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대회
날마다 이루어지는 회복
2021년 10월 연차 대회


날마다 이루어지는 회복

우리는 하늘의 빛을 계속해서,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롭게 되는 날”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회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아름다운 안식일 아침에,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분의 복음 안에서 기뻐하고, 우리 구주의 “길”을 걸으면서1 서로를 돕고 지지하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인 우리는 연중 매주 안식일에 이러한 목적으로 함께 모입니다. 교회 회원이 아닌 분들께 진심으로 환영의 인사를 전합니다. 구주를 예배하고 그분에 관해 배우기 위해 저희와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더 나은 친구와 이웃과 사람이 되기 위해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힘써 노력하고 있으며,2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이러한 노력을 이어 나갑니다.

이미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저희의 진실한 간증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시대에 지상에 살아 있는 선지자들을 인도하십니다. 부디 모든 분들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선하심을 취하시라고 권유드립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과, 그분께 가까이 가는 모든 이들에게 분명 가까이 다가와 주실 것이라는3 저의 개인적인 간증을 전합니다.

저희는 주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협착하고 좁은 길을 여러분과 함께 걷는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직선으로 걷는 능력

자주 거론되는 이론 중에 길을 잃은 사람들은 원을 그리면서 걷는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막스 플랑크 생물학 사이버네틱스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그 이론을 실험했습니다. 그들은 실험 참가자들을 울창한 숲으로 데려가서 ‘직선으로 걸어 보라’는 간단한 지침을 주었습니다. 주변에는 위치를 짐작할 만한 큰 건물이나 이정표가 전혀 없었고, 참가자들은 오직 자신의 방향 감각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걸었을까요?

과학자들은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걷는 방향에 대해 신뢰할 만한 단서가 없을 때 실제로 원을 그리면서 걷는다.”4 실험이 끝난 뒤 일부 참가자들에게 질문을 하자, 그들 중 몇 사람은 자신이 직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높은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GPS 기록은 그들이 지름 20미터 크기로 원을 그리면서 걸어갔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직선으로 걷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요? 일부 연구자들은 지형의 작고 사소해 보이는 편차가 그러한 차이를 만든다는 가설을 제시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모두의 한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약간 더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똑바로 걷는 것이 어려운 “더 확실한” 이유는, “어디로 가야 앞으로 똑바로 가는 것인지가 점점 더 불확실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5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신뢰할 수 있는 이정표가 없을 때 진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길에서 벗어남

작고 사소해 보이는 요인들이 우리 삶에서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저는 비행기 조종사로 일하면서 이것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공항에 진입을 시도할 때, 이제 제게 남은 대부분의 일은 항공기가 착륙 활주로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미세하게 경로를 수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차를 운전할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다른 운전자의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바람이나 울퉁불퉁한 도로, 완벽하게 정렬되지 않은 바퀴, 혹은 부주의함 때문에 여러분이 가려던 길에서 벗어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6

이미지
수영장에 빠진 자동차

이것은 물리적으로 적용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적용됩니다.

영적인 생활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변화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점차적으로 한 단계씩 일어납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실험 참가자들처럼 진로에서 벗어나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직선으로 걷고 있다는 강한 확신에 차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해 줄 이정표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로에서 벗어나 생각지도 못했던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해당되고, 사회나 국가에도 해당됩니다. 경전에는 이런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사사기에는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7

모세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하늘의 놀라운 개입과 방문과 구조를 경험하고 기적적인 승리를 얻었음에도,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구주를 따르는 길”을 버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떨어져 나가는 일은 때로는 여러 세대가 지나서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몇 년 또는 몇 달 만에 일어나기도 합니다.8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과거에 영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경험을 했는지에 상관없이, 인간인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기 쉽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반복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걷기 실험의 참여자들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우리 경로를 점검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믿을 만하고 눈에 띄는 이정표들이 존재합니다.

이 이정표들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분명 매일 기도하고, 경전을 상고하며, 『와서 나를 따르라』와 같은 영감받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이 포함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겸손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보좌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과 소망 그리고 그분의 뜻과 소망을 고려해 보는 가운데, 자신의 행위를 깊이 생각해 보고 그날 있었던 순간들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방황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해 주시도록 간청하고 더 잘 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구주께서 자기 양들을 이끄신다

이러한 자기 성찰의 시간은 재조정하는 기회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기록이나 영의 계시로 받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 배우고 고양되며 정화될 수 있는 성찰의 동산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맺은 엄숙한 성약을 기억하며, 우리의 발전 상황을 평가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마련하신 영적인 이정표와 우리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성스러운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개인적으로 날마다 회복하는 시간으로 삼으십시오. 영광스러운 여정을 걷는 순례자인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떨어져 나가기 쉬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편차가 우리를 구주의 길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재조정하는 작고 단순한 행위는 우리가 그 길로 되돌아가도록 분명히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종종 그러하듯 우리 삶에 어둠이 스며들 때, 날마다 이루어지는 회복은 하늘의 빛을 향해 우리 마음을 열어 줍니다. 그 빛은 우리 영혼을 비춰 주고 그림자와 두려움과 의심을 몰아냅니다.

작은 방향타, 커다란 배

우리가 구한다면, 분명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령으로, 참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성신의 은사로 … 지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9 그분은 우리가 자주 구하는 만큼, 우리에게 그분의 길을 가르치시고 우리가 그것을 따르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나름대로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해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다른 사람의 간증에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만의 간증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빛을 계속해서,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롭게 되는 날”이10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회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흐르는 물”은 오랫동안 “흐린 채로 있을” 수 없습니다.11 우리 생각과 행위를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흘러야 합니다!

