누가복음 15:7 참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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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두 도둑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저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한 가족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어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그들은 모두 일하고자 하는 의지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셋째 아이가 태어났지만, 두 달도 못 살고 죽었습니다. 장식장 제조업자인 아버지는 자신의 소중한 아이의 시신을 위해 아름다운 관을 만들었습니다. 장례일의 날씨는 아이의 죽음으로 느끼는 그들의 슬픔을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이 음울했습니다. 작은 관을 들고 가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예배당 앞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소수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배당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감독이 바쁜 나머지 장례식을 깜빡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찌할 줄 몰라 하던 아버지는 관을 감싸 안고 가족들과 함께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가족의 성품의 수준이 낮았더라면, 감독을 비난하며 나쁜 감정을 마음에 담아 두었을 것입니다. 나중에야 그 비극적인 사건을 알게 된 감독은 그 가족을 방문하여 사과를 했습니다. 표정에는 아직도 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그 아버지는 사과를 받아들였으며, 둘은 이해의 영으로 서로 포옹을 하였습니다. 더 이상 분노의 감정을 일으킬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관용이 넘쳐 흘렀습니다. …

알렉산더 포프는 이런 시구를 남겼습니다. “실수하는 것은 인간이요, 용서하는 것은 신이다.”[An Essay on Criticism (1711), part 2, line 325]

때로 우리는 너무 쉽게 화를 냅니다. 때로 우리는 진실한 사과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완고합니다. 자아, 자존심, 상심을 접어버리고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합시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 다시 친구가 됩시다. 우리 시대의 분노와 불만을 미래 세대에게 넘겨주지 맙시다.” 파괴밖에 할 줄 모르는 [원한을] 씻어 버립시다.

[악감정은] 어디서 유래됩니까? 어떤 것들은 해결되지 않은 논쟁에서 비롯되[며] … 다른 것들은 실망이나 질투심, 논쟁, 상상에 의한 상심 등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잠들게 하고 썩고 곪아 마침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

제게는 영웅과도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전국적인 규모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유타주 미드웨이로 알려진 한 평화로운 계곡에서 행해졌습니다.

여러 해 전에 로이 쾰러와 그랜트 르문드는 교회의 여러 직책에서 함께 봉사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는 농부이자 낙농업자였습니다. 그러다 그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 약간의 틈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로이 쾰러는 암으로 매우 위독해졌으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 아내 프랜시스와 저는 로이를 방문하여 그에게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그 후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쾰러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일생에서 경험한 가장 감미로운 일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 후 그는 그랜트 르문드와의 사이에 생겼던 오해와 뒤따른 반목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린 서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여 저는 건초 더미를 쌓아 올렸습니다. 어느 날 밤, 자연 발화의 결과로 건초에 불이 나, 건초며 헛간,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망연자실했습니다. 도대체 뭘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밤은 캄캄했고, 다 타버린 잿더미에서 식어 가는 불씨만 가물거렸습니다. 그때 그랜트 르문드 집 방향의 도로에서 트랙터와 중장비의 불빛이 저를 향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조팀’이 우리 집으로 들어서며 눈물에 젖은 저와 마주쳤습니다. 그랜트가 말했습니다. ‘로이, 치워야 할 쓰레기가 많구먼. 자, 우리가 왔어. 시작하자고.’” 그들은 함께 눈앞에 놓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잠시 갈라 놓았던 감춰진 쐐기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밤을 지새워 그 다음날까지 일했습니다. 날이 새자 이웃의 많은 사람들도 거들었습니다.

로이 쾰러는 저 세상으로 갔으며, 그랜트 르문드는 늙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들들은 같은 와드 감독단에서 함께 봉사해 왔습니다. 저는 참으로 훌륭한 두 가족의 우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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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성을 위로하는 여성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에게도 자비가 베풀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모범이 되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데 충실합시다. 그리하여 어떠한 [악감정]도 마음에 품지 말고 이러한 구주의 훈계를 기억하도록 합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9

학습 및 교수 제언

질문

  • 몬슨 회장은 만연한 분노를 언급하고 분노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강조했다.(1편 참조) 여러분은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우리는 어떻게 “분을 그”칠 수 있을까? “알부투스”와 “바다 갈매기”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 몬슨 회장이 언급했듯이, 우리가 이따금 분노를 느끼는 이유를 돌아본다.(2편 참조)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화를 내려는 성향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화를 내지 않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왜 중요한가? 여러분은 화가 났을 때 상대방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가정에서 또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다툼을 줄일 수 있는가?

  •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3편 참조)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심을 어떻게 더 키울 수 있을까?

  • 자비와 용서에 관한 몬슨 회장의 가르침을 다시 살펴본다.(4편 참조)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서 용서를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가?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용서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가?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는 어떻게 더 빨리 용서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을까? 4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용서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관련 성구

시편 145:8; 잠언 15:1; 전도서 7:9; 마태복음 5:38~42; 야고보서 3:2~6; 5:9; 모사이야서 4:13; 앨마서 24:17~19; 제3니파이 12:9

가르침을 위한 도움말

“공과에 대한 통찰과 느낌을 받는다면, 이를 기록하여 그 내용을 기억하고 추후에 참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 영적인 느낌을 기록함으로써, 여러분은 주님의 지시를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더 자주 계시를 주심으로써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다.”(『구주께서 보여 주신 방법으로 가르침』[2016], 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