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영육의 생명을 염려하라
2003년 4월


영육의 생명을 염려하라

참으로 개종한 제자들은 비록 불완전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어떤 날, 어떤 시기, 어떤 악과 멸망의 상황에서도 “영육의 생명”을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 곧 혼란과 변화가 소용돌이치는 세상의 사건들 속에 인간의 진정하고 지속적인 고투가 있습니다. 그렇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세상의 염려 속에서 주님의 말씀 가운데 “… 영육의 생명을 염려하라.”(교리와 성약 101:37)는 말씀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외적인 일에 열렬하게 관여하고 있더라도, 이 내적인 투쟁은 평온한 시기든 소란한 시기든 언제나 계속됩니다. 이해하거나 깨닫는 것에 관계없이 대대로 이것은 인간이 지상 생활에서 행해야 하는 불변의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고린도후서 4:16)집니다. 그렇게 되면 일진이 나쁠 때도 우리는 여전히 외적인 상황에 관계없이 “영혼을 지키”게 됩니다.(잠언 19:16 참조)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염려하고” “지키는” 일은 탕자의 경우에서처럼 평온한 때에도 일어납니다. 그는 “매일” 돼지를 치다가 어느 특별한 날 “자신을 돌이키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누가복음 15:17) “먼 나라”(누가복음 15:13)에서 그 특별한 날 어떤 일이 일어났든, 탕자는 “[그의] 행위를 생각하고”(시편 119:59)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누가복음 15:17~18) 반성에 이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에게 영원히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향하는 돼지치기 탕자를 알아보는 통행인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상황에서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상호 작용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를 둘러싼 외관상 지역적인 소요 사건을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헤롯과 “원수”(누가복음 23:12)였으므로 그와 헤롯 사이의 새로운 화합은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의심할 여지없이 정치적인 뉴스였습니다. 서로 상극이었지만 그는 예수 대신 바라바를 사면하라는 조건을 내세우는 군중의 뜻에 따랐습니다. 손은 씻었지만 더러운 손으로 빌라도는 분명 가이사랴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고통스럽지만 수십, 수백 억의 사람들을 부활하게 해 주고 해방시켜 줄 범우주적인 속죄를 위해 겟세마네와 갈보리로 갔습니다.

오늘날 이 곳 저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마치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선물인 부활이 비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위대한 부활의 영화로운 은사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거친 파도가 깊은 바닷속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속죄의 경우에도 중요성에 있어서 전세계적이고 영원한 것들이 작은 동산과 외딴 언덕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은 종종 조용한 가운데 진행됩니다. 예를 들면, 요셉 스미스 일세의 가족이 어떤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뉴잉글랜드에서 뉴욕 주 북부로 갔을지라도,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있는 한”(니파이이서 25:22) “그리스도의 또 하나의 성약”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구모라 언덕에 묻혀 있는 성스러운 판을 향해 인도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쟁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조용히 “영육의 생명”을 돌보는 일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사건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로움을 나타내 보이게 하는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 내지만, 외적인 동요는 내적인 결의가 너무나 쉽게 실패한 것처럼 보일 경우에라도 그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적대감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성약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 일어나고, 남편과 아내가 별거를 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간음이 합리화될 수는 없습니다. 일곱 번째 계명에는 다음과 같은 각주가 없습니다. “전시를 제외하고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 20:14 참조)

데이비드 오 맥케이 대관장님은 전쟁이 발발해 있던 당시에 군에 있는 회원들에게 전쟁의 “추악함” 속에서도 “자신을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지키라”고 권고하셨습니다.(Conference Report, April 1969년 4월, 153쪽)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더라도, 그러한 혼란이 도둑질과 거짓 증거로 즉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거기에도 역시 예외 조항은 없습니다만(출애굽기 20:15, 16 참조), 사업상 동반자를 대적하거나 주주를 대적하는 일을 정당화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상황이 불확실하다는 것이 도덕적 불확실성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우리를 빗나가게 하는 세상의 소요가 우리의 죄를 덮거나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군대의 승리가 개인적인 자제심의 싸움에 대한 승리로 대치되지도 않습니다. 또한 격노한 인간의 증오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그분의 완전하고 구속적인 사랑을 약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어둠의 안개가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변경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엘리사와 함께 산에 있던 젊은이처럼 됩시다. 처음에 주변에 있는 적의 병거에 위협을 느낀 젊은이의 눈은 기적적으로 열린 후,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으며,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열왕기하 6:16, 17)고 한 말을 확인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영적으로 숫자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과 함께하는 자들이 적대자들보다 많습니다.]

