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영적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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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결심

청년 성인을 위한 전 세계 영적 모임

2020년 1월 12일

오늘 저녁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특권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제 아내에게도 감사드리며 그 말씀의 메시지를 지지합니다. 특히, 훌륭한 합창단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종교 교육원의 가치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저는 종교 교육원을 사랑합니다. 종교 교육원에 참석할 기회를 가진 모든 분들이 등록에서 나아가 꾸준히 출석하고 활발히 활동하시길 권고합니다. 종교 교육원은 우리가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활동 중 하나입니다. 오늘 합창단이 부른 곡의 가사는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이 작사하셨습니다. 그분이 적으신 가사의 느낌과 표현들이 제 마음에 와닿는 것처럼 여러분도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을 향한 넬슨 회장님의 사랑과 안부를 전합니다. 이 행사를 위해 아스트리드 트민즈 총장님과 유타 밸리 대학교의 교직원분들이 보여주신 관대한 배려에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엘 톰 페리 장로님과 저는 임무 수행차 뉴욕시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브루클린에 있는 역사적인 유대교 회당을 방문했습니다. 매우 웅장한 건물이었던 그 회당은 예전부터 인근 지역에 비해 부유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유대교 개혁파의 랍비인 한 여성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그 역사적인 건물의 곳곳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회당은 전성기에 격조 높은 건축물이었으나, 당시에는 대규모 보수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랍비는 신도 수가 줄었으며, 회당을 유지하고 주간 학교를 포함한 여러 프로그램을 지속할 기금이 부족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대화를 계속 이어가면서 그녀는 일반적으로 청년들이 유대교 전통은 고수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대교에 가입하여 헌신적인 신도가 되는 일은 꺼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청년들은 정기적으로 그 건물을 친목 활동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회당은 그들에게 하나의 모임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시설 사용과 관련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때마다 기부를 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신도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페리 장로님과 저는 그 이유에 관하여 랍비와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랍비는 대부분 독신인 그 청년들 다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이 삶에서 종교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청년들은 그곳이나 어떤 유대교 단체에도 헌신할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페리 장로님은 그것이 다른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즉 그들이 유대교에 헌신한다면 다른 것을 놓칠까 두려워하는 현상이라고 여기셨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 이런 현상과 긴밀히 연관된 선택과 결심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인정합시다. 우리 모두는 가능하다면 삶의 모든 면에서 최상의 것을 경험하고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더 좋은 무언가를 놓칠까 봐 어떤 선택이나 결심을 영영 미루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기 마련입니다. 아침에 직장이나 학교에 간다면 그 시간에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볼 수는 없습니다.(그렇지 않나요?) 학교에서 토목 공학을 전공한다면 역사나 미술, 생물학이나 다른 과를 전공할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학교에 평생 남을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지금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로 여행을 간다면 그 시간에 다른 어떤 곳도 갈 수 없으며, 가고 싶어 하는 다른 장소들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사로 봉사하기로 한다면 그 기간에는 다른 여러 사회 활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선택을 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매우 불규칙해질 것이며, 결국 가장 좋은 것들을 대부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제 아내는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을 수 없어요. 그걸 다 어디에 두려구요?”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으며, 좋거나 재미있을 것 같은 일을 모두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듣기 좋거나 혹 칭찬할 만한 일”만 선택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것을 다 가지거나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1 한 번의 지상 생활 동안 그러한 것을 다 할 시간과 방법과 공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한 선택들에 집중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좋은 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선택을 지나치게 미루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혼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 명의 배우자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포기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온 마음을 다하여 네 아내를 사랑하여 그와 결합하고 다른 아무와도 결합하지 말지니라”2 이러한 선택은 변경이 불가능한 최종적인 것이므로, 어떤 이들은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영원히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사람과 서약을 맺으려 하지 않고 어딘가에 놓치고 싶지 않은 더 완벽한 영혼의 단짝이 있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수년 전에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배우자가 될 수도 있는 여성에게 충치 치료를 한 치아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절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함을 원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완벽한 배우자감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이곳에는 청년 성인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성인이라는 사실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인이 되기를 미룬 채 끊임없이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으로서의 책임이 있고, 성인으로서 성취와 기여를 하거나 그런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십 년 전에 저술가이자 학자인 찰스 머레이는 “잘 산 삶”의 의미에 관해 강연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노년에 이르렀을 때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합시다.”3

