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비이기적인 봉사
2009년 4월


비이기적인 봉사

우리의 구주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이기적인 봉사를 하는 희생을 통해 그분을 따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몸소 비이기적인 봉사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려면 자신의 이기적인 이해를 버리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4~25; 또한 마태복음 10:39 참조)

I.

후기 성도들은 집단으로서 그 가르침을 따르는 데 남다르며, 특히 비이기적인 봉사의 정도에서 그렇습니다.

해마다 수만 명의 후기 성도들이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려고 신청서를 제출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은퇴 후의 즐거운 삶과, 가정의 안락함, 자녀 및 손자 손녀들과 두터운 정을 쌓는 삶을 제쳐 두고 낯선 사람들에게 봉사하려고 낯선 곳으로 떠납니다. 젊은이들은 직업과 교육을 미루고 어디든 부름 받는 곳으로 봉사하러 갑니다. 수십 만 명의 충실한 회원들은 “성전 사업”이라고 부르는 비이기적인 봉사에 참여합니다. 그들에게는 산 자이건 죽은 자이건 간에 인류에 대한 사랑과 봉사 이외에는 다른 동기가 없습니다. 스테이크, 와드 및 지부의 수많은 역원들과 교사들도 그와 같은 비이기적인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세상적인 보상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와 같은 봉사를 행합니다.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나 소망들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 전, 영국에서 한 새로운 선교사가 좌절과 낙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의 편지를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현명하신 부친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너를 잊고 봉사하러 나가거라.”1 젊은 고든 비 힝클리 장로는 무릎을 꿇고서 자신을 잊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몰두하겠노라고 주님께 맹세했습니다.2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주님의 성숙한 종이 된 힝클리 장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자는 쇠퇴하여 죽을 것이나 남을 위한 봉사에 자신을 바치는 자들은 성장하여 이생에서나 영원한 세상에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3

지난 1월에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께서 브리검 영 대학교 학생들에게, 학창 시절에 준비하는 것들 중에 타인을 위한 봉사를 포함하여 “영적 준비”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몬슨 회장님은 “사랑의 태도”가 주님의 성역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소경에게 시력을 주셨고, 보행장애자에게 다리를 주셨으며,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창조주를 직접 만날 때, 우리는 ‘직책을 몇 개나 가졌는가’ 하는 질문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몇 사람이나 도와주었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몬슨 회장님은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상, 여러분은 주님의 백성을 섬김으로써 그분을 섬기게 되기까지는 결코 그분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4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한 가지 흔한 예는-후기 성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바로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낳아 기르기 위해 고통을 겪고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들과 안락을 희생합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맞춰서 생활하고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이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더욱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 가족 한 명이 최근에 비행기에 타고 있던 도중에 자녀를 갖는 대신에 개를 키우자고 말하는 어느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인즉슨, “개는 말썽을 덜 피워. 개는 말대꾸도 하지 않으니까 벌 줄 일도 없잖아.”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후기 성도 부부들이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일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돌보라고 보내 주시는 자녀를 낳아 기름으로써 주님을 섬기는 비이기적인 사람들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또한 장애가 있는 가족이나 연로한 부모님을 돌보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이런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하고 묻지 않습니다. 비이기적인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편리는 제쳐두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비이기적인 봉사는 이 시대에 참으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 재물, 기타 즉각적인 보답을 받는 것과는 대비되는 일입니다.

후기 성도들의 희생은 남다릅니다. 우리는 매주 성찬을 취하면서 주님과 이웃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거룩한 성전 의식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희생하고 헌납하겠다는 성약을 맺습니다.

II.

