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대회
속함의 교리
2022년 10월 연차 대회


속함의 교리

그러므로 속하는 것에 관한 교리는 우리 각자가 다음 사항을 확언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나는 복음 성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안에 속하는 것에 관한 교리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교리는 다음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1) 주님의 성약의 백성이 집합하는 데에서 ‘속하는 것’의 역할, (2) 소속감을 느끼는 일에서 봉사와 희생이 갖는 중요성, (3) ‘속하는 일’에서 구심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초기 시절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북미 백인들과 북유럽 성도들을 위주로 비교적 소수의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고 태평양 제도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교회 창립 200주년을 8년 앞두고 있는 오늘날, 교회는 북미에서 회원 수와 다양성 면에서 크게 성장했으며, 그 이외 지역에서는 더욱 큰 성장을 보였습니다.

후기에 주님의 성약의 백성이 집합하리라는 오랜 예언대로, 이 교회는 진정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 출신의 회원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1 이 다양성은 계산되거나 강요된 것이 아니라, 복음의 그물이 모든 나라와 백성으로부터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보는 우리가 자연스레 기대할 만한 현상입니다.

우리가 모든 대륙과 우리 주위에서 동시에 시온이 세워지는 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말씀처럼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즐거운 기대를 가지고 이날을 고대해 왔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후기의 영광을 가져오도록 택하신 은총을 입은 백성입니다.”2

이러한 특권을 받은 우리는 후기의 그리스도 교회 안에 어떠한 인종 차별이나 종족에 대한 편견 또는 다른 분열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가 되라. 만일 너희가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너희는 나의 것이 아니니라”라고 명하십니다.3 우리는 교회와 가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에서 편견과 차별을 뿌리 뽑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의 구성원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다양해짐에 따라, 우리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함으로 다른 이들을 맞이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4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한에서 교회에서 침례를 받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된다며 이같이 선언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5

소속감은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복리에 있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소외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낙담이 밀려올 때면, 우리가 주님의 높은 기준이나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절대 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6 우리가 주님의 것과는 거리가 먼 기대치를 다른 사람들 또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무심코 강요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한 영혼의 가치가 특정한 성취나 부름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잣대로 우리 가치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중심을 보[십니다.]”7 그분은 우리의 소망과 바람, 그리고 우리가 되고 있는 존재에 대해 마음을 쓰십니다.8

조디 킹 자매님은 지난날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남편 캐머런과 나는 난임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은 교회에서 아이들과 가족들을 보는 일이 기쁨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슬픔과 고통을 안겨 주기 시작했다.

품에 안을 아기도 없고 손에 들 기저귀 가방도 없는 나는 공허감을 느꼈다. …

… 가장 힘든 일요일은 새로운 와드에 처음으로 참석하는 날이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없으니, 사람들은 우리가 신혼부부인지, 언제 자녀를 가질 계획인지를 물어 왔다. 상처를 줄 의도로 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런 말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요령껏 대답하는 법을 터득해 왔다.

그러나 이번 일요일에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특히 힘들었다. 임신을 한 줄 알고 희망을 품었다가 그게 아니었음을 막 알게 된 참이었다.

나는 우울한 마음으로 성찬식 모임에 들어갔고, ‘자기소개’를 요구하는, 판에 박힌 질문에 답하기가 힘들었다. …

정말 상처가 된 것은 주일학교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신성한 역할을 주제로 한 공과는 급선회하여 어머니로서 힘든 점을 토로하는 시간이 되어 갔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받고 싶은 그 축복에 대해 자매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황급히 교회를 나왔다. 처음에는 교회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는 그런 소외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에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가 교회에 참석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에 계속 참석하라고 명하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둘 다 성약을 새롭게 하고 교회에서 영을 느낄 때 얻게 되는 기쁨이 그날 내가 느꼈던 슬픔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사별했거나 이혼했거나 독신인 회원들, 복음을 떠난 가족을 둔 이들, 만성 질환이나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 동성에게 끌리는 회원들, 중독이나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회원들, 최근에 개종한 이들, 새로 이사 온 이들, 장성한 자녀를 떠나보낸 사람들 등등 교회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이런 명단에 속해 있다. …