머레이는 취리히에서 청중들에게 잘 산 삶을 통해 얻는 깊은 만족감에 관해 강연했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석에 있던 이십 대 몇 명이 다가와 ‘잘 산 삶’이라는 말이 자신들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잠자리 상대자와 새로 산 BMW와 마조르카에 있는 별장으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자신들의 삶에는 채워야 할 빈 공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대단히 흥미롭긴 했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 그들의 사고방식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이란 활성화되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비활성화되는 화학물질의 집합체이다. 삶의 목적은 그 사이의 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보내는 것이다.”4

머레이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통찰력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인류의 지혜는 삶을 잘 살려면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5 진정한 성인이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쾌락이 결코 삶의 중심이 될 수 없으며, 삶의 목적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이 진리의 밑바탕에는 두 가지 큰 계명이 있습니다. 즉,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6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7 영생에 대한 약속이 담긴 복음 성약은8 이 두 가지 큰 계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우선순위에 따라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 큰 계명에 충실하게 생활하는 것이 잘 산 삶과 성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규정합니다.

결국,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들에 관한 한, 헌신하지 않는 중립의 길이란 없습니다. 앨마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자의 길과 행복의 길에서 당신을 따르도록 요구하신다고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한 목자가 너희를 부르시느니라. 참으로 그가 자기의 이름 곧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부르시나니, 만일 너희가 선한 목자의 음성에, 너희가 일컬음을 받는 그 이름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아니하면, 보라, 너희는 선한 목자의 양이 아니니라.

그러면 이제 만일 너희가 선한 목자의 양이 아니라면, 무슨 무리에 너희가 속하였겠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마가 너희의 목자요, 너희는 그의 무리에 속하였느니라. 이제 누가 이를 부인할 수 있느냐?”9

앨마는 현실적으로 오직 두 가지 선택 사항만 있으며, 그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할 좋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거짓 신을 따르는 것이며, 그 그릇된 길은 적어도 궁극적으로는 끝없는 낙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구주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분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10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주님께 헌신하며 그분과 하나가 되고자 노력하는 일을 조금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사도들과 그들의 말을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 하옵소서”11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경지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온전히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망설일까요?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는 사실을 알면서 왜 그분의 멍에를 메지 않으려 할까요?12

실패에 대한 두려움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해 보자면, 그런 논리를 이해하면서도, 그리고 우리와 함께 애쓰는 영의 간청을 느끼면서도 다소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그토록 지대한 헌신을 계속할 능력이 있느냐에 대한 염려입니다. 우리가 진정 끝까지 헌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차피 실패할 것 같으면 헌신을 아예 안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는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말씀드리는데, 여러분은 이미 그 단계를 지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전세에 있을 때 하늘 아버지께서 마련하시고 아들이 옹호한 구원과 승영의 계획을 받아들였으며,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의 육체적인 탄생은 여러분이 이미 그러한 결심을 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첫째 지체”13를 지켰으며, 이제 관건은 이 “둘째 지체”에서 그 결심을 지키고 “[여러분의] 머리 위에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더하여지”게 할 것이냐입니다.14 우리는 전세에서의 결심을 공고히 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선택인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고, 온전히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은 실패할 수 없습니다. 만물 아래로 내려오셔서 모든 것을 이기셨으며 이제 모든 권능을 지니신 그분께 결속된다면, 우리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15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께서는 우리의 일이 잘 풀리는지 아닌지를 재미 삼아 지켜보는 방관자가 아닙니다. 그분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샘 좀 봐. 저번에도 이런 상황에서 일을 망쳤으니 이번에도 분명히 또 그럴 거야.” 또는 “저거 봐. 샌드라의 친구들이 그녀를 곤경에 빠뜨렸군. 과연 샌드라가 잘 헤쳐나올지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되겠어.”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분들은 마음을 기울여 우리 편에 서셔서 우리에게 끝없는 도움과 인도와 자원을 제공해 주고 계시며, 우리가 그것을 받고자 한다면 아마도 더 주려고 하실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권능에 결속시키는 성약을 지킬 때 우리는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성공하지만, 때로 우리는 모두 실패를 경험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한 실패에는 우리의 실수와 죄가 있고, 다른 이들의 실수와 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용서의 은사로 이 모든 실패와 결점은 일시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그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서 영생을 앗아 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만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때, 우리 능력 밖의 일들을 해결하고 고쳐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권능이나 은혜는 죄와 실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 줄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성결케 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16

물론, 이러한 모든 일이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투쟁과 고난과 비극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제자가 되어 그분께서 주신 “쓴 잔”을 마시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17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셨으며, 그렇기에 우리가 제자의 길을 성공적으로 걷도록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구주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권능과 열의도 있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도움이 얼마나 필요하든, 또 얼마나 오래 걸리든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또한 나의 백성이 회개할 때마다 내게 대한 그들의 범법을 내가 사하리라.”18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저 계속 회개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희생

