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느니라
2008년 10월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교육 정도나 지적 수준에 상관없이 그분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부모들은 종종 어른들의 질문에 답하는 자녀들의 말에 깜짝 놀라곤 합니다. 어느날 저녁 우리 부부가 외출 중이었을 때, 자녀들을 봐 주던 이웃이 아이들의 기도를 듣고 강한 호기심이 일어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너희 종교와 우리 종교의 차이점은 무엇이니?” 여덟 살 난 제 딸은 즉시 대답했습니다. “거의 같아요. 우리가 훨씬 더 공부하고 있다는 거 빼고는요!” 제 어린 딸은 이웃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나름대로 후기 성도들은 항상 지식의 추구를 중요시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무릇 사람이 무지하고서는 구원받음이 불가능하니라.” (교리와 성약 131:6) 그는 또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지식의 원리는 구원의 원리입니다. … 구원받기에 충분한 지식을 얻지 못하는 자마다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교회사, 5:387) 이 지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가 그분들의 면전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분들이 마련하신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는 것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지식이라는 원리를 사람들은 흔히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예지입니다.(교리와 성약 93:36 참조) 그것은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 가능한 수준을 훨씬 능가합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지적으로 복잡한 개념 속에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이해 수준에 자신을 맞추십니다. “만일 그분께서 어린 아이에게 오신다면, 그분께서는 자신을 어린아이의 언어와 이해력에 알맞게 자신을 맞추실 것입니다.”(조셉 스미스, 교회사, 3:392)

만일 엘리트 지성인에게만 유용한 것이 복음이라면 하나님은 참으로 불공평한 분이실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교육 정도나 지적 수준에 상관없이 그분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원리를 어린이 조차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지닌 힘을 증거해 줍니다. 존 테일러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자체로 신비하고 심오한 주제를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평이하게 설명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참된 예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Discourse,” Deseret News, 1857년 9월 30일, 238쪽) 간결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표현할 때 그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신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더 확실하게 증거를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성역을 베푸시는 동안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의 복잡한 논리와 자신의 간결하고 진실된 가르침을 자주 비교하셨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간교한 질문으로 그분을 시험했지만, 그분의 대답은 언제나 명명백백했고 그 간결함은 어린이의 것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태복음 18:1, 2~4)

또 예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누가복음 10:21)

성경은 아마도 다른 어떠한 책보다도 더 많이 해석과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처음 읽는 어린이도 그가 경전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대다수의 전문가들과 같거나 오히려 더 높을 수도 있습니다. 구주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에게 맞게 주어집니다. 여덟 살의 어린이도 침례의 물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있으며 완전한 이해와 함께 하나님과 성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예수의 침례 이야기를 읽고 무엇을 이해하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에 의해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성신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에게 내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누가복음 3:22)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린이는 신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시각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신으로 구성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독립된 세 분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들이 간결함과 명백함의 원리를 배척함에 따라 수많은 배도가 집단적 또는 개인적으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몰몬경에서 선지자 야곱은 그러한 고대의 사람들을 향해 “명백함을 지닌 말씀을 경멸하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구하였도다. 그런즉 그들이 푯대를 지나쳐 바라봄으로써 눈이 멀게 되었으매, 그들이 눈멀게 됨으로 넘어지지 아니할 수 없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그의 명백함을 제하시고, 그들이 원했으므로 그들이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그들에게 내어 주셨음이라.”(야곱서 4:14)라고 비난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쉽다”는 생각에 빠지도록 유혹당할지도 모릅니다. 나병을 고치기 위한 엘리사의 권고가 너무나 간단해 보였던 나머지 자신의 자만심으로 인해 그 권고에 순종하기를 망설였던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의 종들은 나아만이 그 어리석음을 깨닫도록 인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열왕기하 5:13~14) 씻김을 받은 것은 단지 그의 육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겸손에 관한 이 아름다운 교훈을 받아들였을 때 그의 영혼 또한 씻김을 받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학습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사를 완전히 신뢰하고 순수한 영을 지녔으며 대단히 겸손합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성신이 오도록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성신은 우리가 영에 관한 지식을 얻도록 도와주는 통로 역할을 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인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린도전서 2:11)

또한 그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2:14)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우리는 육욕 또는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 아니하는 한 …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유순, 온유, 겸손, 인내하며, 사랑이 충만하게 되어, 주께서 합당하게 여겨 그에게 내리시는 모든 것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기를, 아이가 참으로 그 아버지에게 복종함같이 하[는]”,(모사이야서 3:19)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철학적 단편 소설 “어린 왕자”에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어린 소년이 장미가 만발한 정원을 발견하고 자신이 정성을 들인 그 꽃이 독특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겪는 혼란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장미가 독특한 것은 겉모양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돌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 자신의 시간과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 사람들은 하나의 정원에 장미를 오천 송이나 가꾸죠 … 그러고도 그들은 거기서 자기들이 구하는 걸 찾지 못해요. 그들이 찾는 것은 장미꽃 한 송이 또는 물 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 하지만 눈으로는 보지 못해요. 마음으로 보아야만 해요.”([1943년], 79쪽)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축척하는 정보의 양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에 중요한 모든 복음의 지식은 교리와 원리, 필수적인 계명 등의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으며, 그것은 침례 전 우리가 받는 선교사와의 토론 속에 이미 존재합니다. 한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교리의 몇 가지 기본적인 부분의 진리에 대한 영적인 이해와 뜨거운 간증을 얻도록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하심에 대한 간증을 갖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 마음 속에서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고 우리 주위 사람들이 그분을 더 잘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들은 우리가 와드나 지부에서 가르칠 때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사 여러분, 여러분 공과의 주요 목표는 개심입니다. 공과의 질은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새로운 정보를 반원들에게 전해주는가에 따라 평가되지 않습니다. 영이 함께 하도록 불러들이고 반원들이 결심하여 실천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여러분의 능력에 따라 평가됩니다. 그들은 공과 시간에 자신이 배운 교훈을 실천하여 자신의 신앙을 행사함으로써 영적인 지식을 키우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알게 되고 간결함에 그 힘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듣고 실천하기를 간구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비밀과 평화로운 것들을 알게 되리니-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 영생을 가져다주는”(교리와 성약 42:61) 지식을 얻게 될 것임을 간증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