후기 성도들은 협력이 필요한 일을 할 때 단합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서부의 산악 지대를 개척했던 몰몬 개척자들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비이기적으로 협력하는 명예로운 전통을 세웠습니다. 이 전통을 따라서 오늘날의 “도움의 손길” 사업들이 여러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5 최근의 몇 차례 선거에서, 후기 성도들은 결혼제도의 수호를 위해 뜻이 같은 사람들과 협력해 왔습니다. 그러한 봉사 때문에 큰 희생을 겪어야 했고 아직도 개인적인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신앙과 교회 봉사를 통해 큰 지역 사회에 유익이 되는 공동의 노력을 어떻게 더 잘 해야 하는지 배워 왔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후기 성도 자원 봉사자들은 교육계, 지역자치단체, 자선 단체, 그리고 고도의 기술과 시간과 자원의 비이기적인 희생을 요하는 기타 수없이 많은 프로젝트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회원들이 기꺼이 희생하려 하고, 협력이 필요한 일에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려 하는 이유가 효과적인 교회 조직 때문이라거나 회의론자들이 잘못 알고 일컫는 “맹종”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외부에서 아무리 우리 교회 조직을 모방하려 하고 맹종을 운운하더라도 이 교회의 기록이나 교회 회원들의 성과를 따라오지는 못합니다.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협력이 필요한 일에 제공하는 우리의 기술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교회 지도자들의 영감에 찬 가르침과, 우리가 맺는 서약과 성약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III.

불행하게도 일부 후기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비이기적인 봉사보다는 세상의 표준과 가치관에 맞춰서 자신의 우선순위를 정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우리를 밀 까부르듯 하려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31; 제3니파이 18:18 참조) 이 말은 사탄이 우리를 주변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고귀하고 특별한 세상의 소금이 되고(마태복음 5:13) 온 인류에게 빛을 가져다 주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마태복음 5:14, 16; 또한 제3니파이 18:24 참조)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두려워하게 되면 구주를 잘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칭송을 구하고 주님의 것보다 세상의 것에 더 마음을 둔, 회복된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교리와 성약 30:2; 58:39 참조) 그러한 질책은 우리가 세상의 표준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표준을 세우기 위해 부름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존 에이 윗소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걷거나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들과는 다른 운명과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맞추어야 합니다.”6 단정하지 않은 복장을 포함하여 유행을 따르는 작금의 모든 행위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한 지혜로운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해변에서 수영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면 인명 구조원이 될 수 없는 법이다.”7

세상의 칭찬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려 하는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것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신 구주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시 에스 루이스는 구주의 그 가르침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사욕을 갖는 순간, 자신을 가장 중요시하며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하고 하나님이 되고자 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사탄이 범했던 죄이며, 사탄이 인간에게 가르쳤던 죄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이 성욕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 사탄이 우리의 옛 조상들의 머리에 심어 놓은 것은 바로 그들이 “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마치 스스로 창조된 것처럼 혼자 힘으로 설 수 있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는 별개로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허망한 시도 속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어떤 것을 찾으려 하는, 인간의 오래되고 비참한 이야기밖에 없다.”8

이기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특히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사항과 욕망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길로, 또 자기 자신의 신의 형상을 따라 걷나니, 그 형상은 세상의 모습”(교리와 성약 1:16)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약을 받지 못하며(교리와 성약 1:15 참조),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우정과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구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서로 사랑하고 봉사한다면, 성약을 받고 친구들을 얻게 됩니다.

IV.

우리는 희생이 고리타분해지고, 우리의 조상들에게 비이기적인 협동의 필요성을 가르쳤던 외부의 주체들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 지금을 “나” 세대, 즉 모든 사람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라고 묻는 것 같은 이기심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조차도 시현에서 세상의 교만을 상징했던 “크고 넓은 건물”로부터 조롱하고 경멸하는 이들의 칭송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니파이전서 8:26~28; 11:35~36 참조)

이 시대의 세상적인 욕망은 바로 헛된 것을 위해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탐욕의 모습을 했던 사탄이 지금은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나는 이것을, 저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나는 누구니까. 즉 아들이니까, 딸이니까, 시민이니까, 피해자니까, 어떤 단체의 회원이니까. 권리란 대체적으로 이기적인 것입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되, 주는 것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그것의 개념은 바로 자신을 주변 사람들보다 높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정한 보상의 기준,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을 때 그것은 바로 그 축복이 근거를 두고 있는 율법에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기준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교리와 성약 130:21 참조)

탐욕과 권리의 양상은 일부 기업 임원들의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보너스에서 자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는 더 널리 만연해 있습니다. 탐욕과 권리 의식은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차입과 과도한 소비주의에 기름을 부어 금융 위기를 불러오고 급기야 온 세계를 삼켜버릴 기세입니다.