선한 목자의 요청에 응하고 그분의 무리에 속하기를 망설일 만한 또 다른 이유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희생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예수께 질문했던 청년을 기억하실 겁니다.19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저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0 그 청년의 반응도 기억하실 겁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1

저는 이 부자 청년이 그것에 관해 숙고해 본 후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후에 구주의 권유를 받아들였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그리스도께 헌신한다는 것은 희생을 수반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희생해야 할 것은 “다른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제자의 길과 양립할 수 없는 아주 많은 선택 사항이 있으며, 제자의 길은 더 좋은 것 또는 가장 좋은 것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자원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좋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구주께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물었던 신실한 청년은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그가 소유했던 재물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아마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제 그에게는 그 재물이 없고, 있어도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 그것이 얼마나 큰 희생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청년에게 구주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까요? 그 청년이 소유했던 것이나 그의 부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궁극적으로 제안하신 것과 비교가 될까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포함하여 구주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승영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22

우리는 제자가 됨으로써 수반되는 희생을 두려워하기보다 영적인 힘을 키우고, 더 큰 기쁨을 맛보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희생, 특히 그리스도의 대업에서 희생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 큰 계명을 정말로 지킬 것이라는 진정성을 나타냅니다. 희생이란 우리가 세상에서 진정으로 선한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온 마음과 능력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 영혼에 확인시키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려 타인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며, 그들을 이해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필요 사항과 그들이 처한 현실을 진정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길가에 있는 다친 사람을 보았으나 그를 진정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인만이 다친 나그네를 진정으로 보았기에,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23 지속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희생은 확실히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헌신

현세와 내세의 기쁨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헌신은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입니다. 옴나이서에는 다음과 같이 심금을 울리는 간청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그의 구원과 그의 구속의 능력에 참여하기를 바라노라. 참으로 그에게로 와서, 너희의 온 영혼을 그에게 예물로 드리고, 금식과 기도를 계속하며 끝까지 견디라. 그리하면 주께서 사심같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로다.”24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침대에 눕히고 방을 나오는데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시 가 보니 아들은 바닥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쩌다 침대에서 떨어졌는지 물었습니다.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침대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않았어요.”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에도 그와 같이 온전히 들어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입니다.25 여러분은 그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온전히 헌신하여 기꺼이 베풀고 받아들이십시오. 주변 사람들을 진정으로 보고 또 그들이 여러분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삶이 잘 산 삶, 성역과 축복과 만족이 가득한 삶이 되게 하십시오. 즉, 구주로부터 축복받고 성결케 되는 삶이 되게 하십시오. 그분은 모든 것을 이겨내셨으므로 여러분도 그분의 은혜로 모든 것을 이겨낼 것입니다.

지난 여름 개척자의 날에 태버내클 합창단과 템플스퀘어 오케스트라의 공연에 노르웨이 출신의 천부적인 가수 시셀이 특별 출연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청중은 그녀가 경건하게 부르는 “Slow Down”이라는 곡을 들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시편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였습니다.26

그 공연 동영상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이 곡을 들으시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축복하고 지지하시려는 그분의 마음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는 메시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 자신을 그분께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성스러운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혼돈에 휩싸여

절박하기만 할 때

생각의 갈피를 못 잡을 때

부드러운 음성이 스며드네

자, 천천히 조용하게

잠잠히 주님의 영을 기다려

가만히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라

시련에 휩싸여

불안하기만 할 때

많은 것들에 억눌릴 때

부드럽고 청아한 음성이 살포시 다가오네

자, 천천히, 조용하게

잠잠히 주님의 영을 기다려

가만히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라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라27

속도를 늦추십시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결심을 하십시오.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조용한 시간과 사적인 장소를 찾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여러분이 그분의 것이며, 여러분의 육신과 영혼은 그분과 그분의 아들과 복음의 길에 헌신할 것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리십시오. 그런 다음 지금, 그리고 일생 동안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십시오. 더 이상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삶의 목적과 사명을 계속 수행하십시오. 지상에서의 삶은 참으로 짧습니다. 이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감으로써 여러분의 영원한 삶이 후회가 아닌 기쁨의 시간이 되게 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하는 영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이제 자신 있게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모든 것을 바칠 때 주님께서는 상으로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을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주실 것임을 약속드립니다.28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으며, 그분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실 수 있고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분은 생명이시며, 그분이 오신 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29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구속주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분의 축복과 제 간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