우리가 지적으로 부족하고 혼란한 일을 경험할 때, 그것이 어떤 일을 선택할 경우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식에 관한 사실을 변경시키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분쟁에 관한 세속적이고 단편적인 그 날의 뉴스와 속보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가 그분 앞에 공존하는 “영원한 지금”에 살아 계십니다.(교리와 성약 130:7 참조) 그분의 신성한 계획은 분명히 일어납니다. 이것은 그분은 마음에 품으신 것을 확실히 행하기 때문입니다.(아브라함서 3:17 참조)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십니다.(아브라함서 2:8 참조) 하나님은 “그분의 사업”을 하실 수 있으며,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고, 우리가 종종 선택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인간의 가장 훌륭한 계획이 잘못될지라도 그분은 그것을 이루십니다.(니파이이서 27:20 참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주십니다.

“… 내가 너희를 인도할 것임이니 …”(교리와 성약 78:18)

“… 나는 너희 가운데 있으리니 …”(교리와 성약 49:27)

형제 자매 여러분, “그분은 [우리가] 번민할 때에 그분의 살아계신 예언자 고든 비 힝클리 대관장님의 인도를 포함하여 [우리]와 함께 해 주[실]”(교리와 성약 3:8) 것입니다.

반면 “영육의 생명”에서 선택의 순간들은 친절과 분노, 자비와 불법, 관용과 인색함 사이의 개인의 일상적인 결정에서 자기 부정이나 방종으로 반응하는 것이 계속 반복됩니다.

전쟁은 두 번째 계명을 폐지하지 않습니다. 그 계명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이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표시를 달지 않으며 특정한 피부색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배고픔을 느낄 수 있지만, 마지막 남은 식량으로 엘리사를 대접했던 미망인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열왕기상 17:8~16) 진정으로 궁핍하고 빈곤한 가운데 나누는 그와 같은 일은 늘 감동적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훌륭한 감독이었던 엠 서얼 마쉬는 대공황기 동안 어린 나이에 광산에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키가 컸던 그는 계속 졸라서 결국 취직을 했으나, 다른 몇몇 친구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후한 마음을 갖고 있던 어린 서얼은 힘들게 번 돈을 여러 번이나 이 친구들이 취직을 할 때까지 나누어 썼습니다. 그가 훗날 매우 훌륭한 목자가 된 것은 당연합니다.

“영육의 생명”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볼 때, 완전한 개종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씨앗이 먼저 예수님이 정의하신 “정직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즉 “좋은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8:15) 일이 일어나는 순서에 따라, “기쁨”으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열매를 맺고” “견디”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을 마침내 배웁니다.(마태복음 13:20, 23; 요셉 스미스 역 13:21; 마태복음 5:6 참조) 그것은 “큰 변화”입니다.(모사이야서 5:2 참조) 개종은 근본적으로 “육으로 난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람”(모사이야서 3:19; 힐라맨서 3:29; 또한 고린도후서 5:17 참조)이 되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에 이루어지는 수고가 아닙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는 “악을 좇으려 하지 않[고] 계속하여 선행을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모사이야서 5:2 참조)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에서 확실하게 개종한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들을 “굳게”(누가복음 22:32 참조)하고, “…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베드로전서 3:15)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격려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의로운 사람들은 인류에게 중요하면서도 조용한 또 다른 봉사를 행합니다. 그들은 온 인류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집단의 일부가 됩니다.

참으로 개종한 제자들은 비록 불완전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어떤 날, 어떤 시기, 어떤 악과 멸망의 상황에서도 “영육의 생명”을 추구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아버지 사업”을 계속하게 할 것입니다.(누가복음 2:49; 또한 모세서 1:39 참조)

이러한 완전한 개종은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므로, 힘든 사건들과 소요는 실제로 우리가 여행을 재개하거나 가속하게 함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의 불안하고 초조한 염려 가운데서 우리는 가르침 받은 대로 “영육의 생명”을 염려합시다. 예수님의 영화로운 속죄 덕분에 불멸의 영육의 생명은 그 어떤 별의 수명보다도 길고, 따라서 그 생명은 힘들지만 짧은 이 지상생활보다 오래 계속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으로 간증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