구주께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당신께 나아오라고 권유하신다. 우리는 성약을 새롭게 하고, 신앙을 키우고, 평안을 찾고, 주님께서 당신의 삶에서 완벽히 보여 주신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 즉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성역을 베풀기 위해 교회에 간다.”9

바울은 교회와 교회 역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0

그렇다고 하면, 누군가가 자신은 삶의 모든 면에서 이상적이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상을 향해 발전하도록 돕기 위해 세우신 바로 그 조직 안에 속하지 못한다고 결론짓는다는 것은 슬프고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판단은 주님의 손과 그분께서 명하신 이들에게 맡겨 두고, 사랑을 나누고 최선을 다해 서로를 대하는 데 만족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즉 모든 이들을 주님께서 베푸시는 큰 잔치에 “데려오”기11 위한 방법을 매일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를 그분께 간구합시다.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것에 관한 교리에서 두 번째 요소는 우리 자신의 기여와 연관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긴 해도, 우리가 느끼는 소속감은 대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주님을 위해 행하는 봉사와 희생에서 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필요 사항이나 자기 안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소속감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주께서 가르치신 다음 교리를 따르기 위해 노력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2

소속감은 우리가 그것을 느낄 때까지 기다릴 때가 아니라 서로 돕기 위해 손을 내밀 때 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는 대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헌납한다거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하는 것이 반문화적인 것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작년에 Deseret Magazine[데저렛 매거진]에서, 로드 드레어라는 저자는 자신이 부다페스트에서 한 젊은 어머니와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30대 초반의 크리스티나라는 가명의 친구와 함께 전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떠나보낸 남편과 함께 공산주의 국가의 박해를 견뎌 낸 노년의 [기독교인] 여성을 인터뷰하러 가는 길이었다. 덜컹이는 전차를 타고 도시를 지나면서, 크리스티나는 아내이자 어린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또래 친구들에게 진솔하게 얘기하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말했다.

크리스티나가 겪는 어려움은 엄마와 아내가 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젊은 여성에게 지극히 흔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 세대는 전반적으로 인생의 어려움은 사람의 복리에 위협이 되기에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녀가 남편과 때로 언쟁을 한다면 그들은 그녀가 남편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자녀들이 그녀를 귀찮게 한다면 그들을 보육 시설에 보내야만 한다고 말한다.

크리스티나는 시련 그리고 고통조차도 삶의 정상적인 일부이고, 또 그 고통이 우리에게 인내하고 친절해지고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기에 오히려 좋은 삶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의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걱정한다. …

… 노트르담 대학교의 종교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는 18세에서 23세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자신의 연구에서, 그들은 대개 사회는 그저 ‘인생을 즐기는 것에 유일한 목적을 둔 자율적인 개인들의 집합체’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3

이러한 철학에 따르면, 한 개인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일종의 반대 세력”인 것입니다.14

반면에, 우리의 개척자 선조들은 선교 사업을 하고, 성전을 짓고, 적대자들의 강압으로 안락한 집을 버리고 떠나 다시 시작하며, 자기 자신과 재산을 시온이라는 대업을 위해 수많은 방법으로 헌납하기 위해 희생함으로써 깊은 소속감과 단합과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들이 보인 인내의 수혜자들입니다. 오늘날 침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가족 및 친구와 멀어지거나, 취업 기회를 잃거나, 그 외 차별이나 무시로 고통받는 많은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약의 백성 사이에서 느끼는 강한 소속감을 보상으로 얻게 됩니다. 주님의 대업에서 우리가 치르는 모든 희생은 자기 목숨을 수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그분과 함께할 자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속하는 것에 관한 교리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역할입니다. 교회에 들어올 때 우정이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 구속받으려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또 우리 자신과 휘장 양편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구원과 승영의 의식을 받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로서 시온을 건설하는 위대한 사업에 참여하려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이 교회는 거룩한 신권의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과 승영의 성약을 지키는 관리자입니다.15 이러한 성약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가장 높고도 깊은 소속감을 얻게 됩니다.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은 최근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 성약을 맺고 나면, 그분과 우리의 관계는 성약을 맺기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집니다. 이제 우리는 함께 결속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돕고자 노력하실 때 절대 지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로운 인내심이 결코 소진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하게 여기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성약의 보증인이십니다.(히브리서 7:22; 8:6 참조)”16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 지니신 커다란 기대는 우리에게 낙담이 아니라 영감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17 것을 추구할 때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생 곳곳에는 실망과 장애물이 있게 마련이지만, 인생은 대장정입니다. 환란을 겪든, 약속된 축복이 지체되든,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었[으며]” 그분과 함께하기에 “담대”할18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위로 향하는 길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로를 돕고 격려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소속감을 줍니다.19