도박도 탐욕과 이기심의 한 예입니다. 도박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돈을 빼앗아오려는 마음에서 최소한도의 금액을 내겁니다. 아무리 위장을 해도, 아무 수고도 없이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수확에 관한 복음 율법에 배치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 또한 고린도후서 9:6 참조)

세상의 가치관은 “그것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잘못 가르칩니다. 그러한 부패한 자세로는 어떤 변화나 성장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위한 위대한 계획에서 밝히신, 운명을 향해 영원히 진보해 나가는 것과 반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계획은 우리가 이기적인 욕망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며 이생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비이기적인 봉사의 위대한 모범이 바로 인도 캘커타의 고 테레사 수녀입니다. 그분은 서원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극빈자들을 위해 무료로 진심어린 봉사”9를 하는 데 생을 바쳤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우리에게 언제나 천국행 승차권을 보증해 줄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자애와 친절의 행위로 채우는 것이다.”10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또한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큰 사랑으로 작은 일들만 할 수 있을 뿐이다.”11라고 말했습니다. 이 훌륭한 가톨릭의 성인이 작고했을 때, 제일회장단은 애도의 메시지를 이렇게 발표한 바 있습니다. “비이기적인 봉사로 일관한 그녀의 삶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영감이 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이 가득한 그녀의 행위들은 미래 세대들을 위한 기념비로 우뚝 설 것입니다.”12 이것이 바로 구주께서 말씀하신, 자기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교회에 참석하는 우리의 자세에서 그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상처를 받았어요”, “교회는 저의 필요사항들을 충족시켜주지 못해요.” 그런 말들은 모두 자기 중심적이며, 영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것들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현명한 친구가 이런 글을 보내 왔습니다.

“오래 전, 저는 교회에 갈 때의 마음가짐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 자신을 위해 교회에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갑니다. 혼자 앉아 있는 분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처음 오신 분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 자원해서 일을 맡아 합니다. …

“한 마디로 말해서,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인 사람이 되며,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매주 교회에 갑니다. 그 결과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고 보람도 큽니다.”13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풀기 위해서 행동하고 봉사할 때 더 행복해지고 더 큰 보람을 갖게 된다는 영원한 원리를 대변해 줍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우리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이기적인 봉사를 하는 희생을 통해 그분을 따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주님은 “하나님의 모든 은사 가운데서 가장 큰 것”(교리와 성약 14:7)인 영생과,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살 수 있는 영광과 기쁨을 약속해 주십니다. 저는 그분들과, 그분들이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위대한 계획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1. 고든 비 힝클리, “Taking the Gospel to Britain: A Declaration of Vision, Faith, Courage, and Truth”, Ensign, 1987년 7월호, 7쪽.

  2. Ensign, 1987년 7월호, 7쪽 참조.

  3. Teachings of Gordon B. Hinckley(1997년), 588쪽.

  4.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Great Expectations”,(교회 교육 기구 청년을 위한 노변의 모임, 2009년 1월 11일), www.ldsces.org

  5. “몰몬 도움의 손길, 봉사의 첫 10년을 마무리해”, 교회소식, 리아호나, 2009년 3월호 참조.

  6. 존 에이 윗소, Conference Report, 1940년 4월, 36쪽.

  7. Ardeth Greene Kapp, I Walk by Faith(1987년), 97쪽.

  8. C.S. Lewis, Mere Christianity(1980년), 49쪽.

  9. The Joy in Loving: A Guide to Daily Living with Mother Teresa, Jaya Chaliha 및 Edward Le Joly 편(1996년), 15쪽.

  10. Life in the Spirit, Kathryn Spink 편(1983년), 42쪽.

  11. Life in the Spirit, 45쪽.

  12. “News of the Church”, Ensign, 1997년 11월호, 110쪽.

  13. 마크 스카우슨이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에게 보낸 서한, 2009년 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