결국, 복음과 교회의 회복은 한 번에 이루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루씩, 한 마음씩 이루어 가는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 우리 인생도 지나갑니다. 어느 작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루는 곧 일생과도 같다. 한 가지를 시작해도 다른 일을 하게 되고, 하려고 했던 일도 결국 하지 못한다. … 그리고 삶이 끝날 때는 아무렇게나 살았던 그대로의 사람이 되어 있다. 일생은 하루와 똑같은 모습을 띤다.”12

인생의 모습을 바꾸고 싶습니까?

하루의 모습을 바꾸십시오.

하루를 바꾸고 싶습니까?

지금 이 시간을 바꾸십시오.

바로 이 순간에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것을 바꾸십시오.

지극히 작은 방향타가 거대한 배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13

작은 벽돌이 성대한 저택을 이룹니다.

작은 씨앗이 높다란 세쿼이아 나무로 자라납니다.

잘 사용한 몇 분과 몇 시간은 잘 살아온 일생을 이루는 벽돌입니다. 그 시간들은 선한 영감을 주고, 우리를 불완전함이라는 속박에서 건져 내고 들어 올려, 용서와 성결함이 머무는 구속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삶과 새로운 희망이라는 장엄한 선물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목소리를 드높여 너그러우신 용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분명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의 숭고한 목적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불멸과 영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입니다.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의 백성이 회개할 때마다 내게 대한 그들의 범법을 내가 사”할15 것이며,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할16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그리고 친구 여러분, 우리 모두는 때때로 방향을 잃고 헤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영적인 이정표를 찾고 인정하며, 개인적인 계시를 받아들이고, 날마다 회복을 이루려 힘써 노력한다면, 이생에서 겪는 어려움과 시련을 헤쳐 나갈 수 있고 사랑이 많으신 그분께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실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17

우리가 날마다 회복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1.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한복음 14:6) NIV First-Century Study Bible[새 국제판 1세기 학습 성경]에는 이러한 설명이 나와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길(path or way)은 종종 하나님의 계명이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을 상징했다.[시편 1:1; 16:11; 86:11 참조] 이는 일련의 신념이나 가르침 또는 관행과 관련하여 고대에 널리 사용되던 일반적인 은유였다. 사해 두루마리 공동체(The Dead Sea Scrolls community)는 스스로를 ‘길’을 따르는 자라고 불렀으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석을 따르는 자임을 의미했다. 바울과 초대 기독교인들도 스스로를 ‘길을 따르는 자’라고 불렀다.”[사도행전 24:14 참조](i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Bible Gateway, biblegateway.com/topics/the-way-the-truth-and-the-life)

    1873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예루살렘 총대주교 도서관에서 Didache[디다케]라는 고대 서적이 발견되었다. 여러 학자들은 그 서적이 1세기 후반(주후 80~100년)에 집필되고 읽혔다고 믿고 있다. Didache는 이러한 말로 시작한다. “두 가지 길이 있으니,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또 하나는 죽음의 길이다. 그러나 그 두 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생명의 길은 이러하다. 첫째, 당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 trans. Roswell D. Hitchcock and Francis Brown [1884], 3)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등의 다른 출처에서, “교회의 초기 시절에 예수의 메시야 직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스스로를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불렀다.”[사도행전 19:9, 23; 22:4; 24:14, 22 참조](ed. Frank E. Gaebelein and others [1981], 9:370)

  2. 모사이야서 2:17 참조.

  3. 교리와 성약 88:63 참조.

  4. “Walking in Circles,” Aug. 20, 2009, Max-Planck-Gesellschaft, mpg.de.

  5. “Walking in Circles,” mpg.de. 이 그림은 연구 참가자 네 명의 GPS 추적 상황을 보여 준다. 그중 세 명은 흐린 날에 걸었다. 그들 중 한 명(SM)은 해가 구름에 가려진 상태에서 걷기 시작했지만, 15분 후에 구름이 사라지면서 태양을 볼 수 있었다. 태양이 보였을 때 참가자가 직선으로 걷는 데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6. 불과 2도의 좌표 오차로 여객기가 남극 대륙의 에레보스 산에 충돌하여 257명이 사망한 비극적인 예를 읽어 보려면,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몇 도의 차이”,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57~60쪽을 참조한다.

  7. 사사기 2:10.

  8. 그리스도께서 미대륙을 방문하신 후,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침례와 성신을 받았다. 한때 그들은 다투고 교만한 백성이었으나, 이제는 “저들 중에 다툼이나 논쟁이 없었으며, 사람마다 서로 대하기를 바르게 하였”다.(제4니파이 1:2) 이 의로움의 기간은 교만으로 사람들이 구주를 따르는 길에서 돌아서기 전까지 약 2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영적인 표류는 훨씬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앞서 나온 때보다 수십 년 전인 몰몬경의 판사 치세 50년에, 백성들 사이에는 “지속되는 평화와 큰 기쁨”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 회원들의 마음에 들어온 교만 때문에, 4년이라는 짧은 기간 후에 “교회 내에 많은 불화가 있었고, 또한 백성 가운데서도 다툼이 있어 많은 유혈이 있”었다.(힐라맨서 3:32~4:1 참조)

  9. 교리와 성약 121:26.

  10. 사도행전 3:19.

  11. 교리와 성약 121:33.

  12. Michael Crichton, Jurassic Park (2015), 190.

  13. “배를 예로 들어 보자. 그것은 매우 크고 강한 바람에 이끌리지만, 아주 작은 방향타로 조정되어 조종사가 가고자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게 된다.”(야고보서 3:4, 새 국제판 성경)

  14. 모세서 1:39 참조.

  15. 모사이야서 26:30.

  16. 교리와 성약 58:42.

  17. 신명기 28:8∼9; 또한 1∼7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