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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럼 스미스


“하이럼 스미스”, 교회 역사 주제

“하이럼 스미스”

하이럼 스미스

하이럼 스미스는 1800년 2월 9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11세에 무어 인디언 자선 학교(Moor’s Indian Charity School: 아이비리그에 속한 다트머스 대학교의 전신—옮긴이)에 들어간 하이럼은 스미스가 자녀 중 가장 정규 교육을 많이 받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팔마이라 학교 이사회 이사로 활동하며, 올리버 카우드리와 같은 순회 교사를 포함해 교사 후보들을 면접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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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럼 스미스 인물 그림 판화

하이럼 스미스 그림.

하이럼은 형 앨빈의 사망 이후 가족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1826년 11월에 제루샤 바든과 결혼했다. 여덟 증인 중 한 명이었던 하이럼은 몰몬경 판이 진짜임을 증언했으며, 나중에 몰몬경 출판을 도왔다. 그는 뉴욕주 콜스빌에서 초기 교회 지부를 이끌다가 1831년 그들과 함께 오하이오로 떠났다.2

하이럼과 제루샤는 여섯 자녀를 두었다. 1832년 그들의 두 살배기 딸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을 때, 그는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메리가 현세에서 내세로 부름을 받았다. 그 아이는 내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전에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큰 슬픔의 날이다. 오, 하나님께서 부디 위대한 구속의 날 우리가 그 아이를 만나 다시는 헤어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3

하이럼은 교회 초기 시절 여러 차례 선교 사업을 했으며, 커틀랜드에서 처음으로 대제사에 성임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선지자 학교를 조직하는 일을 도왔으며, 커틀랜드 성전 건축을 감독하는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1834년에는 이스라엘 진영(시온 진영)에 참여했으며, 커틀랜드 고등평의회에 지명되기도 했다.4

제루샤는 1836년 딸을 출산한 직후 사망했으며, 하이럼은 몇 달 뒤 재혼했다.5 제일회장단 제2보좌로 새로 부름받은 뒤에는 재혼한 아내 메리 필딩 스미스와 함께 미주리주 파웨스트로 떠났다. 미주리에서 하이럼은 동생 조셉과 함께 리버티 감옥에 수감되었다.6

성도들이 일리노이주 나부로 이주한 뒤에 하이럼은 중요한 지도자 부름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 조셉 스미스 일세의 뒤를 이어 1841년에 교회 축복사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교회 회장 보조 직분에 지명되었다. 이 직분은 올리버 카우드리가 떠난 후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7 주님께서는 1841년에 주신 계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종 하이럼 스미스는 복이 있도다. 이는 그의 마음이 고결하므로 또 내 앞에서 옳은 일을 그가 사랑하므로 나 주가 그를 사랑함이니라.”8 하이럼은 나부시 평의회 및 나부 군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나부시 부시장이었다. 또한, 나부 성전 위원회와 오십인 평의회에 지명되기도 했다.9 마지못해서 하기는 했지만 하이럼은 복수 결혼의 교리를 받아들여 1843년에 캐서린 필립스와 결혼했고, 재혼한 아내의 홀로된 여자 형제 머시 레이철 필딩 톰슨과도 결혼했다.10

1844년 6월에 나부시 평의회에서 Nauvoo Expositor 신문을 없애기로 합의하자, 조셉과 하이럼은 둘 다 논란에 휘말렸다. 이 두 형제는 폭도들의 위협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부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을 선포한 일로 조셉과 하이럼 둘 다 반역죄로 영장을 받고 재판을 받기 위해 일리노이주 카테지로 가야 했다.11 하이럼과 조셉은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폭도들이 카테지 감옥을 습격해 총탄을 퍼부은 끝에 둘 다 목숨을 잃었다. 후기 성도들은 하이럼을 순교자로 기린다. 각각 교회 회장으로 봉사한 그의 아들 조셉 에프 스미스와 손자 조셉 필딩 스미스를 비롯해 그의 후손 중 많은 이들이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

관련 주제: 조셉 일세와 루시 맥 스미스 가족, Deaths of Joseph and Hyrum Smith(조셉과 하이럼 스미스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