그러므로 속하는 것에 관한 교리는 우리 각자가 다음 사항을 확언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분은 내가 당신의 피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셨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 삶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내가 회개한다면, 그분의 은혜는 나를 변화시켜 줄 것이다. 나는 복음 성약 안에서 그분과 하나이다. 나는 그분의 교회와 왕국에 속해 있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구속을 가져오는 그분의 대업에 속해 있다.

저는 여러분이 속해 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드립니다. 아멘.

  1. 요한계시록 5:9 참조; 또한 니파이전서 19:17; 모사이야서 15:28; 교리와 성약 10:51; 77:8, 11 참조.

  2. 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186쪽.

  3. 교리와 성약 38:27.

  4. 이를 연구한 통찰력 있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사적인 영역에만 그치는 종교가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한 종교는 독서나 텔레비전 시청과 같이 사람들이 갖는 취미의 한 형태로 실내에서 즐기는 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유행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종교에서 자유로워진 개인들이 그러한 종교를 대신할 것으로 절실히 구하는 바다.

    영성은 진정 모든 종교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작은 일부이며, 전체를 대신할 수 없다. 종교는 초월적인 경험을 이따금씩 제공하는 초자연적인 활동이 아니다. 종교는 개인의 삶 즉 온 생애에 영향을 미치거나, 아니면 소실되어 그 자리에는 어떠한 심리 요법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불안하고 공허한 인간의 영혼만이 남게 된다.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가 되려면, 모두를 위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과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Irving Kristol, “The Welfare State’s Spiritual Crisis,” Wall Street Journal, Feb. 3, 1997, A14)

  5. 고린도전서 12:12~13, 25~26.

  6. 러셀 엠 넬슨, “언젠가는 실현될 온전함”,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86~88쪽; 제프리 알 홀런드, “그러므로 너희도 종국에는 온전하라”, 『리아호나』, 2017년 11월호, 40~42쪽 참조.

  7. 사무엘상 16:7.

  8.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가 말씀한 바와 같이, “사랑하는 아버지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있는 그대로 오라’고 하시며 ‘변화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보다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드시겠다는 결의에 차 계심을 기억하며 웃음 짓습니다.”(“입으로 부르는 노래, 마음에서 울리는 노래”, 『리아호나』, 2017년 5월호, 51쪽)

  9. 조디 킹, “난임을 딛고 교회 회원으로 살아가는 일”, 『리아호나』, 2020년 3월호, 46~49쪽.

  10. 에베소서 4:12~13.

  11. 누가복음 14:21.

  12. 마가복음 10:43, 45; 강조체 추가.

  13. Rod Dreher, “A Christian Survival Guide for a Secular Age,” Deseret Magazine, Apr. 2021, 68.

  14. Dreher, “A Christian Survival Guide for a Secular Age,” 68.

  15. 교리와 성약 84:19~22 참조.

  16. 러셀 엠 넬슨, “영원한 성약”, 『리아호나』, 2022년 10월호, 6, 10쪽.

  17. 에베소서 4:13.

  18. 요한복음 16:33.

  19. 요한복음 17:20~23 참조. “이제 내가 너희에게 권하고자 하노니,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기록한 이 예수를 구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이들을 증거하시는 성신이 영원토록 너희 안에 계시며 또 거하시게 하라.”(이더서 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